23화
하지만 그건 두목의 무력에 마음이 꺾인 자들, 인간 사냥꾼의 이야기였다.
김검천은 두목이 행하는 짓을 보면서도 태연히 입을 열었다.
“평소에 부하들을 엄격히 다뤘나 보지?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 걸 보니까.”
“능력이 없거나 말을 안 듣는 것들은 빨리 쳐내야 하니까. 그래야 조직에 활력이 돌거든.”
“조직을 관리하는 방법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모두가 행복한 조직 같은 건 없으니까.”
김검천의 대답에 두목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의외로 김검천과 말이 통할 것 같기도 해서였다.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지만.
두목은 김검천을 없애려는 생각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김검천을 당장 죽이기보다는 조직으로 영입하고 싶은 욕심이 불쑥 생겨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조직 내에서 전투력이 높은 간부 두 명이 전투 불능이 된 상황이었다.
비어버린 간부 자리를 채울 자들이 필요했다.
물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자들이 눈앞의 김검천과 쿠퍼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목이 간부들에 대해 화를 낸 건 유용하던 도구가 쓸모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마음대로 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적어도 두목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간부들이 쓰러진 건 김검천과 쿠퍼보다 약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았다.
간부들과 달리 두목 자신은 눈앞의 두 명을 이길 확신이 있었고.
본신의 무력만 해도 간부보다 강한 데다가 자신에게는 비장의 수단이 있었으니까.
김검천과 쿠퍼를 간부로 영입하면 쓸모없어진 간부들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머리를 굴린 두목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김검천에게 입을 열었다.
“너. 이 몸의 조직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그러면 돈이든 인간이든 뭐든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태어나서 들어본 것들 중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질 나쁜 농담이었다.
“조직에 들어오라는 건 나보고 네 부하가 되라는 말이냐?”
“말은 그렇지만 본인과 거의 동등한 직위를 주지. 너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네 아래잖아. 널 볼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할테니까.”
“아니다. 마침 조직을 크게 만들 참이라 2개로 나눠서 확장할 것이야. 그중 하나를 맡아라.”
“조직을 반으로 나눠서 하나를 내게 준다는 건가. 알아서 키우라는 말이군.”
“이제 마물의 숲 근처를 벗어나고 싶으니까. 괴물과의 전투로 단련된 우리 조직원들은 강하지.”
“강하다고? 수면에 돌만 던져도 놀라서 도망가는 개구리 무리 같던데.”
“그건 바로 네가 강하다는 증거지. 우리는 다른 영지에 있는 조직에 비하면 강한 편이야.”
“그렇단 말이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김검천을 보자 두목은 일이 잘된 듯싶기에 미소를 지었다.
그곳에서 의뢰를 받아 괜히 하고 싶지도 않은 명령에 따르는 게 아니었다.
두목은 고작 이 주변에서 인간이나 사냥하다가 늙어 죽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강자를 부하로 만들면 두목이 계획한 일도 좀 더 빨리 진행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반 간부보다 강한 수하가 생기는 건 환영인 것이다.
조직을 반으로 가르게 된다면 다른 영지를 공격하는 일은 김검천이 하게 될 것이었다.
결국 힘든 일은 김검천이, 거기서 얻은 이익의 대부분은 두목인 자신이 차지하는 셈이었다.
거기다 일이 잘 안 되면 그때 가서 김검천을 희생물로 삼으면 그만인 것이다.
두목에게는 손해 볼 일이 하나도 없었다.
행복한 상상을 하는 두목에게 김검천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쿠퍼에 대한 의뢰는 어떻게 할 건가?”
“쿠퍼라. 아, 저 대장장이 말인가. 그게 왜?”
“그는 너희 조직이 잡아가야 할 대상 아닌가? 그런데도 그 또한 간부로 받겠다고 하고 있으니 궁금할 수밖에.”
“그 이상한 의뢰 말이지? 쿠퍼뿐만 아니라 그의 딸도 무사히 데려오라는 그것 말이야. 저 녀석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부하가 되겠다고 하면 의뢰를 취소하도록 하지.”
말을 그렇게 했지만 두목의 생각은 달랐다.
김검천을 영입하기 위해 일단 쿠퍼도 받아들인다.
그 후 쿠퍼와 그 딸은 나중에 먼 곳으로 보내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의뢰를 넘겨준 곳은 두목이 마음대로 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을 가진 곳이었으니까.
두목은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일단 김검천이 원하는 답을 해준 것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약속이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 대답을 들은 김검천은 피식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승낙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거절해야겠군.”
두목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이만한 조건이면 너를 위해 최대한 양보한 거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확실히 나쁘지 않아. 이곳에서 그저 편한 생활만을 원하면 그런 방법을 택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왜 거부하는 거냐! 왜!”
“그거야 조직 생활을 하려면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이 해야잖아? 그런데 난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거든.”
“뭐라고? 이런 좋은 조건을 싫다고 한 게 단지 얼굴 때문이냐?”
“정확히는 네 얼굴의 문양이 정말 아니라서 말이지. 폭력을 부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상사라니 끔찍하다고.”
두목이 뭔가 깨달은 듯이 소리쳤다.
“지금 보니 이 몸을 놀리고 있었던 거구나!”
“놀리다니. 어디까지나 진심을 말하는 거였지.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의 격언도 있거든? 그러니 먼저 네 주제나 파악하고 말했으면 좋겠군.”
“이놈이? 누가 네가 두려워서 간부로 영입하려고 했는지 아느냐! 이제 후회해도 늦었다!”
누더기가 되어 버린 가죽 망토를 두목이 벗어 던졌다.
몸을 가리고 있던 망토 아래에서 나타난 건 김검천이 착용한 것과 비슷한 갑옷이었다.
조금 더 몸을 철저하게 가리고 있어 튼튼해 보이긴 했다.
- 탕탕.
자신이 장착하고 있는 갑옷을 두들기며 두목이 자신 있게 외쳤다.
“이 몸이 어떻게 부하들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알려줬는지 가르쳐 주마! 압도적인 무력으로!”
두목의 갑옷을 본 쿠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헉! 저건 마갑? 그것도 국가 정규 마갑 아닌가! 같은 등급이라면 일반 마갑보다 강하다는!”
두목이 기세 좋게 외쳤다.
“그렇다! 이것야말로 마갑! 그것도 기사 상위 10%만이 착용한다는 상급 기사용 마갑이다!”
두목이 장착한 마갑은 풀 플레이트 아머, 전신을 둘러싸는 철판 갑옷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다만 투구는 소지하지 않았는데 방어력보다는 시야 확보를 중시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그의 마갑에는 전신에 고풍스러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슴 쪽에 문장이 뭉개져 알아볼 수 없는 점이 더욱 눈에 띄었다.
두목은 자신의 마갑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바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검천은 쿠퍼에게 물었다.
“마갑을 착용 시 장착자에게는 어떤 이점이 주어지지?”
“기본적으로 공격, 방어력이 오르며 상급 마갑은 마나를 외부로 투사하기 쉽게 만들어 줍니다.”
“그 말은 상급 마갑정도 되면 마나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게 해준다는 건가?”
“거기다 몸 주위로 마나 보호막을 만들어 다양한 공격을 막을 수도 있고요.”
“확실히 파워드슈츠와 닮은 부분이 있군. 그래서 세이야가 날 높으신 분이라고 믿었었고.”
“실제로 높으신 분이시니 세이야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군요.”
“그건 그렇군. 아, 가슴 부위 문장이 훼손되어 있는 건 마갑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것인가?”
“원래 출처를 숨기기 위한 것 같습니다. 저 정도면 왕국에서도 전술 장비로 취급되니까요.”
“좀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 마갑은 보통 왕국에서도 평균적으로 수십 개밖에 없는 귀중한 장비라는 거지요.”
“평균적이라는 말은 국력에 따라 마갑의 소지수도 다른가 보군.”
“중소 왕국이나 공국처럼 작은 곳은 상급 마갑 보유량이 열 개를 넘지 않으니까요.”
“그런 귀중한 장비를 이런 변두리쪽, 그것도 인간 사냥꾼 두목이 가지고 있다는 거군.”
“저건 개인이 원한다고 해서 얻을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이상하군요.”
“하여간 저 녀석이 왜 그렇게 자신 있게 나섰는지는 알겠군.”
“아까 김검천님의 원거리 공격에도 멀쩡한 이유도 말이지요.”
김검천과 쿠퍼의 대화를 지켜보던 두목이 지루한 듯이 입을 열었다.
“아직 멀었나? 유언이 길군.”
김검천이 두목의 말에 대꾸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네가 세상에 존재할 시간이 늘어나는 게 불만인가 보군. 그렇게 자신이 싫은가?”
“흥, 네 마갑도 꽤나 신기한 기능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이 마갑의 상대는 아니다!”
“말로는 뭐라도 할 수 있다고.”
“그러면 행동으로 보여주마!”
말을 마치자마자 두목이 지면을 박차며 김검천에게 달려들었다.
옆에 있던 쿠퍼의 눈에는 흐릿할 정도로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두목의 주먹은 그대로 김검천의 얼굴으로 날아들었다.
김검천은 급히 고개를 기울여 손가락 하나도 안 되는 차이로 피해냈다.
곧이어 두목이 날린 오른 주먹을 김검천의 복부에 적중시켰다.
-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파워드슈츠와 합치면 100킬로의 무게도 넘는 김검천이 위로 떠올랐다.
3미터는 될 듯한 높이까지.
공중에 띄우는데 성공한 두목이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김검천이 떠오른 높이까지 뛰어올라 양손을 모아 몸통을 내려찍었다.
- 쾅!
김검천은 그대로 머리부터 내리꽂히는가 싶더니 몸을 회전하며 무릎부터 착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면에 김검천이 떨어져 내린 자국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충격은 피할 수 없었다.
김검천의 옆으로 가볍게 착지한 두목이 턱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어떤가? 네 무력함이? 힘의 차이가 느껴지는가?”
천천히 일어선 김건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목을 풀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허세는! 주먹을 피하지도 못해서 정면으로 얻어맞은 주제에!”
“네가 착용한 마갑이 어느 정도 위력을 지녔나 확인 중이거든. 머리 쪽만 방어하면 실제로 나에게는 별 피해가 없었지. 실드는 쓰지 않는 것만 봐도 모르겠나?”
김검천의 말대로 별 피해가 없어 보였기에 두목은 잠시 경각심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내려친 주먹 같은 건 어디까지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두목이 이를 드러냈다.
“마갑이 좋을수록 마나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법이지. 국가 정규 상급 마갑 정도 되면 이런 것도 가능하다! 네 놈의 것도 상급 마갑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디서 굴러다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돼!”
“아니, 어떻게 알았지? 이 파워드슈츠가 함선 내에서 굴러다니던 것 중 하나라는 걸?”
“방금 공격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구나. 그런 말을 다 하다니. 자, 이걸 보고 더 후회해라!”
- 부우웅.
두목이 검을 꺼내 치켜들자 검에서 푸른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검을 따라 일렁거리는 모습이 마치 불꽃 같았다.
마나 플레임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일반 기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 중 하나였다.
상급 마갑 착용자가 상급 기사급 마나를 검에 불어넣어야 가능하다는 마나 플레임인 것이다.
아다만임 금속 재질이 아니라면 강철로 된 장비라도 마나 플레임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다만 두목의 마나 플레임 소드는 상급 마갑의 힘을 빌려 만들어 낸 것이었다.
기사 스스로 마나 플레임 소드를 만들어 낼 정도라면 마스터 기사가 될 자질이 있어야 했다.
두목은 어느새 자신감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두목이 양손으로 쥔 검 끝을 자신의 시선과 맞추며 중단 자세로 겨누었다.
“주먹이 안 된다면 다음에는 이걸로 몸통을 베어주지.”
“공지까지 해주다니 고마운데? 그런데 그렇게 알려주면 내가 못 피할 거 같나?”
“이게 피한다고 피할 수나 있는 것인 줄 아느냐! 하압!”
두목이 제자리에서 힘껏 검을 몇 차례 휘둘렀다.
미리내가 재빨리 말했다.
[몸통 부위로 에너지 열원 감지. 파워드슈츠에는 통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입니다.]
“이게 마나에 의한 원거리 공격인가?”
김검천이 자세히 살펴보니 반투명한 푸른색의 반원형의 칼날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마나참.
상급 기사부터 가능하다는 원거리형 마나 공격이었다.
김검천은 미리내의 말도 있었으니 일부러 파워드슈츠를 그 칼날에 대보았다.
- 카칵.
검으로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나의 칼날은 등 뒤로 두 조각으로 나뉘어 날아갔다.
- 쿠쿠쿵!
뒤에 있는 나무 몇 자루가 마나참에 베어져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두목이 쓰러진 나무와 김검천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나참을 견디다니? 제법 단단한 마갑이로군. 뭐, 주먹과 마나참은 어떻게 견딘 모양이지만 이걸 직접 먹고도 견뎌낼 수 있는가 어디 볼까? 마기술. 분영신!”
두목이 몸을 흔들며 김검천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두목의 몸이 갑자기 2개로 불어났다.
“음?”
두목의 본체를 일순간 놓쳐버린 눈과는 달리 김검천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발했다.
미리내 또한 그 본능의 경고에 호응했다.
[왼쪽 목 주위로 검이 날아옵니다.]
“마나로는 이런 재주도 부릴 수 있다는 건가!”
- 카가칵!
마나 플레임 소드가 파워드슈츠를 스쳐 지나갔다.
두목은 공격을 성공했지만 급히 김검천과의 거리를 벌렸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김검천은 파워드슈츠를 살펴보았다.
파워드슈츠에는 고양이가 긁은 듯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김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랑할 만하군. 함선 장갑만큼은 아니지만 파워드슈츠도 제법 단단한 데 말이야.”
두목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괴이한 일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일그러져 갔다.
마나 플레임 소드를 맞고도 멀쩡한 갑옷이라니.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녔다는 마스터 나이트.
그들이 입는 마갑은 되어야 저런 방어력을 보여 줄 수나 있을 것 같았다.
“뭐… 뭐지? 저 갑옷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