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치익.
빗방울이 붙어있는 파워드슈츠에서 미약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김검천은 파워드슈츠에 붙어있는 그것을 들어 올리려고 손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물컹한 푸딩이라도 집은 것처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알 수 없는 존재를 요약해 부르는 모양이었다.
괴물이라는 단어로 말이다.
김검천도 이런 걸 얼마 전에 쿠퍼와 같이 경험한 적이 있었다.
“슬라임!”
슬라임.
반투명한 액체 같은 몸을 지녀 칼같이 베는 병기에는 무적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몸통 공격이나 산성 용액을 몸 밖이나 신체 내에 뿜어내는 것이 슬라임의 공격법이었다.
해머나 철퇴가 그나마 타격계 병기로서 먹히기는 하지만 치명타를 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보면 퇴치할 수 없는 괴물처럼 보이지만 약점만 알면 별 것 아닌 녀석이었다.
거북이같이 느렸기에 도망치기도 쉬웠고.
문제는 슬라임이 비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기에 발생했다.
사방에서 슬라임이 내리고 있으니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다.
김검천은 왜 재해라고 부르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괴물이 하늘에서 셀 수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이게 재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재해라고 해서 비바람이라도 불어 닥치는 줄 알았더니 그 정도가 아니었군. 괴물이 함께하는 폭풍이라니. 우산 쓰는 정도로는 버티기 힘들겠군.”
쿠퍼가 머리를 감싸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번 폭풍은 슬라임이었군요. 생각보다도 더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요?”
“이번이라면?”
“저번 폭풍 때 떨어진 괴물은 게가 기형적으로 거대화된 자이언트 킹크랩이었거든요.”
“그거 맛있었겠군. 아니, 그게 아니라 매번 재해 때마다 괴물이 달라지는 건가?”
“그렇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재해가 닥치기는 하지만 무슨 괴물이 나타날지는 모릅니다.”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물에 관련된 수속성 계열 괴물이 출현한다고 하더군요.”
“슬라임이 물 속성 괴물이라니 충격이군. 정설이 아니라 가설 같은데. 아, 머리 조심해야지.”
김검천이 손을 뻗어 쿠퍼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냈다.
손바닥 위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걸 보니 이건 슬라임이 확실했다.
쿠퍼가 신기한 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게 슬라임인지 알아보셨습니까? 보통은 눈을 뜨고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물하고 슬라임하고 투명도의 차이가 있는 게 보이거든.”
“다른 사람도 구별은 할 수 있겠지만 떨어지는 걸 확인할 정도는 아닐 텐데요.”
“하얀색과 새하얀색 혹은 붉은색과 시뻘건 색 차이를 맨눈으로 구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도 다 있습니까? 역시 세상은 넓군요. 그런데 슬라임 비는 그렇지만 인간 사냥꾼들도 걱정입니다.”
“그쪽은 신경 안 써도 되겠는데. 저길 보라고.”
김검천의 말 대로였다.
인간 사냥꾼들도 슬라임 비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상황은 더 나쁜 상태였고.
“으아악! 살이 타들어 간다!”
“살려줘! 슬라임이 몸에 붙어서 안 떨어져! 누가 손으로 떼봐!”
“슬라임이 손으로 쉽게 떼어지면 이 고생을 하겠냐?”
“차라리 머리를 망치로 때려줘! 슬라임에게 당하고 싶지는 않아!”
“슬라임이 점점 불어난다고. 어떻게 좀 해보라니까!”
“불! 불을 질러! 슬라임의 약점은 불이니까 횃불이라도 만들어봐!”
“누가 그런 일반적인 퇴치법을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비가 오니 불을 붙이려고 해도 계속 꺼진다고!”
단순히 비만 내린다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해 어떻게든 불을 피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뿐만이 아니라 바람마저 거세게 불고 있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누가 몸으로 비와 바람, 슬라임을 막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걸 인간 사냥꾼들에게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붙여도 곧 비를 맞으면 곧 꺼지니 소용없기도 했고.
김검천은 파워드슈츠를 입고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주변을 살필 여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검천은 머리 부위만 손으로 가끔 보호해주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쿠퍼도 자기 한 몸을 보호할 정도는 되었기에 가끔 그가 놓치는 것만 막아주면 되었다.
김검천은 두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만 해도 부하들이 두목을 부축한다고 그의 옆에 많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두목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팔도 들어 올리기 힘든 두목은 머리부터 어깨까지 진득한 점성의 액체가 잔뜩 고여 있었다.
슬라임에게 먹히며 죽어가는 중인 것이다.
두목이 이상한 눈으로 김검천을 바라보며 지면에 쓰러졌다.
이제는 두목의 전신으로 슬라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김검천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긴 억울하기도 하겠군. 마침 재해가, 그것도 슬라임이 아니었다면 네 부하들로 어떻게 날 처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네 생각대로 되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야.”
한편 쿠퍼는 주변으로 점점 쌓여가는 슬라임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현재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쿠퍼는 김검천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김검천님.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불이 약점이라고 했는데 평범하게 불을 피우기는 어려운 상황이군.”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마법의 불꽃이 아니라면 슬라임을 처리하기 힘듭니다.”
[슬라임이라는 게 물리 내성이 100%에 가까운 모양이군요. 때려잡기는 힘든가 보네요.]
“역시 사람은 도구를 쓰는 동물인 만큼 장비도 좋은 걸 써야 하는 법이지. 쿠퍼, 이걸 사용해라.”
김검천은 파워드슈츠로부터 원통형의 물체를 꺼내 쿠퍼에게 넘겨주었다.
블러드트리를 장작불로 사용할 때 사용하던 발화통이었다.
불꽃이 생기는 시간은 잠시지만 두꺼운 나뭇가지를 단번에 태워버리는 강한 화력도 가졌다.
거기다 여러 번 쓸 수 있는 물건인 만큼 지금 상황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도구였다.
“군대에서 야전용으로 쓰는 거라서 방수도 되는 물건이다. 손잡이 밑 부분만 잡아당기면 돼.”
- 치익.
발화통에서 불꽃이 힘차게 생겨나며 빗방울과 슬라임을 통째로 태워버렸다.
쿠퍼가 죽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엨? 이거 실화입니까?”
“그러면 가짜 같냐? 확인한다고 불꽃에다가 손이나 굽지 말라고.”
“아무렴요. 저도 잘 구워진 스테이크는 질색이거든요. 웰던보다는 미디엄 레어지요.”
발화통을 획득한 쿠퍼는 이제 김검천이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았다.
여유가 생긴 김검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명의 주위를 제외하고는 온통 슬라임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나무도 돌도 심지어 사람도 모두 다 슬라임투성이였다.
그렇게 이곳에 있던 인간 사냥꾼들은 모두 전멸한 모양이었다.
다만 나타난 인간 사냥꾼들 수에 비해서 지면에 쓰러진 자들의 숫자는 적어 보였다.
아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슬라임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친 것 같았다.
김검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숲 속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슬라임을 피할 수는 없을 걸. 오히려 슬라임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걸 막기 힘들걸. 뭐, 그게 자신들의 운명이겠지. 나는 내가 알아서 운명을 개척하지만.”
김검천은 슬라임을 회피해가며 근처 나무로 다가선 후 연신 주먹을 휘둘렀다.
- 쾅! 쾅! 쾅!
주먹 한 방마다 부러진 나무가 하나씩 생겨났다.
김검천은 나무를 자신의 키 정도에 맞게 분지른 후 지면에 힘껏 박았다.
- 쿵!
김검천은 그렇게 나무를 박아 나무 벽을 만든 후 그 위에 다시 나무를 겹쳐 쌓았다.
순식간에 통나무집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옆면이 좀 뚫려있는 부실 공사로 만들어진 집이긴 하나 몇 시간 정도만 버티면 되었다.
바람이 옆으로 불긴해도 통나무집 자체가 커서 슬라임이 안쪽까지 들어올 수는 없었고.
김검천의 손짓에 쿠퍼가 활짝 웃으며 통나무 지붕 아래로 달려들었다.
“이야, 김검천님은 손재주도 좋으신데요?”
“정말 손재주가 좋았다면 널 찾으러 가지도 않았을걸.”
“사람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으니 김검천님은 저 같은 사람을 부리시면 되는 거지요.”
“그렇군. 일해라. 쿠퍼. 자발적으로 일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수는 없겠지.”
“제가 뭔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말을 한 겁니까?”
“그건 내 무덤이 아니라 네 무덤이니 괜찮다고? 거기에 들어가는 건 내가 아니잖아.”
잠시 말을 나누며 비와 바람, 슬라임을 피하는 중 쿠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소나기가 잦아드는 게 보이는 만큼 눈 앞의 재해는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지면에 깔린 슬라임이 발목에 잠길 정도로 불어나 있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김검천님. 이제 슬슬 재해가 그칠 것 같기는 한데 지면에 깔린 슬라임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발화통으로 처리하기에는 양이 좀 많아 보이지?”
“저 정도면 몇 마리도 아니고 수천 마리는 되는 슬라임이 깔려 있는 거 같은데요.”
“눈에 보이는 정도만 해도 말이야. 씁, 어쩔 수 없지. 안 되겠네. 꺼내지 않으려 했는데…”
[특수형 무기 장비로 교체합니까?]
“그래. 화염 방사기를 써야겠네. 이렇게까지 비가 왔으니 숲 전체로 불이 번지지는 않겠지?”
“아, 김검천님. 그런 문제라면 괜찮습니다. 이 숲은 불을 질러도 금세 꺼지니까요.”
“약간 실수해도 괜찮다는 거군. 나도 마음 놓고 불을 질러 볼까? 밤에 화장실을 가야겠지만.”
[특수형 화염 방사기 선택. 초고압축가스 연결. 경고. 경고.]
“쿠퍼, 내 앞과 옆으로 나서지 마라. 위험하니까. 이건 내가 조절하기 힘든 장비거든.”
쿠퍼가 급히 김검천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김검천은 쿠퍼가 피한 걸 확인하자 양팔을 들었다.
안 그래도 버리고 가려고 했던 에너지 팩 몇 개가 허공을 날았다.
“오염 제거에는 역시 불꽃이 특효약이지. 오물은 소독이야!”
- 푸화학. 쾅쾅쾅!
붉은 불꽃이 방사선으로 지면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2천 도가 넘은 뜨거운 화염이 지나가는 곳에는 남아나는 슬라임 같은 건 없었다.
굴러다디던 에너지 팩에 화염에 닿아 하나둘씩 폭발하자 광범위로 증발하기도 했고.
화염을 겨우 피해낸 슬라임은 숲으로 도망가는 녀석도 있었다.
김검천은 통나무 집 주위부터 함선으로 돌아가는 방향에 있는 슬라임은 다 태워버렸다.
그 와중에 실수로 화염이 숲의 나무에 붙긴 했다.
그렇게 퍼져나가던 불은 어느 지점에 이르자 쿠퍼의 말대로 갑자기 힘을 잃었다.
김검천이 쿠퍼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저렇게 불이 꺼지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마물의 숲이 괜히 마물의 숲이겠습니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대충 처리한 후 우리도 일을 끝내고 함선으로 돌아가자고.”
“그러네요. 리에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연재해가 끝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는군.”
[모르셨습니까? 또 다른 자연재해가 시작될 겁니다.]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거든?”
***
한밤중의 인간 사냥꾼의 본거지로 피부가 녹색으로 변색된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독단검을 다루던 간부였다.
김검천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크흑… 회복 포션의 도움으로 겨우 여기까지는 왔군. 김검천이라는 놈, 그놈이 단검을 처리할 때 깨졌던 독단검의 파편이 이 몸에게 스쳤을 줄이야. 덕분에 이렇게 중독이 되다니.”
간부가 몸을 회복시키는 포션까지 먹었다고 해도 독내성이 없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었다.
간부가 쓴 건 그만큼 지독한 독이었으니까.
본거지에 남아있던 주술사가 순찰을 돌다가 중상을 입은 간부를 보고 놀랐다.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중독이라도 되셨습니까?”
“비켜! 해독약, 해독약을 찾자. 아니면 죽어 버린다고!”
“아니, 왜 혼자 여기에 나타나셨는지 이야기라도…”
“모두 죽었을 텐데 무슨 대화할 게 있다는 거냐!”
주술사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 죽었다고요?”
“재해가 덮쳤는데 살아있을 리가! 이게 다 김검천이라는 그놈 때문이야! 아무튼 비켜라! 당장이라도 해독약이 필요해!”
간부가 급히 주술사를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넘어졌다.
주술사가 간부의 발을 걸어버린 것이다.
엎어진 간부가 최후의 힘을 짜내 주술사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뭐하는 짓이냐…”
“다들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직 넌 살아 있잖아. 그러니 지옥행을 도와주려는 거지.”
간부의 핏줄이 선 충혈된 두 눈이 억울함에 커다랗게 떠졌다.
“네 놈 같은 건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두목 그 멍청이가…. 커헉…”
부들거리던 간부는 갑자기 피를 토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안 그래도 크게 다쳐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주술사의 행동에 상처가 악화된 것이다.
주변에서 순찰을 돌고 있던 인간 사냥꾼들이 큰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주술사님, 무슨 일입니까!”
“저 중독된 모습은 간부님이 자주 쓰시던 독에 당하신 거 같은데?”
“헉, 저건 간부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면 모르나. 적에게 당한 거지. 들어보니 간부뿐만이 아니라 출정 나간 모두가 죽은 모양이다. 두목님을 포함해서 전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근처 영주들이 합세해 군대라도 보낸 겁니까?”
“아니, 두목님이 그런 바보들에게 당할 리가 없지.”
주술사가 당장이라도 흐뭇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자신을 다독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모두 김검천이라는 놈 때문이라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