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답답해서 무심코 말을 내뱉은 주술사는 바로 후회했다.
자기 목숨이 달린 상황이니 당장은 무조건 말을 따르는 게 나았을 테니까.
다행히 테이룬은 영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그가 생각한 바도 따로 있었고.
“너희들에게 무력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너희들 중 가장 강하다는 두목도 실패한 일이니까. 이 미로 같은 곳의 안내나 잡다한 일을 할 녀석들이 필요한 것이야.”
“아, 그 정도라면 본거지에 있는 자들 중 아무나 몇 명 데려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이 몸이 직접 나서는 데 길잡이 몇 명으로는 부족하다. 괴물이 나타날 때마다 이 몸이 매번 상대하라는 건 아니겠지?”
“헉, 고작해야 대장장이를 잡는 일에 테이룬 경이 직접 나서신다고요? 도대체 왜?”
마스터 나이트 테이룬이 인간 사냥꾼 본거지에 나타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대장장이 한 명을 잡는데 그가 직접 손을 쓰겠다는 말까지 한 것이다.
테이룬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많이 알 필요 없다. 모르는 게 더 나을 테지.”
영주가 옆에서 참견했다.
“그래!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 어울리는 너희들은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영주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눈알을 굴리던 주술사가 테이룬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전 주술을 부리는 주술사입니다. 아까 제가 당하는 모습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힘이 없으면 조직의 지위 같은 건 무시하는 게 인간 사냥꾼들입니다.”
“용건만 간단히.”
“마석, 제 주술의 힘을 증폭시키려면 마석이 필요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흐음. 별 것 아니군. 영주. 하나 넘겨주시오.”
영주가 주술사를 향해 얼굴을 마구 찌푸리다가 품속에서 마석 하나를 꺼내 집어던졌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요즘 마석 수급이 잘 안 되는 판국인데 귀중한 마석을 달라니.”
마석은 주술사의 얼굴에 맞고 떨어졌다.
하지만 주술사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 정도 마석이라면 어떻게든 트윈헤드 트롤 정도는 부릴 수 있을 거 같았다.
괴물을 조종 가능하다면 본거지에 남은 부하들 정도는 통제할 수 있을 터였고.
예전 마을 사람을 다루던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힘을 되찾은 것이었다.
주술사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목숨의 계약금이라고 생각하도록.”
테이룬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버려진 영주가 기겁을 하며 테이룬의 뒤를 따라갔다.
“테이룬 경! 저를 잊으시면 안 되지요. 같이 데려가 주십시오!”
주술사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이 이동하는 방향을 보았다.
두목의 방이 있는 방면이었는데 아무래도 그쪽에 숨겨둔 비밀통로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려던 주술사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건물을 받치던 강철 기둥이 대각선으로 잘려나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했으니까.
아까 테이룬이 베었던 강철 기둥이 이제야 꺾여나가는 모양이었다.
“사… 사람 살려!”
주술사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붕괴하는 건물을 피해 밖으로 튀어 나갔다.
- 쿠쿠쿠쿵!
건물의 반에 해당하는 부분이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오러에 베인 상태로 지금까지 건물 무게를 견디던 강철 기둥이 튼튼하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버려 거기에 깔려버린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겠지만.
그런 와중에 살아남은 주술사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초월적인 존재의 가호가 그를 보살핀 덕에 자신은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주술을 수호하시는 초월 존재시여. 이 미력한 주술사는 당신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
- 키에에엑!
괴물 하나가 몸에 불을 붙은 채 날뛰는 중이었다.
머리에 꽃을 달고 식물 뿌리처럼 생긴 다리로 이동하는 식물형 괴물 플랜트였다.
쿠퍼에게 듣자 하니 이 녀석은 마나의 기운을 차단하는 껍질이 있어 방어력이 좋다던가.
몸통을 꺾어도 덤벼들기에 방어력을 무시한 공격이 가능한 화염방사기로 불을 붙인 것이다.
플랜트는 그렇게 불이 붙은 채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재로 변했다.
김검천은 특수형 무기인 화염방사기의 조작을 종료했다.
“식물 주제에 걸어 다니지 말란 말이지. 블러드트리도 그렇고 이 동네 식물은 왜 이러지?”
“그래도 여기는 괴물이 적게 나타나서 좋군요.”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이 근처에 괴물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 푸쉬, 푸싱.
장비의 상태를 보니 고압축 가스가 슬슬 바닥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옆에서 열심히 걷고 있던 쿠퍼가 대답했다.
“뭐가 나타나든 이제 상관없지 않습니까? 함선이 바로 저기에 보이니까요.”
“함선이 보이니 집에 돌아온 것 같아 반갑기까지 하네. 아, 약초는 잘 챙겼겠지?”
“물론입니다. 이게 없으면 함선 밖으로 나간 게 다 헛수고니까요.”
쿠퍼가 품속에서 꺼내 보인 약초는 은은하게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약초는 무슨 효능이 있는 거지?”
“이 마나 약초는 대기 속의 마나를 흡수해 몸속에 저장한다고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써 본 적이 없지만 듣자 하니 여러 방면의 질병에 좋다고 하더군요.”
“마나가 신체 능력 향상을 가져오니까 그런 효능도 있는 건가.”
“그래도 모든 병에 좋은 건 아니더군요. 잘못하면 이 약초가 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이 과하면 독이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일단 재해가 끝나기 전까지는 리에의 치료에 전념하면 되겠군.”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 약초 주변에서 다른 재료들을 못 발견했다는 겁니다.”
“마나 약초만 있어도 충분한 것처럼 행동했던 거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약효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다른 게 필요하다는 거지요.”
“일단 마나 약초를 먹인 후에 나머지를 찾을 생각인가 보군.”
“재해가 지속되는 동안은 함선 내에서 보내야 하겠지만요. 아! 드디어 도착했군요.”
쿠퍼가 내부를 살핀 후 먼저 들어서 차단문으로 향했다.
움직임에 반응해 벽에서 나온 보안 카메라가 뻗어 나오며 쿠퍼를 살폈다.
쿠퍼는 잠시 흠칫했지만 그대로 차단문을 두들겼다.
“세이야! 우리가 돌아왔으니 문을 열어줘!”
보안 카메라는 쿠퍼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차단문 공격받음. 현재 사용 가능한 무기 없음. 일시 중지. 검사 이행.]
[문양 없음. 검증 방법 변경. 홍채, 음성, 체형으로 임시 탑승원 신분 확인. 차단문 개방.]
김검천이 쿠퍼의 뒤에서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저럴 때는 함선 내 보안용 무기가 고장 난 게 오히려 다행한 일이군.”
잠시 후 차단문을 통과한 쿠퍼는 리에부터 찾았다.
리에를 발견하자 그는 몇 겹의 종이로 보관한 마나 약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절반 분량을 떼어 내더니 리에의 입가에 가져가면서 세이야에게 말했다.
“리에의 입을 좀 벌리고 있어 주겠니? 약초를 먹어야 하니까.”
“엨,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 약초를 그냥 먹이시려고요? 기도가 막힐 수도 있어요.”
“이 녀석이? 걱정하지 마라. 나름대로 방법이 있으니까.”
세이야가 미심쩍은 듯이 쿠퍼를 쳐다보다가 리에의 입을 벌렸다.
입이 열린 걸 확인한 쿠퍼가 들고 있던 마나 약초를 힘껏 움켜쥐었다.
금속 망치도 가볍게 쥐는 쿠퍼의 악력은 마나 약초에서 즙을 짜내기에 충분했다.
마나 약초의 즙은 마나와 같이 은은하게 푸른 기운이 감도는 액체였다.
쿠퍼는 짜낸 액체를 리에의 목구멍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게 혀 쪽으로 떨어트렸다.
떨어진 액체의 일부는 그사이 기체가 되기라도 한 듯이 푸른 연기가 되어 주변을 맴돌았다.
세이야가 쿠퍼의 그런 모습에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세심한 곳이 있는데요? 자기 딸에게는 따뜻한 남자였군요.”
“너에게는 차가운 숲의 남자거든. 그러니 지금은 입이나 다물래? 리에에게 집중해야 하니.”
세이야가 조용해지자 쿠퍼는 즙을 모두 짜낸 후 리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입속으로 떨어진 즙을 마신 리에의 몸에서 감돌던 푸른 기운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창백했던 리에의 얼굴에 훈훈한 온기가 돌며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쿠퍼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김검천에게 말했다.
“휴우, 이제 안심입니다. 적어도 처음 여기 왔을 때보다는 악화될 일이 없을 테니까요.”
김검천이 리에의 입가에 남은 약초즙을 닦으며 물었다.
약초즙의 일부는 김검천의 피부에 스며들더니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김검천이 마나를 흡수하기라도 한 듯이.
“아직 의식은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다는 건가?”
“힘이… 아니, 몸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의식은 점차 회복될 겁니다. 시간은 걸리지만요.”
“하긴 의식이 있으면 고통을 받는 상태라니까 차라리 지금이 나을 수도 있겠군.”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며칠 후 재해가 끝나면 잠깐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리에와 관련된 일인가?”
“예. 남은 마나 약초와 몇 가지 다른 재료를 이용해 리에에게 먹일 약을 만들려고요.”
“재료를 발견하지 못한 장소로 다시 찾아가려는 건 아닌 것 같군.”
“여러 가지 물건을 구하려면 돌아다니는 것보다 그 마을에 가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그때 세이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마을이라는 건 혹시 자유의 마을 말인가요?”
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 숲에 형성된 마을 중에서는 입구 쪽에 위치해 물건을 구하기 쉬운 곳이니까.”
“거기의 소문에 따르면 자유의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곳인 것 같던데요.”
세이야가 투덜거리자 김검천이 물었다.
“말하는 걸 보면 이름과 어울리지 않은 곳 같군.”
“자유도 자유 나름이거든요. 거기 규칙은 딱 3개가 있어요. 첫 번째가 싸움 금지입니다.”
“그것만 들으면 괜찮아 보이는데. 나머지 2개는 뭐길래?”
“두 번째는 문제가 발생 시 서로 동의해서 해결한다네요.”
“들을수록 괜찮은데. 마지막은?”
“뭘하든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다예요.”
“…그건 뭔가 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사기라고 손목이라도 날아갈 거 같은 규칙인데?”
세이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들키면 정말로 손목을 잘리는 거 어떻게 아셨나요?”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거 같으니까. 손목이 잘리기 싫어 반항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손목 대신 목을 잘라버리는 것 같던데요.”
“살벌한 마을이로군. 뭘 해도 안 들키면 문제없고 동의가 있으면 무슨 짓을 당해도 된다는 말이잖아? 첫 번째 규칙도 일 저질러도 안 들키거나 동의가 있으면 소용없는 것 같고.”
“그래서 위험한 곳 같긴 하지만 이 근처에서 물건 구할 때는 그만한 곳도 없지요.”
“그런 규칙을 들으니 마물의 숲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아닌 것 같군.”
“어쩌면 외부 인원들이 더 많을지도 몰라요. 마물의 숲 입구에 존재하는 곳이라서 숲과 근처 도시와 중간 지점이거든요.”
“좋게 말하면 자유 무역 도시 같은 곳이고 나쁘게 보자면 종말 직후 무법자들의 자유 도시군.”
“마을의 출입은 누구든 자유고요. 영지와는 다르게 신분은 중요하지 않거든요. 일단은요.”
“그 마을에 일반인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군.”
“영지를 떠난 사람부터 용병, 강도, 도둑 등 별별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건 확실하지만요.”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회라면 기회인 것 같았다.
“거기라면 주변 영지를 찾아가기 전 이곳 사람들이 어떤지 분위기 정도는 느낄 수 있겠군. 더구나 물건을 구하기 쉽다고 했었지. 혹시 마석을 얻을지도 모르겠어.”
“어떻게든 대부분의 물건은 구할 수 있으니 가능성이 있을 거예요. 자유의 마을답게요.”
“그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는 가서 꼭 느껴보고 싶어지는데.”
“김검천님.”
“응?”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에는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
“그러면 재해가 끝나기 전까지 파워드슈츠 기동 연습이라도 해 둬. 너도 싸울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재해가 다 지나간 후 자유의 마을로 떠날 날이 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파워드슈츠를 장착한 김검천이 세이야를 내려다보았다.
세이야가 어색하게 웃자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파워드슈츠를 장착하는 연습을 해도 아직 걷는 것조차 못하다니.
“그… 그렇지만 진짜로 어려웠는데요? 슈츠가 생각보다 조정하기가 힘들더라고요.”
“하긴 1년은 훈련해야 파워드슈츠를 제대로 동작시킬 수 있긴 하지.”
“그렇죠? 제가 바보는 아니라고요.”
“문제는 당장 네가 파워드슈츠 장착을 못 한다는 것이고. 만약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면 맨몸으로 대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절대로 방해는 안 할 거예요. 마을로 가는 동안 파워드슈츠 다루는 실력도 나아질 거고요.”
“마음만으로는 힘들지만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그러면 준비를 끝내고 출구 쪽으로 오도록.”
세이야가 자리를 뜨자 김검천이 미리내에게 물었다.
“세이야에게 지식 주입기를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을까? 필요한 만큼 진도가 안 나가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