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김검천이 외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세이야가 무심코 돈을 집어 든 채로 김검천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예? 뭐 때문에 그러신가요?”
“거래가 끝난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계약 내용에 해당되는 돈을 가져가면 어떻게 되지?”
“그거야…”
세이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에 있던 푸른빛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그러더니 기류가 모여 단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금방이라도 세이야의 머리로 떨어져 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세이야가 장소를 이동해도 머리 위에 있는 단검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그걸 본 프리가 세이야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손님. 계약을 위반하셨네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대로 있다가는 결국 죽을 텐데요.”
“계약 위반이라니요? 전 그쪽이 말한 대로 거스름돈을 챙기려고 했을 뿐이잖아요!”
“제 말은 계약이 끝난 다음에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만. 손님 마음대로 하시면 안 되지요.”
“뭐라고요?”
“흐흐, 세상에는 공짜라는 게 없다는 걸 깨달은 표정이군요. 그러면 어쩌겠습니까? 물건 말입니다.”
“뭘 어쩌긴 어째요? 이 물건 전부를 그냥 넘기라는 말인가요? 말도 안 돼!”
세이야가 반발하자 그의 머리 위 푸른 단검이 점차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세이야의 목숨이 위험했다.
김검천이 끼어들며 세이야 대신 제대로 된 결단을 내렸다.
“세이야. 해당 거래 물품을 그냥 넘겨줘라.”
“하지만 이건 사기라고요! 이 물건들이 어떤 것들인데요! 구해가야 할 마석은 어떻고요?”
“물론 아깝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런 물건보다는 네 목숨이 중요해. 넘겨줘라.”
“우으… 예.”
세이야가 김검천의 말에 울상을 지으며 카운터에 있던 마석과 돈주머니를 프리에게 내밀었다.
프리가 물건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들고 있는 1 실버고 주셔야지요? 그게 계약 내용이었을 텐데요.”
“고블린의 간이라도 빼먹으시지요?”
세이야가 1 실버를 프리에게 집어 던졌다.
프리는 재빠르게 1 실버를 낚아채면서 공손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손님. 오랜만에 겪는 훌륭한 거래였습니다.”
집어던진 1 실버까지 끝까지 얻어낸 프리였다.
그제야 세이야 머리 위에 있던 푸른 단검이 소멸하며 계약이 끝까지 이행된 걸 알렸다.
세이야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프리에게 말했다.
“양피지의 마법이 끝났네요? 이제 거래가 사기였으니 다시 물건을 뺏겨도 할 말 없겠지요?”
“무슨 말씀을. 마을의 규칙을 잊으셨나요. 이쪽 동의 없는 싸움이라도 하시려고요?
“이잇!”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러면 이 물건은 이제 제 겁니다.”
“비겁해요! 더러운 수를 쓴 건 그쪽이 먼저잖아요! 우리는 그 마석이 필요하다고요!”
프리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그러면 이러는 게 어떨까요? 다시 한번 제대로 중급 마석의 가격을 지불해주신다면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요. 대신 지불 못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앞으로 제 밑에서 일하셔야 할 겁니다.”
프리의 시선이 김검천과 세이야를 훑어나갔다.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눈길로 두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 중인 것이다.
김검천이 세이야 대신 나섰다.
“다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른 마석이나 돈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괜찮겠나?”
“꼭 돈 같은 걸로 받겠다는 게 아니니까요. 뭐로 거래하든 중급 마석의 가치만 있으면 됩니다.”
“아무것이나 괜찮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의 물건을 터셔도 됩니다. 사람을 잡아서 교환하셔도 좋고요. 확실히 해야 할 건 지불해야 할 것이 이 중급 마석 값어치는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급 마석이면 근처 영지에서도 괜찮은 2층 집 하나는 살 정도로 가격이 나가는 건 아시지요?”
“못 할 것 없겠지. 다시 거래하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어차피 거래를 할 때는 마법 양피지를 쓸 테지. 그러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나?”
“맞습니다.”
“우리가 그걸 다시 살 때까지 그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가지고 있어 줬으면 하는군.”
“물론입니다. 그게 상인이 지켜야 할 상도의겠지요.”
세이야가 뒤에서 들리지 않도록 투덜거렸다.
“사기나 치는 상인이 상도의는 무슨. 세상에 존재하는 양심적인 상인은 이미 다 죽었나 봐.”
자칭 양심적인 상인인 프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김검천과 세이야를 살피던 프리의 눈길이 카운터 위에 놓인 수정구에 잠시 머물렀다.
수정구로부터 뭔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김검천이 보고도 못 본척하며 입을 열었다.
“뭘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미 이야기는 끝났으니 계약만 진행하면 될 텐데.”
“아, 죄송합니다. 그 말씀대로 당장 다시 계약을 진행하지요.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뭘 말이지?”
“손님이 별로 돈이 없어 보여서 말입니다.”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
“그건 그렇지요. 요즘 주변에서 마석도 잘 안 나오는 데다가 처음 방문하신 거 같으니 여기서 돈 구할 데도 없어 보여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지금이라도 계약을 물려도 좋고요.”
“그건 곤란하군. 난 그 중급 마석이 필요하거든.”
“본인이 그렇게 원하신다니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진행해야겠군요.”
프리가 다시 계약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김검천이 양피지 위에 손을 얹었다.
“김검천은 최소 중급 마석 가치 이상의 물건을 거래로 넘겨야 한다.”
“프리는 김검천이 어떤 물건을 넘겼을 때 그에 해당하는 가치의 물건을 거래로 넘겨야 한다.”
“누군가 계약을 어겼을 때는 김검천과 세이야, 그리고 프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무방하다.”
“동의합니까?”
“동의한다.”
프리가 양피지를 찢자 둘의 머리 위로 숫자 1의 모양처럼 푸른 마나 기류가 생성되었다.
아까 계약을 할 때와 모양이 달랐기에 세이야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부추기기라도 하듯이 프리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계약 전에 말을 안 한 게 있군요.”
“방금 계약에 대한 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물론 계약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지요. 그저 이번 계약 양피지에 대해 이야기 안 한 게 있을 뿐입니다.”
“그게 뭐지?”
“약속을 이행해야 할 기간 말입니다. 오늘 안까지 중급 마석에 해당하는 물품을 들고 오셔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말에 세이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고 보니 계약을 한 채 시간만 끄는 자들을 대비하기 위해 기간이 정해진 계약 마법 양피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오, 꼬마야. 알고는 있었구나. 계약 양피지를 사용한다고 해도 계약 내용만 어기지 않으면 되거든. 그래서 이렇게 기간이 정해져 있는 계약 마법 양피지가 나오게 된 거지.”
“당신은 진짜…”
“하지만 안다고 해도 실전에서 쓸 수 없는 지식 따위는 쓰레기보다도 못하지. 흐흐흐. 단번에 두 사람이라니. 이게 웬 하늘에서 떨어진 마석이냐.”
“또 우리를 속였어?”
“속은 놈들이 잘못이지. 누가 하라고 칼을 목에 대고 협박했냐?”
“더는 못 참아! 마을의 규칙을 어기든 말든 상관없어!”
“그래도 될까? 계약에 묶여 있는 너희들은 지금 이 몸에게 손을 쓸 수 없지. 하루 동안 말이야. 하루 뒤에는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몸이 될 테고. 으하하하!”
규칙도 법도 없는 이런 마을에서 십 년도 넘도록 장사를 해온 상인인 프리였다.
마법 계약의 내용은 지켜야 했지만 그 계약의 빈틈을 노리는 일 또한 얼마든지 가능했다.
아까 프리가 살피던 수정구는 진실의 눈이라고 하는 마법 도구였다.
그건 상대가 말하는 게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김검천과 세이야 둘 다 가진 마석이나 돈이 없다는 건 이미 그 마법 도구로 확인한 것이다.
갑옷으로 무장한 김검천이 돈이 될 만한 뭔가를 더 들고 있을 리는 없었고.
그런데 김검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프리를 바라보았다.
프리는 찔끔했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뭘 봐? 처음 계약하는 애송이나 무식한 기사 따위는 얼마든지 속여 넘길 수 있거든.”
“내가 그런 무식한 기사로만 보인 모양이로군.”
“그럼 아닌가? 하는 행동이나 갑옷을 보니 기사가 맞을 텐데. 용병은 너 같은 품위가 없거든.”
“내가 품격이 있다니 용병이 어떤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군.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어떻게든 중급 마석의 가격에 해당되는 걸 오늘 안으로 지불할 수 있다고? 웃기는군.”
“왜 못한다고 생각하지?”
“오, 순진한 기사 양반. 지금이라도 나가서 괴물을 사냥해 마석을 찾을 생각인가? 꿈 깨시지.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가게에서 중급 마석을 찾을 생각도 안 했을 텐데.”
“하긴 괴물을 잡아도 마석이 안 구해졌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니까. 그건 네 말이 맞다.”
포기한 듯한 김검천의 말에 프리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하인이 2명이나 늘었는데 어디다 쓸까. 꼬마는 팔고 기사는 호위로 쓸까나? 강하기만 하면 다라고 생각하는 놈들이란. 사람은 이 몸처럼 머리를 써야 하는 법인데.”
김검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질도 급하군. 아직 계약이 끝날 시간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말이야. 나도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무슨 의미냐?”
“이런 뜻이지. 괜히 발 아프게 마을 밖까지 나가서 내가 뭘 해야 할 필요가 있겠냐는 거다.”
김검천이 쥐고 있던 손을 펴자 카운터 위로 금속 조각을 떨어트렸다.
- 둥.
떨어진 금속 파편끼리 부딪치며 북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금속 중 하나라는 아다만임 금속 특유의 소리였다.
“아다만임의 파편이다. 이게 제법 비싸다고 하더군. 뜻대로 안 돼서 미안하지만 이걸로 계산해줘야겠어.”
프리가 급히 금속을 확인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다만임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분명 네 소지품을 확인했을 때는 안 보였는데?”
“사람은 겉만 보고 확인하면 안 되는 법이지.”
김검천은 파워드슈츠의 수납공간이 있는 곳을 툭툭 치며 말했다.
하긴 보통은 갑옷에 주머니같이 물건을 보관할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할 것이었다.
이게 다 파워드슈츠 안쪽에 내장된 액체 금속에 의한 공간 활용 덕이었다.
프리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래도 아직 거래에서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카운터 위의 아다만임 파편의 가격을 계산해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해. 이건 중급 마석이야, 중급 마석은 근처 영지 중심지에 있는 2층 집도 살 수 있다고!”
“그거 대단하군. 이런 작은 돌멩이 같은 걸로 2층 집을 살 수 있다니. 나도 질 수는 없지.”
- 쿵!
김검천이 파워드슈츠에 보관하고 있던 아다만임 검을 꺼내 카운터에 박아 넣었다.
쿠퍼가 준비해 준 물건이 아다만임 파편으로 끝난 게 아닌 것이다.
“듣자 하니 이걸로는 근처 영지도 살 수 있다던데? 그러니까 네가 돈을 거슬러 줘야겠어. 그러고 보니 거스름돈이 제법 많을 텐데 네가 지불할 수 있을까 의문인데 그래?”
김검천의 말에 프리가 카운터 위의 마석들과 돈주머니를 모두 넘겼다.
프리는 영혼까지 털린 허탈한 표정이었다.
하긴 단번에 중급 마석과 노예처럼 부릴 수 있던 쓸 만한 인원 2명이 날아가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냥 가져가십시오. 거래는 이걸로 끝입니다.”
“잠깐. 누구 마음대로 거래를 끝내는 거지?”
“예?”
“아까 네가 뭐랬지? 내가 물건을 넘겼을 때 그에 해당하는 가치의 물건을 거래로 넘긴다고 했었을 텐데. 아다만임 검의 가치가 여기 있는 물건만으로 지불 가능하던가?”
“으으,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새장 속에 있는 불의 정령, 샐러만더는요?”
“네 머리 위의 마나가 여전히 뭉쳐 있는 걸 보니 검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군.”
“이건 금고 속에 숨겨둔 비장의 물품입니다! 누구도 한눈에 반하는 초강력 마법 미약…”
“그런 건 버려라.”
“에에잇! 그러면 이걸로 말씀드리자면…”
“귀찮군. 그냥 이 가게를 통째로 사도록 하지. 그러면 이 검과 바꿀 가치가 되는가?”
김검천의 말에도 프리 머리 위의 마나는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프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모자라는군요. 아, 전 근처 영지에도 가게가 있지요! 상인이라 길드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고요! 여기저기서 돈을 모으고 빌린다면 어쩌면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그런 금액을 모을 수 있는 건 모르겠지만 먼저 거기에 갔다가 시간 내에 다시 돌아올 수나 있나 모르겠군. 네 입으로 이 마법의 계약 기간은 하루라고 하지 않았나?”
“크헉! 확실히 오늘 안에 해결하기에는 무리구나!”
“이 마을 안에서 빌린 시간은 되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걸 보니 여기서 너한테 뭘 빌려줄 만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로군.”
“헉!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계약 양피지를 쓰는데도 사기 치는 놈을 누가 믿을까? 그러니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지.”
“크흑…”
“그러면 이야기는 끝났군. 너도 끝났고.”
“그… 그러면 이제부터는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응. 너 노예.”
“커헉! 노예라니! 잘 나가던 상인인 이 몸이 노예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