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김검천이 그런 쿠퍼를 향해 차분히 대답했다.
“코폴드를 누르라고 했었지? 손에서 힘을 빼지 마.”
“하지만 당장 지혈을 해야 할 상처입니다! 피를 너무 흘리면 죽을 수도 있어요!”
“쿠퍼,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나? 알고서 한 일이니 걱정 마라.”
“그래도…휴우,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팔까지 베어가며 코폴드에게 피를 먹이는 겁니까?”
“코폴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지.”
“사람의 피를 먹인다고 코폴드가 회복된다는 말 같은 건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건 나도 그래. 손가락 같은 걸 깨물어 그 피를 먹이면 낫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이야기에서나 봤거든.”
쿠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는데 칼로 지혈하기도 힘든 상처까지 내가며 피를 먹이신다고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가 보군. 내가 이러는 건 코폴드에게 피를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야.”
쿠퍼가 눈을 크게 뜨고 김검천의 팔을 바라보았다.
팔에서 물처럼 흐르고 있는 붉은 액체는 아무리 봐도 피가 맞았다.
쿠퍼가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했기에 김검천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게 피는 맞아. 다만 코폴드에게 먹이려는 건 피가 아니라 혈액 속에 있던 나노머신이야.”
“나노머신은 또 뭡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아까 말한 세균과 비슷한데 그게 나쁜 거라면 나노머신은 좋은 거지.”
아이를 위한 눈높이 교육을 쿠퍼에게 시전하는 김검천이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신체 능력의 향상을 도와준다는 거지. 육체에 관련된 전부를.”
나노머신의 투여는 김검천이 있는 세계에서는 기본적인 신체 능력 향상 방법이었다.
한정된 예산이니 사병용과 장교용의 나노머신이 따로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김검천에게는 당연히 장교용의 나노머신이 투여된 상태였다.
김검천의 괴물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로 파워드슈츠의 성능에 의존하고 있지만 나노머신의 힘도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쿠퍼가 궁금한지 다시 물었다.
“회복 속도라든지 힘이나 시각 등이 향상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잘 이해가 안 되면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이 팔을 봐봐. 어떻게 생각해?”
“멋지고…잘 단련된 팔입니다.”
“그걸 보라는 게 아니거든.”
김검천의 말에 쿠퍼가 다시 팔을 살펴보았다.
얼마나 힘껏 그었는지 피는 물론이고 피부 안쪽의 근육마저 보일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김검천의 팔에서부터 피가 점차 멈추는 게 보였다.
쿠퍼는 뭔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비볐다.
저렇게 근육이 보일 정도로 깊게 난 건 적어도 몇 주는 지나야 상처가 아물었다.
심지어 나이가 많다면 그만큼 회복력이 떨어지기에 상처가 몇 달을 가기도 한다.
그런데 김검천의 팔은 지금 실시간으로 상처가 아무는 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트윈헤드 트롤 같은 회복력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육체가 지니는 재생력은 아니었다.
김검천이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보는 쿠퍼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나노머신이 뭘 하는지 알 것 같나?”
“그래서 나노머신을 먹이신 거군요! 그것만 있으면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요!”
김검천의 생체 신호를 살펴보던 미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나노머신을 시술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 주사기로 피를 뽑는 건 싫거든. 의료실은 아직 개방도 되지 않았고.”
[칼로 팔을 베는 건 괜찮고요?]
“주사기보다 칼이 낫거든? 피를 채취하는 주사기는 왜 그렇게 흉악하게 생긴 거냐고.”
[보통은 칼이 주사기보다 더 무서운 도구라고 하지 않나요.]
쿠퍼가 김검천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미리내하고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너희 둘 다 미리내의 모습을 본 적은 없지?”
쿠퍼와 세이야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미리내는 이야기로만 들었지요.”
“그동안 목소리는 듣긴 했지만 미리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김검천이 웃었다.
“미리내, 모습을 보여주겠어? 잠시 정도라면 에너지 소모도 그렇게 많지 않겠지.”
[승인. 13D 홀로그램 설정 변경, 5D 홀로그램 투영.]
김검천의 옆으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의 미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와 눈에 반투명하게 빛나는 문양이 인간을 초월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미리내가 가볍게 입을 움직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함선 미르의 인공지능 전술 컴퓨터 미리내라고 합니다.]
인간을 넘어서는 외모만으로도 자신도 모르게 경외하고 싶은 마음이 든 세이야였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초월 존재가 눈앞에 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네요.”
뒤이어 쿠퍼도 입을 열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미리내가 쿠퍼에게 다가섰다.
쿠퍼는 무의식적으로 미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은 미리내를 통과해 그저 허공을 저을 뿐이었다.
원래 미리내의 홀로그램은 감촉마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현재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단순히 영상을 허공에 만들어낸 것이었고.
미리내는 곧이어 허공을 날아 김검천의 등 뒤로부터 몸을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김검천 함장님이 이미 제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직접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더 강한 거절의 말에 쿠퍼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큭, 상대가 너무 막강해 도전조차 못 하겠어!”
김검천이 그런 쿠퍼에게 대꾸했다.
“뭔가 오해하는 거 아니야? 미리내는 애초에 인간도 아니거든?”
그 말을 들은 미리내가 뭔가 불만이 있는 표정을 지은 채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
[에너지 소모로 인해 영상 투영을 종료합니다. 그리고 쿠퍼.]
“예?”
[지금부터는 코폴드를 좀 더 꽉 누르는 게 좋을 거예요.]
“코폴드를 말인가요? 억!”
쿠퍼가 갑자기 몸을 들썩거렸다.
가만히 깔려 있던 코폴드가 몸을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검천은 쿠퍼가 코폴드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자 같이 돕기로 했다.
팔에 아직 상처가 남아있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코폴드의 몸이 활처럼 굽혀지면서 털 밑에 숨겨진 혈관이 보일 정도로 두꺼워졌다.
몸이 평상시의 2배 정도로 커지고 있어서 쿠퍼가 김검천에게 소리쳤다.
“뭔가 불안한데요? 터지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입니다!”
“안 터지니 잘 잡고나 있어!”
“놓치면요?”
“그때는 진짜 터질지도 몰라!”
“헉!”
쿠퍼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필사적으로 코폴드를 눌렀다.
힘을 쓴 덕인지 코폴드의 움직임은 점차 둔해져 갔다.
커진 체격과 털 위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난 혈관도 차츰 제 모습을 찾아갔다.
코폴드는 평온하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쿠퍼가 전신에서 땀을 흘리며 김검천에게 말했다.
“이럴 거면 코폴드를 뭔가로 묶어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렇게 날뛰는 코폴드를 묶어둔다면 묶인 압력에 의해 터져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신경 쓸게 한 두 가지가 아니군요. 그러고 보니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왜 저희들에게는 김검천님의 피를 마시게 허락 안 해주셨습니까?”
김검천이 팔의 상처를 슬쩍 가리며 쿠퍼로부터 멀어졌다.
“쿠퍼, 내가 취향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졌다 생각했지만 그건 좀 그런데. 앞으로는 다가오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어느새 세이야도 쿠퍼로부터 떨어진 채로 말했다.
“쿠퍼 아저씨.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피를 마시는 걸 좋아한다니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나노머신인가 하는 그것 때문에 한 말이라고!”
“진짜로요?”
“정말이라고!”
“믿을게요. 쿠퍼 아저씨가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런데 넌 왜 아직도 거리를 두고 있는 거냐?”
“떨어져 있는 게 취향이니 존중해 주시죠.”
“세이야, 너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거지?”
김검천이 말렸다.
“둘 다 그만.”
“옙!”
“알겠습니다.”
주의를 받은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김검천이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나노머신을 안 준 이유가 궁금한가?”
“옙!”
“물론입니다.”
김검천이 코폴드를 가리켰다.
“혈액… 이 아니라 나노머신을 주지 않은 이유는 부작용이 있으니까 그런 거다.”
“부작용이라고요?”
“아까 코폴드를 봐서 모르겠나? 그런 일이 사람에게 일어난다면 어떨까 같나?”
쿠퍼가 말했다.
“그 정도 고통은 버틸 수 있습니다. 강해진다면 위험부담 같은 건 감당해야지요.”
세이야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죽을지도 모르지만 강해진다면 할 수 있습니다.”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둘 다 착각하지 마. 코폴드가 겪은 육체의 부작용 같은 건 눈에 보이는 부분에 불과하니까.”
“그거 무슨 말씀인지요?”
김검천이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몸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나노머신은 그 자체로도 무수한 인공지능의 집합체이거든.”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간단히 말하자면 몸에 문제가 있으면 나노머신이 알아서 고쳐준다는 거다.”
“그러면 좋은 일 아닙니까?”
“고치는 과정에서 사람의 머릿속에도 관여할 수 있다면 별로 좋지 않겠지.”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래. 코폴드는 방법이 없어서 그걸 감안하고도 나노머신을 투여한 거다. 복부가 세균에 감염되면 수술도 할 수 없으니 고통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었거든.”
“정신에 관련된 건 정확히 어떤 부작용입니까?”
“나에 대한 절대적 복종심을 지니게 된다고 할까나? 세뇌 같은 거지. 이 나노머신들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니까. 내 인장이 함선의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게 김검천님을 따르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지금과 별 차이 없을 거 같은데요.”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쿠퍼, 넌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겠나?”
“필요한 일이라면요.”
쿠퍼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세이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김검천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내가 기분이 나빠서 그냥 화를 내면서 죽으라고 한다면?”
“아무리 김검천님의 말이라지만 그렇게는 죽어드릴 수 없지요.”
“그게 당연한 거지. 그런데도 이 나노머신을 투여받으면 선택지가 없어. 내가 죽으라고 허면 아무 고민 없이 죽겠지.”
“그건 완전히 자기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셈 아닙니까?”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것마저도 각오할 수 있다면 내 피는 얼마든지 내주지.”
쿠퍼가 두 손을 들었다.
“졌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강해지고 싶지는 않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권하지 않던 것이야.”
김검천이 세이야를 바라보았다.
세이야가 대답했다.
“전 그런 의미에서 파워드슈츠를 다루는 데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강해질 다른 방법이 있는데 굳이 나노머신을 얻을 필요는 없는 거지.”
쿠퍼가 말했다.
“그래도 아쉽네요. 나노머신의 힘은 매력적이던데요.”
“나중에 함선의 해당 구역이 개방되면 제대로 된 나노머신을 투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보다 다음 구역을 위해 차단문부터 가보도록 한다.”
김검천의 손에는 푸른 마나가 꿈틀거리는 중급 마석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