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왕왕!”
갑자기 들린 소리에 김검천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그곳에는 너구리나 여우, 혹은 개같이도 보이는 손바닥만 한 동물이 한 마리 있었다.
쿠퍼가 말했다.
“갑자기 저런 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테고. 설마 저게 코폴드인가?”
김검천이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괴물에게 사용하면 이런 식의 부작용도 있던 건가.”
[다음번을 위해 해당 시술에 대한 결과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 두겠습니다.]
“다음번이 없는 게 가장 나은 거 같아.”
세이야가 활짝 웃었다.
“뭔가 귀엽네요. 깨어나면 리에가 좋아할 거 같아요! 이제 전 자유인가요?”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넌 자유의 몸이 아니야.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어째서요!”
“리에에게 물어봐.”
쿠퍼가 해맑게 웃었다.
“하하! 그렇고말고! 세이야, 너한테는 이미 선택권이라는 게 없다니까?”
“쿠퍼 아저씨!”
김검천은 못 말리는 둘을 무시하고 코폴드에게 다가가 앉았다.
강아지 크기가 된 코폴드가 꼬무락거리며 천천히 기어 김검천의 발밑으로 다가왔다.
그걸 본 세이야가 김검천에게 말했다.
“마치 부모를 찾아가는 아기 같은 모습이네요.”
“괴물이라서 그런지 그런 쪽의 본능도 발달한 모양이야.”
“이제 리에 말고도 코폴드까지 저희가 지켜야 할 보호 대상으로 들어가게 된 건가요?”
“모를 일이지. 잘 먹고 잘 자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일단 코폴드도 맡아 줬으면 해.”
“김검천님을 잘 따르는 모양인데 굳이 제가 맡을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난 당장 할 일이 있으니까.”
김검천이 세이야에게 코폴드를 넘겨준 후 다음 차단문 앞에 섰다.
더 중요한 구역으로 들어가는 차단문답게 더 강하고 단단하게 설계된 문이었다.
그 옆에도 문 같은 게 있었는데 그건 내부에서 위급한 때를 대비한 비상 탈출구였다.
물론 그것도 앞에 있는 차단문만큼이나 열기 힘들었다.
탈출구 벽 옆에는 김검천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원래 벽에 나 있는 구멍은 아니고 추락했을 때 충격으로 인한 파손인 것 같았다.
“미리내, 시작하자. 그런데 이대로 바로 진행해도 되려나 모르겠군.”
자유의 마을에서 돌아오면서 예전처럼 파워드슈츠에 중급 마석을 연결하는 실험을 해보았다.
하급 마석과는 달리 중급 마석에서 발생하는 반발력이 예상외로 컸었다.
[오면서 중급 마석에 대해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 부분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무리는 하지 마. 안 되는 걸 하라는 건 아니거든. 무엇보다 파워드슈츠는 마석이라는 에너지원을 쓰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그걸 되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이지요. 인공지능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알겠어. 그러면 일단 해보자고.”
- 위이잉. 철컥. 파칙.
파워드슈츠가 은은하게 빛나는 걸 보니 접속 회로와 중급 마석이 연결된 모양이었다.
김검천은 하급 마석 때와는 다르게 불안하게 불똥이 튀는 연결 부위가 신경 쓰였다.
그래도 지금은 미리내와 파워드슈츠를 믿어야 할 순간이었다.
김검천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문 밑에 밀어 넣으며 기합을 질렀다.
“하압!”
- 끼끽.
김검천의 손가락과 문이 마찰하며 금속음이 발생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려고 하기에 김검천은 더욱 힘껏 당겼다.
- 푸식.
파워드슈츠에서 매캐한 회색 연기와 함께 에너지 잔량이 급속도로 줄어갔다.
“음?”
[죄송합니다. 김검천 함장님. 계산 오류로 인한 문제로 인해 장비를 중지합니다.]
“무슨 문제지?”
[현재 파워드슈츠로는 중급 마석으로 증폭된 힘을 견딜 수 없습니다.]
“지금 구할 수 있는 장비로는 문을 열 정도의 출력을 못 따라주는 건가?”
[말씀대로입니다. 파워드슈츠 장비의 조정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는 알겠어. 하지만 구할 수 있는 파워드슈츠 종류는 이게 전부야. 이미 확인했잖아.”
김검천을 비롯한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그런 침묵이 싫은지 코폴드가 짖었다.
“멍멍!”
세이야가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당황했다.
“헉, 코폴드가 언제 저곳으로 내려갔지?”
코폴드는 벽에 나 있는 손바닥만 한 구멍 앞에 서 있었다.
“왕!”
한번 짧게 짖은 코폴드는 바로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어림도 없는 크기였지만 손바닥만 한 코폴드는 가능했다.
사람들이 구멍을 쳐다보고 있는데 근처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 푸시.
코폴드가 안에서 뭘 눌렀는지 모르겠지만 벽에 있던 환기구 같은 문이 열렸다.
마치 김검천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미리내가 열린 문 함선 지도를 검색해보더니 말했다.
[이건 비상용 탈출용 문입니다. 위관급 장교용 숙소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숙소로? 그러고 보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장교용 무기고와 숙소는 분리되어 있었지.”
[함선 반란으로 무기를 탈취당해 승무원들이 학살당하는 일을 막게 설계되어 있었지요.]
“장교용 파워드슈츠는 무기고에 있지만. 일단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비상문을 통해 숙소로 들어선 김검천을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코폴드였다.
김검천은 코폴드의 머리를 살살 만져주었다.
“잘했다. 코폴드.”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게 기분 좋은지 코폴드가 꼬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김검천은 품속에서 육포를 꺼내 들었다.
“잘한 행동을 하면 습관이 되도록 바로 포상을 줘야 하는 법이지. 맛있게 먹어라.”
“낑낑.”
코폴드가 자신만 한 육포에 달려들어 기분 좋게 먹었다.
김검천은 자신이 들어선 위관급 장교의 숙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위관급 장교의 방이긴 했지만 여럿이 방을 쓰는 병사용 숙소와는 달랐다.
그렇게 큰 방은 아니었지만 혼자서 방을 쓸 수 있었으니까.
김검천은 그렇게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물건 하나를 보았다.
“이건 그때 기술 장교가 이동용 도구로 쓰던 작은 원반이잖아? 반가운걸.”
김검천은 이동용 원반의 버튼을 눌러보았다.
- 부웅.
이동용 원반은 전원이 들어오자 가볍게 몸을 떨었다.
김검천은 동작이 되는 걸 확인하자 바로 전원을 껐다.
뭐든지 동작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에너지는 소모될 수밖에 없었으니 절약을 위해서였다.
김검천은 그 원반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이미 죽어 사라졌는데 물건만큼은 이렇게 남았군.”
세이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검천님. 그건 뭔가요? 처음 보는 건데요.”
“이거 말이야? 마침 잘 되었네.”
김검천은 세이야에게 넘겨주었다.
들고 다닐 정도로 가볍고 최고 시속 100킬로까지 나오는 녀석이었다.
아직 무력이 부족한 세이야에게는 이동이나 도주용으로도 적합한 물건으로 보였다.
“이동할 때 쓰는 장비다. 그동안 걸어서 이동한다고 힘들었을 거야.”
“와! 고생한 거 아시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받아도 되나요? 귀중한 것 같은데.”
“괜찮아. 넌 이걸 받을 자격이 있어. 작동법은 나중에 익히면 될 테고.”
쿠퍼와 세이야는 리에를 돌봐야 했기에 김검천은 혼자 돌아다니며 새로운 물품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숙소와 위관급 장교용 무기고는 차단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장교용 파워드슈츠 획득은 조금 미뤄야 할 거 같았다.
그래도 이동용 원반 말고도 새로 획득한 물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방을 돌아다니다 보니 지금 입고 있는 파워드슈츠에 부착 가능한 외장용 장비를 발견한 것이다.
외장용 장비는 로봇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착용자에게 장비를 자동으로 입혀주는 장치 같은데 거기까지는 동작하지 않았다.
김검천이 미리내에게 물었다.
“이거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인가?”
[여기저기 미완성인 부분이 있지만요. 개인적으로 실험을 하던 장비인 모양입니다.]
“10미터가 넘는 배틀 머신을 소형화하려고 나름대로 시도한 모양인데. 동작은 되나?”
[로봇 팔의 손 부분만 조종 가능합니다. 장비를 파워드슈츠에 붙이는 정도는 됩니다.]
“미리내. 이걸 장착하면 방어력 상승률은?”
[착용 중인 파워드슈츠 장갑과 비교해 볼 때 약 20%가 추가로 증가합니다.]
“속도는?”
[중량 증가로 인해 30%가량 기동력이 상실됩니다.]
“회피기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장착하기가 애매한 장비군.”
[김검천 함장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김검천이 착용 중인 파워드슈츠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외장형 장비를 살피며 대답했다.
“방어도 중요하고 회피도 중요해. 다만 개인적으로는 공격력이 높았으면 하거든.”
[이 외장형 장비는 덩치가 큰 만큼 새로운 무기 사용과 탄약 공급이 더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장착해보도록 하지.”
[장갑에 의한 방어력보다 회피율이 떨어져 실제 방어는 오히려 불리한 점이 있습니다.]
“난 아무런 피해도 없이 적과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없어. 맞게 된다면 피해 본 것의 몇 배로 돌려줄 수 있다면 괜찮다고.”
[말씀을 들으니 결정을 내리신 것 같네요. 다만 이 로봇팔로는 미세한 조종이 힘듭니다.]
“섬세한 연결이 불가능하니 장착 시 파워드슈츠 장비에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러는 거군.”
[평상시면 몰라도 전투 시 과격하게 움직이면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쿠퍼와 세이야에게 장착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되겠군.”
힘쓰는 일은 쿠퍼에게, 힘 조절이 필요한 세심한 곳은 세이야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미리내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거기다 이곳을 살펴본 결과 추가된 정보가 더 있습니다.]
“뭐지?”
[이 구역에서 함선 외벽 기능의 일부를 가동시킬 수 있는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말이야? 여기에 왜 그런 게?”
[원래는 귀빈을 위한 의전 행사 등에 사용되는 기능 같습니다. 광학 미채 기능 말입니다.]
“그거 색을 조정해 외벽을 투명하게 만든다든지 빛을 투과해 주변 사물과 동화시키는 거잖아.”
[그렇기에 전투 목적 외에도 행사용으로 쓰이기도 하지요.]
“별 것 아닌 기능이라고 해도 그런 걸 여기서 조정 가능할 수 있다고?”
[예전 함장님에게 보고가 올라갔는데 그냥 넘어가라고 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알면서도 넘어가 주신 건가. 하긴 긴 여행이 될 테니 너무 규칙에 얽매이면 사람들이 못 견딜 테니까 감안하신 거 같군.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지만. 에너지는? 함선 크기가 있잖아.”
[부전원실의 에너지가 좀 빨리 소모되는 정도입니다. 당분간 마석으로 대처 가능합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승인한다.”
[접속 가능. 외벽을 어떻게 할까요?]
“광학 미채 발동. 스텔스 모드로 이행한다. 은신을 시작해.”
[알겠습니다. 함선 미르. 스텔스 모드 기동.]
- 우우웅.
스텔스 모드가 발동한 함선 미르가 세상에서 점차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텅 빈 분화구 하나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누가 분화구 근처에서 본다고 해서 함선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일단 함선에 대한 보호조치를 끝낸 김검천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쿠퍼가 그런 김검천에게 다가갔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아까 차단문을 열 때 생긴 문제에 대해서요.”
“뭐지?”
“그건 혹시 마석의 에너지가 파워드슈츠와 제대로 연동 안 되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잘도 알아보았군. 어떻게 알았지?”
“마갑도 마석 때문에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그 해결책이 바로 여기에 있고요.”
쿠퍼가 내민 건 비즈릴로 만들어진 금속 갑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