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김검천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걸 알려면 먼저 마을에 들어가 봐야겠지?”
세이야가 봉쇄된 마을 입구를 보며 곤란한 듯 물었다.
“입구가 저렇게 되었는데 어떻게요?”
“꼭 입구로 들어가라는 법은 없잖아. 어찌 되든 간에 마을 안에만 들어가면 그만이지.”
세이야가 마을을 둘러싼 4미터는 넘을 듯한 높이의 나무 벽을 올려다보았다.
수직으로 서 있는 벽은 세이야에게 있어 절벽과 다름없었다.
“저 높이를 원반까지 지고 오르기에는 힘들 거 같은데요.”
“원반을 들 필요는 없지. 네가 원반을 타고 저기까지 오르면 되니까.”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지면에서 살짝 뜬 채 빠른 이동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요.”
“저 정도 높이라면 뜨는 게 가능해. 높이 뜬 채 빠르게 이동하는 건 무리겠지만.”
김검천과 세이야는 프리의 가게가 있는 벽 쪽으로 이동했다.
그쪽이 사람이 없다는 걸 저번에 마을을 방문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김검천이 세이야에게 이동용 원반 조작 방법을 알려준 후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프리의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만 구하고 다시 나오도록 하지.”
“예. 그런데 김검천님은 어떻게 올라가시려고요?”
“이렇게.”
평소라면 충분히 뛰어오를 만한 높이라 김검천은 제자리에서 힘껏 뛰어올랐다.
파워드슈츠에 외장형 장비까지 달아 절반 정도의 중량이 증가한 상태로는 힘든 모양이었다.
떨어지려고 하자 김검천이 다리를 살짝 밀었다.
“공기 분사.”
- 슉.
압축공기의 도움으로 김검천은 곧바로 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김검천이 소리가 안 나도록 지면에 착지할 수 있는 것도 공기 분사의 힘이었고.
그 뒤를 이어 세이야도 이동형 원반을 가지고 벽에서 뛰어내렸다.
- 탁.
세이야가 가볍게 착지한 걸 보며 김검천이 말했다.
“보통이 아닌데? 그 높이에서 뛰어내렸는데 이렇게 편하게 착지한 걸 보면.”
세이야가 우쭐거렸다.
“뭘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세이야도 단련한다면 쿠퍼 못지않은 신체를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검천과 세이야는 프리가 있는 가게를 향해 이동했다.
안 그래도 외진 곳이었는데 마을을 봉쇄해서 그런지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야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마을이 봉쇄되었는데도 가게를 연 곳이 있을까요?”
“괜찮아. 가게를 연 곳이 없으면 프리의 가게부터 털자.”
“…예? 털자?”
“어차피 아다만임 검 가격을 모두 지불하기 전까지 프리 것은 내 꺼, 내 것은 내거니까.”
“갑자기 프리가 불쌍해지는데요.”
“이마에 뜨거운 걸로 불꽃놀이 안 해주는 것만 해도 프리에게 잘 해주는 거라고.”
김검천이 프리의 가게에 도착하니 가게 문은 닫혀 있었다.
세이야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문이 잠겨 있는데요.”
“문이 닫혀 있을 때는 문을 두드려야지.”
김검천은 문틈을 노려 그대로 손을 찔러 넣었다.
- 파삭.
뭔가 부서지는 가벼운 소음과 함께 함께 문이 열렸다.
“뭔가 부서진 거 같은데요. 열리긴 했지만요.”
“중요한 건 문이 열렸다는 거지.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말자고.”
김검천이 먼저 들어서자 세이야가 문을 닫고 나서 따라갔다.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자 프리가 카운터 안에서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보였다.
몸을 숙이고 있으면 안 보이기라도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프리.”
“히이익! 뭐든 가져가십시오! 제발! 그걸로 끝내달라고요!”
단순히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저런 태도라니 겁에 질린 게 확실했다.
김검천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문 하나 연 것 가지고 왜 그렇게 겁을 먹은 건지 모르겠군. 거기다 네 물건은 내 꺼라는 걸 명심해 주었으면 하는데.”
“이 목소리는… 설마 김검천님이십니까?”
프리가 얼굴을 들어 김검천을 확인하더니 바람처럼 달려와 무릎을 붙잡고 애원했다.
“절 도와주러 오셨군요!”
“아니, 물건 사러 왔는데.”
“아무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김검천이 그런 프리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었다.
“프리.”
“예! 김검천님! 제 인생의 빛이시여!”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그런 의미에서 널 구한 것도 네 빚으로 달아두도록 하마.”
“하하하, 전 빚이 늘어나서 행복합니다아…”
“당장 받을 건 아니니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해주었으면 하는군. 그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김검천은 프리가 자신을 보고 기뻐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프리는 김검천에 의해 반쯤은 노예 같은 처지가 되었다.
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린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프리는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좋아할 때는 언제고 다시 울상이 되었다.
잠시 후 프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영주가 미쳤습니다!”
“자세히 말해봐라.”
“원래는 비밀이니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지만…”
“그래? 잘 있어라. 만나서 반가웠고 언젠가 또 볼 날이 있겠지.”
프리가 김검천의 다리를 힘껏 붙잡았다.
“절 두고 어디를 가신다는 겁니까?”
“놔라. 파워드슈츠에 손때 묻는다.”
“제발 말하게 해주십시오! 이 마을이 성립할 수 있던 이유는 근처 영지의 영주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예전 영주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이긴 하지만요. 덕분에 사람들이 살기 더 힘들어졌지요.”
“그러고 보니 검은 갑옷의 녀석도 영주의 부하라고 했었지. 제대로 된 영주는 아닌 것 같군. 계속 말해봐라.”
“네. 원래 마을이 이렇게 봉쇄되는 건 인간 사냥꾼들을 위한 축제가 벌이기 때문입니다.”
“세이야가 혹시 모르니 마을 봉쇄가 풀리면 가자고 할 정도이긴 했는데.”
“그 말대로 안 하시길 잘하셨습니다. 그랬다면 오셨을 때 제가 죽어 있는 모습이나 보셨을 겁니다.”
“여기 온 인간 사냥꾼들이 사람들을 죽이기라도 한 건가?”
“그들이 반항하는 자들을 죽이는 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원래는 이게 아닌데…”
프리가 말끝을 흐리는데 세이야가 입을 열었다.
“인간 사냥꾼들이 마을의 규칙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여요? 마을에서 대처를 안 하던가요?”
프리가 힘없이 대답했다.
“이 마을의 배후에 있는 건 영주야. 그리고 인간 사냥꾼들은 그 영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더구나. 규칙을 만든 힘 있는 자가 스스로 규칙을 어기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다는 거지?”
김검천이 말했다.
“그런 규칙이라도 따르려다 반항한 자들이 죽었다는 말이겠군.”
“사실 저희들도 그런 규칙 따위는 별 의미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는 사람이 나오는 걸 직접 목격하자 대부분 빠르게 저항을 포기했지요.”
“반항하는 몇 명을 일부러 죽여 저항할 의지를 꺾으려고 든 모양이로군.”
이런 마을에 모인 사람들이니 빠른 포기도 이해가 되었다.
김검천의 말을 긍정하듯이 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항을 포기한 자들은 물건처럼 데려가긴 했지만요.”
“인간 사냥꾼들의 그런 행동이 평상시에 하던 일은 아니었던 것 같군. 그러면 마을에 사람이 남아있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원래는 목걸이를 찬 사람만 데려가는 게 인간 사냥꾼들이 봉쇄된 마을에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프리가 김검천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김검천이 차갑게 말했다.
“그동안 너희들은 그 와중에도 물건을 팔아 돈을 벌었나 보군. 인간 사냥꾼들이 목걸이를 찬 사람들을 사냥하는 걸 알면서도.”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원래 이런지라…”
“그 문제는 나중에 말하도록 하지. 이야기나 계속하도록.”
“알겠습니다. 전 어차피 물건을 팔아도 김검천님 손에서 못 벗어날 거 같으니까 인간 사냥꾼들이 와도 가게 문을 열 의욕이 안 나더라고요.”
“가게 문을 닫고 있었기에 인간 사냥꾼들이 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갔던 건가. 내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는 거군.”
“그 말씀 대로입니다. 어제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못 먹고 숨어 있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결국 죽은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는 두려워서 어제부터 계속 숨어 있었으니까요. 데려간 사람들의 일부는 마을에 남겨 둔 모양이지만요.”
“그건 어떻게 알지?”
프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젯밤부터 계속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거든요. 적어도 수십 명은 죽었을 겁니다.”
“마을 안에서는 사람들이 어디로 끌려갔을 것 같나?”
“여기를 벗어나 마을 중앙으로 가다 보면 제법 넓은 공터가 하나 나옵니다. 사람들이 거기로 끌려갔을 겁니다.”
“그 말은 인간 사냥꾼들도 그곳에 모여 있다는 거겠군. 어쩌면 영주도 거기에 있을지도.”
세이야가 김검천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세이야, 넌 쿠퍼에게 넘겨줄 물건을 챙긴 다음 프리와 함께 이곳을 먼저 빠져나가라.”
세이야에게 말했는데 오히려 프리가 울상이 된 채 김검천에게 물었다.
“마을이 봉쇄되었는데 무슨 수로 빠져나가란 말입니까? 벽도 높아서 저한테는 무리입니다.”
“네 운동신경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마을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부터 생각하는 게 좋겠군. 너의 탈출은 세이야가 도와줄 거다.”
세이야가 끼고 있던 이동용 원반을 흔들어 보았다.
“이걸 사용하면 나가는 건 가능하겠네요. 그런데 김검천님은요?”
“마을에서 축제를 한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원래 축제는 즐겨야 하는 제맛이거든.”
“이런 걸 축제라도 부를 수가 있을까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려고 말이야. 아마 녀석들은 절대로 잊지 못하는 날이 될 거다.”
김검천은 그 말을 끝으로 가게를 나서다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세이야와 프리가 짐을 챙긴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좀 시끄럽긴 했지만 김검천이 앞으로 벌일 소동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이야는 이동용 원반이 있으니 싸우지는 못해도 도주하는 건 문제가 없을 것이고.
김검천은 텅 빈 마을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 삐걱.
마을 지면에 깔려있는 나무 바닥이 김검천의 무게에 못 이겨 소리를 냈다.
100킬로에 달하는 몸무게였는데 지금은 외장형 장비를 장착해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던 나무 바닥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문득 생각이 든 김검천은 미리내에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지금 내 시야 안에 있는 것들 중 수상한 게 있나 확인해 줘.”
[스캔 완료. 근방을 확인한 바로는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내가 민감한 건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가끔 김검천 함장님의 느낌이 제 예측을 벗어나는 건 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보통은 네 예상 범위 안에서 움직이지만. 이세계에 오기 전 이런 감각은 못 느꼈으니 어쩌면 웜홀에서의 일이 아직도 안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이 이렇게 기억하는 중이니까.”
[혹시 이곳에서 웜홀을 통과할 때 관련된 존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런 이상한 곳에서 그런 수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별난 건 아니겠지.”
[그때를 위해서라도 미리 대비는 해둬야겠군요.]
“만약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우리를 이렇게 만든 녀석에게 받은 만큼은 돌려주고 가고 싶어. 그러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강해져야겠지.”
[제가 곁에 있습니다. 김검천 함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실 겁니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놈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저기라고 알려주는 소리 같군.”
비명 소리가 울린 곳으로 뛰어간 김검천이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는 인간 사냥꾼들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으하하! 또 죽었어!”
“아쉽네. 이제 우리들에게 할당된 인간들은 이걸로 끝이거든.”
“그런데 넌 섬뜩하지 않냐? 저렇게 피가 뿜어져 나오는데 금방 사라지잖아.”
“알 게 뭐야! 이 축제가 끝나는 게 아쉬울 뿐이라고!”
김검천은 표정을 굳힌 채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광장 끝쪽에서 형식적으로 경계를 서던 인간 사냥꾼들이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웬 놈이냐?”
“놈이라니. 이런 분이시거든.”
김검천이 옆에 있는 나무 건물의 벽을 주먹으로 뜯은 후 손가락으로 튕겼다.
저런 녀석들에게는 총탄도 아까웠다.
- 퍼퍽.
“악!”
소리친 인간 사냥꾼들의 머리가 깨지면서 붉은 피가 허공에 날렸다.
인간 사냥꾼의 비명 소리에 광장에 모여 있던 자들의 시선이 김검천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