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헉! 영주님이 멀쩡하시네?”
“저런 공격에 맨몸으로 맞았는데도 살아 있다고?”
“…이상해. 저 영주가 과연 인간인 건가?”
사람들의 시선이 영주에 쏠려있는 틈을 타 주술사는 자리를 떠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아무튼 위험한 자리는 피하고 보는 게 오래 사는 데 좋아 보였다.
설마 영주가 이기더라도 나중에 벌을 받으면 그만이었고.
그렇게 자리를 떠난 주술사의 행동은 현명했다.
호위 기사가 영주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별생각 없이 반갑게 소리쳤다.
영주가 살아 있으니 일단 자기 자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영주님? 그런 공격을 맞고도 무사하셨군요! 다행한 일입니다!”
영주가 호위 기사를 힐끗 보고 손을 흔들었다.
“기사란 것이 아무 쓸모도 없는 데다가 시끄럽기까지 하다니. 너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다.”
- 파삭.
뭔가 스쳐 지나간다 싶더니 호위 기사의 머리가 박살 났다.
죽기 전까지 호위 기사 자리는 보장되었지만 대신 목숨이 날아간 셈이었다.
기사는 머리를 잃었어도 자신이 죽은 건 아직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피가 뿜어져 몸을 적실 쯤에나 그의 몸도 나무 바닥에 쓰러졌으니까.
그 모습을 본 인간 사냥꾼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까지 남의 고통은 그들의 행복이었다.
하지만 같은 편인 호위 기사가 죽으니 마침내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영주가 자신의 호위 기사를 죽였어?”
“아니, 영주? 영주 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우리 같은 인간 사냥꾼들보다 호위 기사 쪽이 훨씬 귀한 몸 아니냐?”
“그 말은 호위 기사도 죽였는데…”
“소모품처럼 다뤄지던 우리라고 다를까?”
그나마 눈치 빠른 자들은 광장 밖으로 도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때는 늦었지만.
도망가려면 주술사처럼 일이 벌어지기 전에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 사냥꾼들의 비명 소리에 영주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손을 흔들었다.
“하찮은 것들은 학습 능력도 없는 건가? 벌레들은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게 아니다!”
- 휘익.
뭔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광장 밖으로 도망가려던 인간 사냥꾼이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건물 사이로 빠져나가던 호위 기사가 어깨부터 갈라진 채 하늘을 날았다.
가게 바닥으로 기어들어 가 숨으려고 들던 인간 사냥꾼의 하반신이 잘려나갔다.
영주의 공격을 운 좋게도 피하거나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이라도 봉쇄되어 있는 마을 입구를 보며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중에서 실력과 용기가 있는 편인 인간 사냥꾼 한 명이 외쳤다.
“다 함께 입구에 있는 장애물들을 치우자! 그리고 도망가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인간 사냥꾼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입 부위가 날아갔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인간 사냥꾼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영주를 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저마다 외쳤다.
“젠장! 영주는 저렇게 멀리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한 거야!”
“이러다 다 죽겠어!”
“밀지 마! 입구에 있는 장애물을 아직 안 치웠다고! 깔려 죽겠어! 밀지 말라고! 으아악!”
입구 앞쪽에 서 있는 인간 사냥꾼들은 뒤에서 미는 사람들의 압력에 의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입구 뒤에 서 있는 인간 사냥꾼보다는 나았다.
그들부터 영주에 의해 죽는 중이었으니까.
입구를 피해 도망간 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자신 키보다 몇 배나 되는 나무 벽에 막혀 그들도 도망갈 수 없었다.
결국 인간 사냥꾼들은 영주에 의해 눈에 보이는 대로 죽어 나갔다.
김검천은 그제야 영주가 어떻게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죽음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건 사람 팔만한 두께의 촉수였다.
마을의 나무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살덩이 같은 촉수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던 것이다.
마을 곳곳에 숨겨져 있었는지 어디로 향하든 촉수가 사람들을 튀어나왔다.
영주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 때마다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갔고.
촉수가 관통한 사람들은 몸이 수축해지는가 싶더니 타고 남은 재처럼 부스러져 사라져갔다.
촉수에 의해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흡수당한 것이다.
혈액과 체액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촉수가 사람들을 처리하는 걸 보면서 영주가 흡족한 듯이 웃었다.
“큭큭. 이제야 속이 시원해지는군. 역시 즐겨야 할 때는 확실히 즐겨야 한다니까. 이번 달 보내야 할 인간들의 숫자를 맞추어야 해서 제대로 못 놀아서 짜증이 난 참이었는데.”
김검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반파된 건물들과 영주, 그리고 그가 불러낸 촉수밖에 없었다.
김검천이 미리내를 불렀다.
“미리내, 저 촉수가 마을 밑바닥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아닙니다. 저런 게 있었다는 걸 파악했다면 먼저 김검천 함장님에게 말씀드렸을 겁니다.]
“나도 눈치를 못 챘어. 촉수가 바닥에서 솟아오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단 말이지.”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 바닥이 부서진 후에야 촉수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가?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바닥을 한번 확인해 줘.”
김검천은 자신이 밟고 있는 나무 바닥을 발로 문질러 보았다.
사람의 피를 흡수하는 나무 바닥이었다.
느껴지는 감촉이 어딘지 익숙했다.
미리내가 대답했다.
[확인 결과 이 나무 바닥은 플랜트의 껍질과 99% 이상 일치합니다.]
김검천은 미리내의 대답에 쿠퍼와 잡은 플랜트라는 괴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괴물의 껍질, 마나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었지.”
[검은 갑옷 기사와 싸울 때가 기억나십니까? 마나를 이용해 기척을 지우던 상대 말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놈이 다가오는 걸 알아채지 못했지.”
[마나를 이용해서 뿐만 아니라 차단해서도 기척을 없앨 수 있군요.]
“그래서 마을 바닥을 나무로 깔아둔 거였어. 청소를 쉽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했군.”
[이걸로 보아 여기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마나를 지닌 걸로 보입니다. 가설이지만요.]
“가설이라지만 앞으로 학계의 정설이 될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피가 왜 안 보이나 했더니 바닥에 깔린 괴물 껍질이 먹어치운 모양이야. 클린 마법으로 처리했던 게 아니었어.”
[사람이 곤충이라면 마을은 곤충을 유혹해 먹어치우는 식충 식물 같은 장소였군요.]
세이야와 프리를 먼저 마을 밖으로 보낸 건 잘한 일 같았다.
김검천이 주변의 촉수를 움직여 자신을 공격하려 드는 영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할 말이 있다.”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건가? 한번 울부짖어 보거라.”
“그건 할 줄 모르는데? 검은 갑옷 기사를 보낸 게 네 녀석이 맞는지만 말해.”
영주가 뭔가 알아챈 표정을 지었다.
“크하하! 그러고 보니 김검천이라는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니 주술사 놈이 말했었지. 너 같은 녀석이 왜 이런 곳에 나타나 시비를 거는가 싶었더니 그 대장장이 일행이었군.”
[정확히는 쿠퍼가 김검천 함장님 일행인데 말입니다.]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녀석의 우선순위가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하나도 없으니 상관없어.”
영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했나?”
“별거 아니야. 네 장례식 날짜가 오늘인가 싶어서 확인 중이었지.”
“김검천이라고 했나? 조용히 있었으면 쿠퍼를 잡고 난 다음에 그냥 넘어갔을 텐데.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잔인하게 죽고 싶은 게 네 소원이로구나.”
“내 소원에는 신경 끄고 사람들을 이렇게 만드는 이유가 뭔지나 말해보라고.”
묘한 표정을 지은 영주가 촉수를 멈춘 채 김검천을 살펴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별난 걸 보는 모습이었다.
“네 녀석, 이런 무서운 광경을 보면서도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평범한 인간이라면 정신이 나가 미쳐 날뛰고 있어도 이상한 게 아닌데.”
“평범하게 살아온 인간이라면 말이겠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김검천은 대답 대신 그저 영주를 쳐다보았다.
영주가 우습다는 듯이 김검천의 눈을 마주 보더니 흠칫했다.
쳐다보고 있자니 뭔가 알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가 김검천으로부터 느껴져서였다.
눈은 마음을 보는 창이라고 했다.
영주는 김검천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본 것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은 영주가 신음을 흘렸다.
“크흑, 뭐지? 이 느낌은…”
김검천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절망을 겪어 왔는지 영주 따위가 알 리 없었다.
김검천의 정신력이 함선 내에서 어떤 식으로 단련되어 왔는지도.
악의와 사악한 기운으로 뭉쳐진 영주였기에 더욱 민감히 느낀 것이다.
김검천은 영주가 이상한 모습을 보였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적이 어떤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자신의 능력과 기준에 맞춰 상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김검천은 영주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 느낌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야. 집어치우고 지금까지 해 왔던 이야기나 해봐라.”
“크큿. 알게 뭐냐. 이 몸도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었는데.”
“영주가 명령을?”
“영주라고 해도 다 같은 영주가 아니지. 귀족이라고 해도 똑같은 귀족이 아니고.”
“하긴 네 녀석은 전대 영주가 쫓겨난 덕분에 영주가 되었다고 했던가.”
“그렇기에 영주라는 자리에 올랐는데도 다른 영주나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일상이더군. 그때 그분이 손을 내미셨다. 새로운 몸과 함께 말이다. 그 덕에 삶이 즐거워지더군.”
“네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구길래?”
영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다.
원래라면 그건 그가 죽을 때까지 숨겨둬야 할 비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였다.
“왕국 재상 테우펠 공작님이시다. 얼마 전 후작에서 공작으로 작위가 오르셨더군.”
“사람들을 어디로 보냈는가 싶었는데 그자에게 보낸 건가?”
“그건 모른다. 테우펠 공작님께서 명령하시면 따르면 그만이니까.”
“그자가 인간 사냥꾼들에게 직접 명령하지는 않고?”
“이 몸만 해도 그런 벌레 같은 것들과 이야기하기 싫은데 하물며 공작님께서 직접 그러실 리가.”
“대충 상황은 알겠군. 하지만 그 정도 권력자라면 말만 하면 언제든 사람 정도는 구할 수 있을 텐데. 단순한 노동력이 필요해서 사람을 모으는 건 아닌가 보군.”
“거기까지는 본인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쓸 곳이 많지.”
“쓸 곳?”
“인간을 재료로 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단 말이지. 이 몸도 그렇고.”
영주의 몸짓에 따라 촉수가 꿈틀거렸다.
붉은색을 머금은 살덩어리 촉수의 움직임은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김검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인간을 넘어섰다고 잘난 척하는 괴물 중 하나냐?”
“이 몸은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챈 것이냐?”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내가 힘껏 쳤는데도 멀쩡한 네가 인간이겠냐? 보통 사람이라면 몸 어딘가 구멍이 날 정도의 힘이었다고.”
“이런.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연기라도 해야 했던 건가…”
“그게 아니더라도 네가 부리던 검은 갑옷의 기사의 몸으로 확인도 했거든. 그런 부하를 거느리는 너도 평범한 녀석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
“그래서 이 몸을 본 소감은 어떤가?”
“너 같은 녀석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 미리내.”
[장착 중인 외장형 장비 기동율 80% 이상을 확인. 언제든지 전투 가능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