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단순히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검신에 서리게 된 마나가 푸른 빛을 발한 것이다.
주술사와 근위 기사가 움찔하더니 테이룬으로부터 멀어졌다.
검을 슬쩍 뽑았을 뿐인데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들고 있던 마법 도구를 주술사가 김검천 쪽을 향하자 감돌던 붉은빛이 더욱 진해졌다.
주술사가 테이룬에게 말을 걸었다.
“반응을 보아 저 녀석만 잡으면 대장장이와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테이룬이 주술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건 이쪽이 알아서 할 문제다. 여기서부터는 네 녀석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찾아올 수도 없었을 겁니다.”
“네가 아니라 그 마법 도구 덕이겠지. 그것도 이제 쓸모없어질 예정이고.”
“예?”
테이룬이 검을 뽑아 들고 주술사가 쥐고 있는 마법 도구를 향해 휘둘렀다.
- 쩌억.
마법도구가 두 조각이 났다.
그걸 들고 있던 주술사의 팔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악! 팔이! 팔이! 도대체 왜?”
주술사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테이룬을 바라보았다.
테이룬이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눈치가 그렇게 없나? 하긴 그러니 의뢰를 받아들였겠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안 그래도 너희 인간 사냥꾼들은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죽을 목숨이었다. 너로부터 영주를 포함해 다 죽었다고 들은 순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지.”
“큭,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몸은 아직 좀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텐데?”
“넌 치워야 하는 냄새나는 쓰레기를 보면 최대한 일찍 치우겠나? 아니면 벌레가 들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우겠나.”
“크큿, 그렇군. 쓰레기 같은 게 인간 사냥꾼의 인생이라는 말이군. 젠장, 이럴 거면 그 자리에서 도망이라도 치는 건데.”
“그래. 도망쳐라.”
“뭐라고?”
“원래는 죽일 생각이었지만 마법 도구도, 부하도, 힘도 없는 네가 뭔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테우펠 공작에게도 들킨 모양이니 비밀 유지할 필요도 없어졌고.”
“그러면 팔은 왜 벤 거냐! 그냥 보내줬어도 되는 것 아니냐!”
“최소한의 대가는 치러야지. 목이 아니라서 불만인 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테이룬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자 팔을 부여잡은 주술사가 숲속으로 도주하며 소리쳤다.
“두고 보자! 이 원한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근위기사가 그런 주술사의 말에 뛰쳐나가려고 했다.
“이놈이? 테이룬 경께서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그냥 이 자리에서 죽어라!”
“그만둬라. 살려준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는 놔둬야겠지.”
김검천이 테이룬에게 말을 걸었다.
“죽이려면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나을걸. 저 녀석, 의외로 끈질긴 구석이 있거든. 그러고 보니 몇 번이고 나를 적대했는데도 살아남은 녀석은 저 녀석뿐이라고.”
“저런 별 것 아닌 주술사가 마스터 나이트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건가.”
“강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건 아니거든. 어떤 수단을 써서 너에게 복수하려고 들지도 모르지.”
거기다 방금 팔을 베었으니 김검천보다 먼저 테이룬에게 복수하려고 들 지도 몰랐다.
복수에 성공할 가능성은 김검천이나 테이룬, 어느 쪽이라도 모두 없어 보였지만.
“상관없다. 저자가 아니더라도 죽이려고 드는 자는 많거든.”
“원한을 많이 샀나 보군.”
“비슷한 거지. 최강이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몇 명이나 쓰러트렸는지 셀 수도 없으니까.”
“그러면 내가 예언을 하나 하지. 더 이상 너한테 원한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것이야.”
“네가 무슨 초월적인 존재라도 되느냐? 원한을 없앤다니.”
“그게 아냐. 네가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쓰러지면 최강이라는 단어는 못 쓸 거라는 거다.”
“웃기는군.”
“나한테 얻어맞고 난 다음에도 남들 앞에서 최강의 기사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럽지 않을까?”
“하하하! 제법 유쾌한 발언이로군. 안 그래도 너에게 흥미가 있었다. 김검천.”
“난 없는데. 빨리 집에나 돌아가서 반짝이는 그 갑옷이나 손질하라고.”
“…네 녀석이 이 마갑에 대해서 뭘 알고나 있느냐? 이 갑옷에 새겨진 자부심을!”
“내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네가 적이라는 것만 알면 그만이지.”
김검천이 팔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테이룬도 조용히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분위기 파악을 못한 근위 기사가 나섰다.
“테이룬 경. 저런 녀석을 상대로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먼저 놈을 상대하지요.”
테이룬이 묘한 표정으로 근위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미 죽은 자를 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네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래 봬도 명색이 근위 기사입니다.”
“안다. 국가에서 지급한 정규 마갑을 입고 있으며 상급을 앞둔 중급 기사지. 그런데 주술사의 이야기를 못 들은 건가?”
“주술사가 말한 걸 신경 써서 들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요.”
“잘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인간 사냥꾼들의 두목은 상급 기사에 정규 마갑까지 입은 자였다. 그놈은 저 김검천이라는 자에게 당했고.”
“헉! 그 말씀은…”
“네가 패배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거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고.”
근위 기사가 방금 전과는 다른 눈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보통은 아닐 거 같아 보이던 상대였다.
이제는 자신에게 죽음을 전파하러 온 초월적 존재처럼 보였다.
그 때 그제야 분화구에서 내려온 쿠퍼가 끼어들었다.
근위 기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쿠퍼가 먼저 나선 것이다.
“저런 비실거리는 근위 기사 따위 김검천님이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김검천이 쿠퍼와 근위 기사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한 것도 있고 저 정도 상대라면 네가 이길 수 있겠지. 좋다.”
쿠퍼를 살펴보던 테이룬이 물었다.
검집으로 손이 슬쩍 다가가는 상태로.
“혹시 네가 쿠퍼라는 대장장이인가? 들은 바와 똑같이 생겼군.”
쿠퍼가 금속 해머를 치켜들었다.
“그렇다. 이 몸이 쿠퍼님이시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않는 이름이지! 이 대장장이 앞에서 저런 허약한 근위 기사 따위는 적수가 안 된다!”
테이룬이 어이없다는 듯이 근위 기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손을 쓰려는 것까지도 멈추면서까지.
“들었나?”
근위 기사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대장장이는 기사를 때려잡아야 할 수 있는 직업인가 봅니다.”
“넌 웃지 마라. 도대체 근래 근위 기사들은 얼마나 실력이 없기에 대장장이마저 우습게 본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없겠지. 그저 대장장이를 못 이기면 그 때는 각오해야 할 테지만.”
테이룬이 날카롭게 노려보자 근위 기사가 급히 검을 빼 들고 나섰다.
“네 이놈! 각오해라! 이 켈헴이 근위 기사가 가진 실력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주마.”
김검천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근위 기사의 실력이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쿠퍼도 만만치는 않을걸.”
“켈헴도 보통은 아니지.”
“혹시 지고 나서 변명을 할 거 같아서 미리 말해두지만 쿠퍼의 실력은 중급 기사 이상일걸.”
테이룬이 그 말에 쿠퍼의 손과 팔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입을 뗐다.
“켈헴. 저 말은 사실일 거다. 쿠퍼의 근육들은 무식하게 쇠를 내려쳐서 생기는 종류가 아니다. 검 같은 병장기를 제대로 다뤄야 생기는 흔적이 보인다.”
“정말입니까? 그러면 같은 수준의 기사를 상대한다는 마음으로 싸워야겠군요.”
- 슈욱.
켈헴이 바로 마나 소드를 만들어 냈다.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희미하게 마나가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상급을 앞두고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쿠퍼가 양손으로 금속 망치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마나 소드 정도로 이 금속 망치를 막을 수 있을까?”
“누가 무식하게 정면으로 그런 무기를 상대할 거 같으냐?”
켈헴이 마나가 서린 검을 하단으로 옮겼다.
쿠퍼가 금속 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자세와는 정반대였다.
쿠퍼가 일격에 승부를 내려는 모습이니 켈헴은 그 공격을 이용해 반격에 나설 작정인 것이다.
그것은 쿠퍼가 단순히 힘으로만 싸우는 타입이라고 생각한 켈헴의 실수였다.
쿠퍼가 즐겨하는 공격 방법 중에는 무기 투척도 있는 것이었다.
“괜히 무기를 2개 들고 다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들고 있던 머리통만 한 금속 망치가 하늘을 날았다.
켈헴은 쿠퍼가 내려찍는 망치보다는 더 빨리 반격할 자신은 있었다.
다만 날아드는 망치에 무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켈헴은 어쩔 수 없이 반격 자세를 풀 수밖에 없었다.
망치를 겨우 피해낸 켈헴이 이를 갈며 외쳤다.
“비겁하다! 싸우는 데 자신의 무기를 던지다니!”
“대장장이가 무기를 던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이거나 먹어라!”
쿠퍼는 금속 망치를 힘껏 내려찍었다.
켈헴을 향한 금속 망치에 언뜻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이 보였다.
자세가 흐트러지자 회피가 불가능해진 켈헴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만든 마나 소드를 추켜올렸다.
- 쾅! 쨍그랑.
망치와 검이 부딪혔는데 폭발음이 들리며 켈헴의 검이 두 조각났다.
마나 소드가 어린 검으로도 망치를 부술 수는 없던 것이다.
그 순간 켈헴은 발을 들어 지면으로 떨어지던 검 조각을 힘껏 찼다.
검 조각은 그대로 쿠퍼의 턱을 뚫어버릴 기세로 하늘 높이 솟았다.
“쳇!”
쿠퍼는 부러진 검의 조각을 피하기 위해 몸을 급히 젖혔다.
“죽어라!”
그게 켈헴이 노린 수였다.
켈헴이 방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쿠퍼의 배를 향해 반 토막 난 마나 소드로 찌르려고 했다.
“죽긴 누가!”
쿠퍼가 급히 망치의 중간 부분을 잡고 켈헴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방어라고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일격이었다.
그 순간 김검천과 테이룬이 소리쳤다.
“그만!”
“멈춰!”
쿠퍼와 켈헴이 얼어붙은 듯이 동작을 정지했다.
그리고는 둘 다 천천히 무기를 거두었다.
켈헴의 머리 위에서 망치를 회수하던 쿠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보냐? 멈추라고 한다고 멈추다니.”
켈헴이 부러진 검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넌 뭐냐? 그만두라는 말 한마디에 마나가 서린 검을 맞아주기라도 할 셈이었나?”
“김검천님이 원하신다면 못할 것도 없지. 좀 다칠지는 몰라도 안 죽게는 해주셨을 거야. 넌?”
“테이룬 경이 근위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걸 너도 겪었다면 이해할걸. 테이룬 경의 말 한마디에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니까.”
“이해한다.”
“흥, 누가 들으면 네 놈이 기사인 줄 알겠네.”
쿠퍼와 켈헴은 서로 노려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테이룬이 말했다.
“무승부인가? 서로 죽을 수도 있었어.”
김검천이 대답했다.
“아니, 난 쿠퍼가 조금 유리하다고 봤는데.”
“마나가 서린 검에 배가 찔렀다면 그 속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야.”
“배는 몰라도 머리가 깨져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군. 거기다 쿠퍼는 마갑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걸 잊지 마.”
“쿠퍼가 마갑을 입었다면 배 부분의 상처는 경상이었겠지. 네 말이 맞다.”
“생각보다 패배를 금방 인정하는데.”
“진 건 켈헴이니까. 패배를 교훈 삼아 강해지도록 나중에 죽도록 굴려줄 생각이야.”
켈헴의 얼굴색이 죽은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기다리고 있는 지옥 훈련이 예상된 것이다.
켈헴은 당연히 테이룬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테이룬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으로부터 푸른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기운이었다.
“뭐, 좋아. 얘들 싸움은 이 정도로 해둘까?”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론은 우리 둘에 의해 내려질 것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