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테이룬의 주위로 연기처럼 흔들리던 붉은 기운이 그의 신체에 달라붙었다.
그 순간 검으로부터 이제까지의 몇 배나 되는 화염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테이룬이 큐브를 향해 검을 찔렀다.
“불태워라! 오러폭!”
검에서 터져 나간 화염의 기둥이 닿지도 않은 대지마저 불태우며 뻗어 나갔다.
그 흉포한 힘이 향한 방향에는 반입자 큐브가 있었다.
- 쿠오오오-!
화염과 큐브가 격돌한 순간 생각보다 승패는 간단히 났다.
반입자 큐브는 아무런 방해도 안 된다는 듯 화염을 가르며 테이룬에게 떨어져 내렸으니까.
허무하게 사라진 화염을 본 테이룬은 이를 악물며 푸르게 변한 오러의 검을 집어던졌다.
화염의 오러로도 상대할 수 없는 힘을 약화된 오러 소드로 막아낼 리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공격을 약화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 파삭.
오러의 검은 큐브와 부딪히자 1초도 안 되어 먼지로 변하는 걸로 제 역할을 다했다.
테이룬에게 필요했던 건 그 1초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고.
어떻게든 큐브의 궤도를 변경하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반입자 큐브는 테이룬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며 하늘 높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빗나갔다고 해도 테이룬이 멀쩡한 상태라는 건 아니었다.
스쳐지나간 큐브의 여파만으로도 가슴 부분의 마갑은 박살 난 지 오래였다.
가슴 부분의 살은 뼈가 보일지도 모를 정도로 깊게 파여 있었고.
고온의 열기로 인해 봉합된 상처로부터 출혈이 없는 게 오히려 괴이하게 보일 정도였다.
테이룬의 전투 불능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자 미리내가 현재 파워드슈츠의 상황을 알렸다.
[에너지 잔여량 5% 미만. 과도한 에너지 소비로 인한 파워드슈츠 손상. 파워다운.]
김검천이 손으로 달아오른 장갑을 살피며 대답했다.
“역시 무리했나? 위관급 파워드슈츠로 반입자 큐브를 사용하는 건 앞으로 자제해야겠어.”
[반입자 큐브가 아니라 실드 입자포 정도의 힘으로도 상대할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물론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상대가 최선을 다했으니 나도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반격해주고 싶어졌거든. 그러면 상대가 좋아 죽으려고 할 거 아냐?”
[인간의 호감도 문제는 잘 모르지만 그 상대가 물리적으로 죽을 것 같아 보이긴 하네요.]
김검천이 대꾸했다.
“내 전용 파워드슈츠가 아닌 이상은 나라고 해도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거든. 그리고 저렇게라도 살아 있는 건 오러로 신체가 강화된 덕분인 모양이야.”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몸으로 반입자 큐브의 여파에서 무사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그러니 큐브의 제어에 더 신경 쓴 거야. 인류가 핵을 다룰 때도 급격한 핵분열 반응을 막기 위해 얼마나 조심했는데.”
[하긴 제어하지 못하고 반입자 큐브가 폭주했다면 이 주변이 다 날아가 버렸을 테니까요.]
“나도 포함해서 말이지.”
김검천이 천천히 테이룬에게 다가갔다.
움직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듣자 테이룬은 시선을 내려 보았다.
그가 자랑으로 여기던 근위 기사 마갑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마치 왕실과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 났다는 것처럼.
테이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김검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다. 그러니 마음대로 해라. 이제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힘도 없으니까.”
“입은 잘도 움직이잖아. 그런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나 있나?”
“물론이지. 네게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 아닌가.”
“생각보다는 순진한 대답이로군. 뭐, 좋아. 만약 내가 널 살려준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지?”
“의미 없는 질문이야. 당연히 그 소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들겠지.”
“날 이길 자신은 있고?”
“그렇다라고 하고 싶지만 자신은 없군.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야 할지 고민 중이야.”
“그렇게 대답하면 살려줄 수 없겠는데.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바보 같다고 해줄까.”
“너같이 강한 자에게 거짓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거든. 마지막 일격은 정말 최고였다고.”
“그건 고맙군. 대신 고통은 없을 거라는 걸 장담하지. 내 광선검을 맞고 아프다고 불평한 자들은 없었다고.”
“그런 불평 말고 안 아프다고 한 사람이 있기나 한지가 더 궁금한데 말이야.”
“그건 나도 그래. 이걸 맞은 자들은 모두 죽어서 대답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
- 부우웅.
김검천이 광선검을 뽑아 들었다.
테이룬이 광선검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아름답지만 무서운 힘이 느껴지는군. 너도 오러를 쓸 수 있었나? 하긴 네 실력이면 이상할 건 없겠지.”
“아니, 오러와 비슷해 보이는 것 같지만 이건 광선검이라는 거다. 난 마나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에너지 잔여량 4% 미만.]
“끝낼 시간이로군.”
김검천이 높이 광선검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정당하게 싸워서 결국 졌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임무를 완수 못 한 게 유감일 뿐.”
테이룬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숲과 눈앞의 분화구 위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점차 커져가는 얼굴이 테이룬의 기억 속 얼굴과 겹쳤다.
“케이론?”
테이룬이 케이론이라고 부른 사람은 분화구 쪽에서 막 내려온 세이야였다.
싸움이 끝난 것 같자 그제야 안전한 함선에서 나온 것이다.
귀에 익은 이름에 세이야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케이론은 아버지의 성함인데요? 전 세이야고요.”
뭔가 묘한 분위기였다.
김검천이 테이룬과 세이야를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설마 둘이 아는 사이인가? 아니면 집안끼리라도?”
세이야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테이룬 경의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건 처음인데요.”
김검천이 광선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런가. 별 사이가 아니라니 계속해볼까.”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테이룬이 절박하게 굴었다.
“잠깐만. 세이야라고 했나? 아버지는 케이론이고? 성을 포함한 풀 네임이 어떻게 되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함은 케이론 폰 브륜하트라고 합니다. 전 세이야 폰 브륜하트고요.”
테이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렇군. 케이룬은 죽은 건가…세이야, 브륜하트는 네 외가 쪽의 성이다. 기억 못 하나?”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어릴 적에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더군요. 그런데 그걸 걸 어떻게 아시나요?”
“기억상실인가. 케이론은 그런 수법을 써서 자신의 아이를 보호해 왔던 건가.”
망설이던 테이룬이 김검천에게 부탁했다.
“말을 바꿔 미안하지만 살려줄 수 있겠는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것 같다.”
“글쎄. 살려주면 리에를 노린다고 했기에 널 가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야.”
“정정하겠다. 앞으로는 리에의 일에서 손을 떼지. 필요하다면 널 도와줄 수도 있고.”
“죽기 직전까지도 마음을 안 바꾸려고 하지 않았나.”
“그만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살려줬으면 하는군.”
“짐작은 가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마음이 바뀐 건 세이야 때문인가?”
“원래는 세이야의 아버지인 케이론 때문이지만. 그게 수행해야 할 1순위 임무였거든.”
“그는 이미 죽었다고 들었지 않나?”
“대신 세이야를 찾았지. 그러니 국왕 전하께 받은 임무는 완료한 셈이야.”
“그 임무를 완수했으니 굳이 리에의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
“리에라는 아이를 찾는 건 임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욕심으로 시작한 것이니까. 국왕 전하는 어린아이의 생명을 이용해 목숨을 부지하려는 분이 아니시거든.”
미리내가 경고했다.
[에너지 잔량 1% 이하. 광선검 사용 불가.]
“그러면 마무리를 지어볼까.”
결단을 내린 김검천은 광선검을 내려치지 않고 바로 거두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오히려 테이룬이 당황했다.
“잠깐만.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정말로 살려주려는 건가? 뭘 믿고?”
“내 귀와 사람 보는 눈, 그리고 널 믿는 거지. 아, 네가 한 말 중 거짓이라도 섞여 있던가?”
“없다. 오직 진실만 말했을 뿐이야.”
“그러니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건가? 죽음을 앞두고도 넌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어.”
“그거야 당연하지. 죽음 따위가 무서운 건 아니니까.”
“그런 네가 이제 와서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고 할 필요도 없을 테고. 안 그런가?”
“그건 그렇지만…”
말문이 막힌 테이룬이 김검천을 쳐다보았다.
김검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심심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라고 생각하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다고?”
“그런 건 사양하도록 하지. 다만 사람 말을 잘 믿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될 정도야.”
“사서 걱정하는군. 난 얼마 전 마법 계약서로 사기 치던 프리라는 상인도 때려잡았다고.
“큿, 무슨 말을 못 하겠군. 기왕이면 살려준 김에 손도 좀 빌려주겠나?”
“알고 보니 생각보다 뻔뻔한데.”
“겨우 살아났으니 솔직히 욕심을 채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말이야.”
김검천은 테이룬을 부축해 근처에 남아있던 바위에 앉혔다.
“그래서 테이룬, 넌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수도로 가볼 생각이다. 아, 켈헴! 다 듣고 있었겠지? 살아 있는 거 알고 있으니 나와라!”
여기저기 움푹 들어가 있는 구덩이 중 하나에서 켈헴이 고개만 살짝 빼는 모습이 보였다.
켈헴은 구덩이 속에서 미적거리면서 테이룬에게 물었다.
“저기, 두 분 다 이야기가 끝나신 겁니까?”
“지금까지 일을 가지고 단순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평범한 사람은 평생 입도 못 열겠군.”
켈헴이 남아있는 게 없는 주변을 보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구덩이에서 나오기나 해라.”
“테이룬 경이야 살려준다는 보증을 받았겠지만 제 목숨은 누가 보장해 준다는 겁니까?”
김검천이 켈헴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조용히 그냥 나오기나 해라.”
“안 나오면요?”
“그 구덩이가 네 무덤이 되겠지.”
“헉! 나갑니다. 나간다고요!”
켈헴이 자기 키만 한 구덩이를 가볍게 박차고 뛰어올랐다.
명색이 근위 기사이면서 또한 상급 기사를 바라보는 켈헴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나름 강자에 속하는 편인 것이다.
켈헴이 울상을 지으며 테이룬에게 다가갔다.
김검천이 테이룬에게 말했다.
“말은 잘 듣네.”
“근위 기사니까. 명령을 받는데 최적화된 몸이지.”
켈헴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좋아서 이런 몸이 된 게 아니라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솔직하잖아.”
“그래도 받은 적보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더 많다고요.”
테이룬이 피식 웃었다.
“켈헴.”
“예.”
“여기에 너보다 못한 사람이 있냐?”
켈헴이 머리를 굴렸다.
김검천이야 테이룬도 이긴 강자였으니 생각할 것도 없었다.
테이룬은 자신이 근위 기사가 되기 전부터 최강이라고 불렸다.
심지어 쿠퍼도 자신보다는 강했다.
세이야라는 녀석은 약해 보이긴 했지만 테이룬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뻔히 보이는 인맥은 세이야가 테이룬만큼이나 무서워 보이게 했다.
세이야가 테이룬에게 뭐라고 하면 박살 나는 건 켈헴 자신 아니겠는가.
켈헴이 한숨을 쉬며 테이룬에게 대답했다.
“여러모로 제가 가장 밀리는 거 같은데요.”
“그러면 뭐다?”
“알아서 기어야겠지요.”
“그렇다고 정말 기면서 다니지는 말고. 이제 눈치 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야. 상대가 테우펠이라도.”
“전 근위 기사로서 전하의 대리이신 테우펠 공작을 따를 이유가 있는데요.”
테이룬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자기 상황이 이해가 안 가다니.
김검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켈헴이라고 했지? 실력은 제법 있는 것 같은데 눈치는 별로군.”
“그게 무슨 말… 씀입니까?”
켈헴은 주위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압박감에 존댓말을 썼다.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근위 기사라는 이름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야. 너는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