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켈헴이 황당한 눈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제가 죽었다니요? 이렇게 멀쩡한데요?”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건 아니라고. 넌 네 윗선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말이다.”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든 켈헴이 테이룬을 바라보았다.
테이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난 테우펠 공작에게 검을 들이댈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 그런데 그가 보낸 자를 분풀이로 못 벨까? 그와 적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전령 하나쯤은 사고로 처리하면 그만이야.”
켈헴은 등 뒤가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전령으로 선택받았을 때 선배들과 동료들이 불쌍한 눈으로 보던 게 기억났다.
당시에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이제야 겨우 이해가 갔다.
“전 죽어도 상관없기에 테이룬 경에게 보내진 거군요.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돌아가도 별 신경 안 쓰겠지. 어차피 네가 죽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하하하. 생각해 보니 웃기는군요.”
“뭐가?”
“근위 기사라고 잘난 척하며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별 것 아닌 인생이라는 게요.”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지?”
켈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부터는 제 의지로 테이룬 경 옆에 있고 싶습니다.”
“편안한 근위 기사 생활을 버리겠다는 건가.”
“적어도 살아 있다는 느낌 정도는 받겠지요.”
“너무 느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 해질 텐데.”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는 자가 뭘 못하겠습니까.”
“각오가 섰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러면 떠나보도록 하지.”
비틀거리긴 했지만 자신의 두 다리만으로 대지에 선 테이룬이 입을 열었다.
“김검천. 세이야. 잘 있어라.”
***
“…라고 테이룬이 말했지. 그래, 테이룬 본인이 말이야.”
김검천이 세이야가 가져온 김밥을 하나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노려보며 물었다.
“잘 있으라고 작별 인사까지 한 네가 이 자리에 왜 있는지 모르겠군.”
테이룬도 앞에 놓인 김밥 하나를 맛있게 씹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이 김밥이라는 거 처음 먹어 보는 건데 생각보다 맛있군. 왜 우리는 이런 음식이 없는 걸까.”
“대답이나 하지?”
“이유는 간단해. 식수나 식량 하나도 없이 맨몸으로 마물의 숲을 헤맬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나도 숲을 이동하다가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긴 해.”
“그러니 기왕 살려주었으니 끝까지 도와주는 건 어떻겠나?”
“그럴수록 널 부려먹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는 건 알아두라고.”
“하하, 얼마든지. 이쪽 일이 끝난 후라면 무엇을 못 들어줄까.”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테이룬의 행동이 귀찮긴 해도 밉지는 않았다.
“좋아. 그러면 별개로 조건이 하나 있지.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 말이야.”
“뭐지?”
“앞으로 날 김검천님이라고 불러라.”
김밥을 막 집어 먹으려던 테이룬이 잠시 멈칫했다.
“큿, 죽여라.”
“후후후, 이미 살고 싶다 했으니 죽는 것도 네 마음대로가 아니야. 빨리 말하기나 해.”
“기… 기임.”
“잘한다. 잘한다. 테이룬, 넌 할 수 있어!”
“김밥이 맛있군.”
“네 옆구리를 터진 김밥처럼 만들어 줄까나?”
김검천이 주먹을 살짝 흔들어 보이는데 테이룬이 말했다.
“이봐, 김검천님.”
“음? 뭐라고 불렀지?”
“김검천님이라고 불렀다.”
“후, 몸은 그렇지만 입은 솔직하군. 말투는?”
“그 정도는 시간을 주고 봐줬으면 하는데. 이래 봬도 왕국 최강의 기사라고. 아니, 기사였지.”
“뭐, 좋아. 내가 관대하다는 건 주변 사람들도 다 인정하고 있거든.”
“…주변 사람들이라니 몇 사람이나?”
“세이야, 리에, 쿠퍼에다가 저기 있는 코폴드까지다.”
“다 네 밑에 있는 사람에다가 심지어 코폴드는 인간도 아니잖아!”
김검천이 테이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꼬우면 나보다 강하던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군. 그건 그렇고 이야기한 내용은 알겠지.”
“세이야가 수도로 가 국왕을 만나야 한다는 거였지.”
“지금쯤이면 국왕 전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이제 와서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건가.”
“국왕 전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셨기에 후계자를 찾는 임무를 맡긴 거였다.”
테이룬은 주먹을 꽉 쥐었다.
테우펠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김검천이 물었다.
“이미 죽음까지 각오했는데 넌 왜 이런 일까지 벌인 거지? 그냥 다른 사람이 왕위에 오르면 그만일 텐데.”
“한때는 본인은 물론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
“무슨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로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왕위 계승자들이 서열 1위부터 순서대로 죽어 나갔거든. 전부 다!”
“그런 게 우연일 리가 없겠지. 범인은?”
“테우펠 공작. 아쉽게도 심증이라면 있지만 물증이 없다.”
“그를 범인으로 보는 이유가 있겠지?”
“원래 그는 공작도 아닌 후작이었다. 국왕 전하가 병환으로 쓰러진 후에 재상이 되었고.”
“하긴 보통 범인은 사건이 발생한 다음 가장 큰 이득으로 보는 사람이긴 하지.”
“그러니 테우펠 공작만큼은 왕이 돼서는 안 돼.”
테이룬은 세이야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이 유일하게 정통을 이은 왕위 계승자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공식 인정을 먼저 받아야 하겠지만.
김검천이 물었다.
“그보다 세이야의 아버지, 케이론과 왕실은 어떤 관계인 거지?”
“그는 국왕 전하가 사랑했던 사람의 아이였다. 왕비가 어떻게 알았는지 죽이려고 들더군.”
“그래서 여기까지 쫓겨났던 건가. 왕실의 숨겨야 했던 흑역사 같은 존재였군.”
“덕분에 그는 살아남았지. 결국 여기서 죽은 모양이지만.”
“어떻게든 남은 기록을 찾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거군.”
“영주 자리에서도 쫓겨난 그의 마지막 흔적은 마물의 숲이라는 단서뿐이었거든. 수십 년 전 마물의 숲에 들어간 그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대신 리에를 먼저 찾은 거였다.”
김검천의 시선이 코폴드 옆에서 잠들어 있는 리에를 향했다.
쿠퍼는 잠든 리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까 전 눈을 뜬 리에는 국왕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듣고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리에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을 무조건 들어 줄 수는 없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리에는 피곤한지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테이룬이 입을 열었다.
“소모된 마석의 힘을 되살려 준다는 신비한 힘의 소녀다. 누구라도 탐낼만한 아이지.”
“나는 빼주라고. 그나마 쿠퍼의 요청이 있었기에 네 말을 들어 준 거였어.”
실제로 쿠퍼의 동의가 없었다면 리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안 했을 것이었다.
테이룬은 어이가 없는 듯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이봐. 김검천님. 욕심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저런 힘을 가진 아이를 그냥 놔두겠다고?”
“그게 뭐? 낡아빠진 마석 1개 충전시킨 걸로 저렇게 잠에 취한 아이라고.”
“아직 어리니까 그래. 성장하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지 모른다니까.”
“너 정도 되는 사람도 그러냐. 쿠퍼가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려던 이유를 알겠군.”
김검천은 리에의 옆에 있는 쿠퍼를 바라보다 묘한 기분을 느꼈다.
쿠퍼의 얼굴에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는 후련함보다 다른 감정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김검천이 말을 이으려는 테이룬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만 말하도록 하지.”
“이거 미안하군. 이제 손을 뗀 일인데. 다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기억해두라고.”
“기억하고말고. 아이를 희생해 제 욕심을 채우려는 녀석들은 확실히 처리할 생각이거든.”
김검천이 딱 잘라 말하자 테이룬은 입을 다물었다.
김검천은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케이론이 왕족이라고 했나? 그러니 세이야도 왕족이겠군.”
“무려 왕위 계승 서열 1위지. 국왕 전하가 돌아가시면 그가 바로 왕이다.”
“그런가. 살아남은 왕족이 국왕 빼고 아무도 없다고 했으니.”
“별로 놀라는 표정이 아닌데.”
“보통 집안이 아니라는 건 짐작 하고 있었거든. 다만 귀족의 자제쯤 되는 줄 알았는데.”
자기 이름을 들었는지 세이야가 고개를 돌리며 김검천에게 물었다.
“저 부르셨나요? 아, 김검천님. 김밥 더 가져올까요?”
“그래. 부탁하마.”
세이야가 사라지자 테이룬이 고개를 저으며 김검천에게 말했다.
“음식을 손수 가지러 가는 왕족이라. 그것도 네 말을 잘 따르고 있다니.”
“달라질 건 없지. 내가 만난 세이야는 근처 마을 촌장의 아들이었지 왕족이 아니었고.”
“이제 세이야의 정체를 알았잖은가?”
“세이야가 변한 건 아니지. 그러는 너도 왕족이 가져오는 김밥을 잘 먹고 있는데.”
“왕족께서 주신 김밥의 맛을 어찌 잊겠는가.”
서둘러 김밥을 마저 먹어치운 테이룬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잘 먹고 푹 쉬었으니 정말로 떠날 때가 되었다.
“수도에 간다면 근처 영지에서 관도를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를 거다. 아, 세이야의 문제라지만 김검천님은 이번 일에 빠진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하겠지?”
“테우펠 공작 때문이라도 못하지. 그런 녀석이 리에를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거든.”
“리에든 세이야든 네가 보호하고 있는 한 평범하게 살기에는 그른 것 같군.”
“애초에 이곳에서 내 삶은 평범하고 거리가 멀더군. 수도로 가는 것도 생각해 보겠다.”
“관도를 이용할 거면 먼저 길드를 찾아가고. 그중에서 너에게 어울리는 건 용병 길드겠지.”
“여기 용병은 인간 사냥꾼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
“그래서 너한테는 좋지. 용병이 널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잘 부려 먹을 수 있겠지.”
“말이 많아진 걸 보니 떠나려는 건가?”
“잘 먹고 푹 쉬었더니 몸도 어느 정도 나았거든. 켈헴. 준비는?”
켈헴이 자기 앞에 놓인 음식들을 입에 잔뜩 밀어 넣고 우물거리다 일어섰다.
“데이눈 경. 이미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먹을 거나 다 삼킨 후 제대로 대답해라.”
“이렇게 맛있는 것들은 처음 먹어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근위 기사가 직접 짐을 지고 다닌다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네 말은 이 몸보고 하라는 거냐?”
“하하, 제가 아니면 또 누가 하겠냐는 말이었지요.”
눈치는 없지만 처세에는 능한 켈헴이 급히 옆에 놓인 짐을 등에 짊어졌다.
테이룬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였다.
“그러면 김검천님.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자리를 떠나자 미리내가 테이룬의 상태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지금 저자는 3도 화상, 복합 골절, 근육 파열 상태인데도 움직일 수 있다니 대단합니다.]
“그 정도면 의지만으로 움직이기보다 오러의 힘으로 행동한다고 봐야겠네.”
[확실히 오러의 힘은 대단하군요. 일반인이라면 즉사할 상처였는데 벌써 움직이다니요.]
“그것도 있겠지만 오기로 버티는 것 같기도 해. 그래도 약은 챙겨 줬으니까.”
[시간은 제법 걸릴지 몰라도 오러와 약을 같이 사용한다면 회복에는 문제없겠네요.]
김검천과 멀어져 남쪽을 향해 한참 숲속을 걸어가던 테이룬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도 수도로 향한다.”
“설마 테우펠 공작과 만날 생각입니까?”
“세이야가 있으니 최악이라도 이 나라 왕실 명맥은 유지될 거다. 테우펠이 없다면 전제 하에.”
“설마 그를 향해 검이라도 휘두르실 생각이십니까?”
“이 나라에 있어 테우펠의 존재는 독이나 다름없다. 모든 죄는 우리 선에서 끝내야 해.”
“지금 상황에서는 반란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인데요?”
“켈헴, 괜찮으니 넌 빠져도 된다. 다만 몸을 회복해야 하니 수도까지는 네 힘이 필요하다.”
켈헴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만 해도 제 목은 충분히 날아가고 남을 정도겠지만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제 힘이 필요할 테니까요.”
“지금 상황이 변한 게 있나?”
“제가 출발할 쯤 괴물들이 도로와 영지 주변을 날뛰고 있더군요. 마치 재난이라도 만난 듯이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집 밖으로 나오려고 들지도 않는 시기가 왔군.”
“김검천 일행이 수도로 향하려면 고생 좀 할 겁니다. 저 같은 근위 기사의 인맥이 없다면요. 요즘은 용병을 쓰려고 해도 힘들 거고요.”
“더 좋군. 김검천님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 테우펠에 대한 일을 먼저 끝내면 더 바랄 게 없을 테니. 그리고 켈헴.”
“예?”
“본인도 김검천님이라고 부르는데 네가 그를 낮춰 부르다니? 앞으로 그 호칭부터 고쳐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