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으악!”
- 쿵.
칼에 목이 베인 한 사람이 허공에 피를 뿌리며 지면에 머리를 박았다.
흐르는 피의 양을 보니 살아남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쓰러진 사람의 동료인 상인들이 급히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용병님들,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용병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영지민들이 고개를 돌리며 지나쳐갔다.
영지민들이라고 저런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그들도 저런 일을 겪다가 참다못해 결국 용병들과 싸운 적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살인에 이력이 난 용병들을 상대한 대가는 대항한 영지민들의 죽음뿐이었다.
영주와 영지 내의 병사들은 그들 간의 전투가 끝난 뒤에나 관여했다.
지친 영지민들이 할 수 있는 건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도와줬다가는 똑같은 꼴을 당할 뿐이야.”
“누가 용병들을 좀 처리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인간 사냥꾼들하고 손을 잡고 다니는 놈들이 용병이라고 말한 자격이 있을까? 젠장.”
영지민들은 용병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수군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히 영지민들의 그 소리를 용병들의 귀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용병들은 새로운 먹잇감인 눈앞의 상인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용병들이 상인들을 비웃었다.
“이것들 봐라. 말이 많네.”
“용병을 고용했으면 계약대로 돈을 지불해 줘야할 거 아냐? 엉?”
“목적지까지 도착해놓고 우리들에게 한 푼도 못 주겠다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 아니냐고.”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 억울했는지 한 남자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다 당신들 탓 아니요?”
“뭐가?”
“괴물들에게 습격당했을 때는 우리를 놔두고 도망쳐놓지 않소!”
“그래서?”
“우리는 살기 위해 짐도 버리고 맨몸으로 이곳에 도착한 거요! 그런데 이제 나타나서 돈을 달라고 하다니 이거야말로 계약 위반 아니겠소?”
용병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오호라. 방금 죽은 그놈이 가장 성격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놈이 최고인데?”
“계약 위반은 무슨. 어찌 되었든 간에 너희들은 이곳에 도착하긴 했잖아.”
“맞아. 우리는 계약을 지킨 셈이지. 너희들은 계약 불이행으로 길드 지부로 끌고 갈 거다.”
“도련님도 아닐 텐데 계약만으로 이런 변두리 영지의 용병을 믿다니. 멍청한 놈들이야.”
“그러게. 2명이 왔다가 2명 모두 죽어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요즘 인간 사냥꾼들이 줄어서 들어오는 의뢰가 적어져서 심심한 참이었는데 잘 되었네.”
불만을 늘어놓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달려나갔다.
용병들이 하는 짓을 그냥 보고만 있던 경비병들이 있는 출입구 쪽 방향이었다.
용병들은 그걸 보고도 오히려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가?”
“놔둬. 아직 저게 정신을 못 차렸네.”
“저런다고 도와줄 거 같으면 이미 개입했겠지. 크크크.”
용병들의 말이 귀에 들릴 리 없던 남자는 경비병 앞에 도착할 수는 있었다.
“경비병! 보고만 있을 겁니까? 우리들은 제국에서 온… 윽.”
남자는 배를 움켜쥐며 뒤로 넘어갔다.
경비병이 들고 있던 창을 거꾸로 쥐어 창날이 없는 부분으로 남자의 배를 가격한 것이다.
용병들이 남자의 일행들을 끌고 성안으로 들어서며 경비병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들 중 용병 한 명이 떨어져 나와 선임 경비병에게 다가섰다.
쓰러진 남자를 향해 침을 뱉은 선임 경비병이 다가온 용병에게 말했다.
“제국민이면 어쩌라고. 재수도 없으려니까. 어이, 너희들은 이런 녀석 하나도 못 잡냐?”
“네 녀석도 그 순간에는 못 잡았을 텐데? 놈이 잡힌 건 경비병이라서 방심한 거잖아.”
“크크, 이 영지에서는 경비병들도 모두 용병 길드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인지 몰랐나 보군.”
“제국 어쩌고 했잖아. 왕국, 그것도 여기 지방 사람이 아니라면 알 리가 있나.”
“그래도 적당히 해.”
“뭐가? 너도 매일 하는 일이잖아. 아니, 네가 더 심하게 굴지 않냐?”
“그게 아니라 너무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거야. 적어도 이렇게 눈이 많은 장소에서는.”
“응, 어쩌라고. 여기서 우리들을 어찌할 자들이 있나? 우리 뒤에는 영주가 있잖아.”
“그 영주 말인데. 요즘 들어 안 보이더라.”
“안 보이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매번 볼 때마다 사람들을 잡아 오라고 해서 지겹던데.”
“영주뿐만 아니야. 영주가 데리고 다니던 호위 기사들도 보이지 않아. 불안해.”
“크크크. 영주나 기사나 모두 어디 가서 죽기라도 했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죽으면 곤란하지.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돈을 주냐? 이놈이나 데려가라고. 응?”
선임 경비병이 고개를 들어 용병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젠장, 마갑을 입은 녀석들이 다가오는데. 그것도 둘이나. 들키면 곤란한 상황이겠네.”
“영주의 호위 기사면 관계없잖아?”
“아닐걸. 둘 다 덩치가 보통이 아닌데 저런 체격이면 기억 못 할 리가 없거든.”
“쳇, 어쩌지?”
“어쩌기는. 우리가 이 짓을 하루 이틀 하냐. 일단 속여 넘기자고.”
“그냥 저것들을 죽이면 안 될까?”
“못 할 것도 없겠지. 이런 변두리에 오는 기사 한두 명 정도 사라졌다고 해서 누가 찾을 거 같지도 않고.”
“더구나 기사같이 잘난 척하는 녀석들 주머니는 하나같이 무겁더라고.”
“혹시 처리하게 되면 돈은 반반으로 나누고. 그래도 일단 상황은 보고 시도하자고.”
선임 경비병은 만약을 대비해 손짓으로 주변에 있는 경비병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팔다리나 갑옷 사이로 공격할 만한 틈은 충분했다.
기습 공격만 성공한다면 하급 기사 정도는 별 피해 없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선임 경비병이 본 두 사람은 김검천과 세이야였다.
드디어 파워드슈츠를 장착하고 이동할 수 있게 된 세이야인 것이다.
물론 평범하게 걷는 이상의 행동은 아직 하기 힘들었지만.
김검천은 용병과 선임 경비병을 주시하고 있었다.
먼 거리라지만 미리내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전송해 주었기에 알아챈 것이었다.
“하긴 영주가 그 꼴이니 그 아래 녀석들도 멀쩡할 리가 없지. 안 그래?”
[저자들은 바보입니다. 저 정도로 김검천 함장님을 잡겠다니요. 세이야라면 모를까.]
“속셈을 알았으니 저 녀석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한번 봐주도록 할까나. 아, 세이야.”
“예. 김검천님.”
“파워드슈츠가 있으니 괜찮겠지만 만약 싸우게 된다면 머리 부위만큼은 조심하도록.”
“저는 실드도 제대로 사용 못 하니까요. 사용한다고 해도 에너지 한계가 있고요.”
“거기다 넌 파워드슈츠 조종 실력이 낮아 전투를 하기에는 움직임이 둔하거든.”
“저도 김검천님 정도로 파워드슈츠를 사용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 놈들이 왔어요.”
앞장선 선임 경비병이 이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들. 저는 이곳의 경비병입니다. 통행증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김검천이 딱 잘라 대답했다.
“안 된다.”
경비병이 당황했다.
이렇게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통행증이 없거든.”
“하하, 그러시군요. 뭐, 기사분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면 신분증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그거는 왜 또 안 된다는 겁니까?”
“당연히 너에게 보여줄 신분증이 없으니까.”
경비병이 인상을 쓰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고귀하신 기사님께서는 경비병 따위에게 신분증을 보여줄 가치도 없다는 건가?”
들리지 않게 작게 말한 소리였지만 김검천은 미리내를 통해 다 들을 수 있었다.
신분증은 안 보여준 게 아니라 없어서 못 보여준 것인데 말이다.
경비병은 높으신 분이 억지를 부리는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었지만.
김검천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들여보낼 건가? 말 건가?”
“혹시 이곳의 누구에게 초대라도 오신 겁니까? 그러면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곳의 길드 때문이야. 애초에 영주로 인해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기도 하고.”
“헉! 설마 영주님과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몰라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경비병이 갑자기 허리를 굽히며 아부를 떨었다.
뒤에 있던 용병이 습격하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검천과 세이야를 죽인 후 돈주머니를 못 터는 게 아까운 모양이었다.
김검천은 그런 용병을 위해 그 나름대로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지. 내 손으로 영주를 직접 때려잡았으니까.”
“예? 그게 무슨 농담이신지.”
“농담 아니야. 네 영주의 원수가 네 눈앞에 있다는 말이거든. 요즘 그가 안 보이지 않던가?”
선임 경비병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아까 전 영주와 그의 호위 기사가 보이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놈이 이제 보니 우리를 놀리고 있는 거구나.”
“이 정도는 기본이지. 우리를 죽이려던 너희들의 진지한 대화가 들려왔으니까.”
“그걸 어떻게?”
“귀가 밝은 사람이 있거든. 그러니 너 같으면 뒤통수 노리고 있는 녀석을 그냥 놔두겠냐?”
“들켰다! 쳐라!”
선임 경비병이 창날로 김검천의 얼굴을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경비병들도 갑옷의 틈을 향해 힘껏 창을 찔렀다.
- 깡.
“윽? 이게 뭐야?”
“분명 갑옷의 연결 부위를 공격했는데도 관통하지 못한 건가?”
김검천과 세이야의 파워드슈츠를 공격한 창들의 날들이 부러져 떨어졌다.
파워드슈츠라도 관절 부위는 약했지만 경비병 정도의 공격에 문제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파워드슈츠가 아니라 하급 기사의 마갑이었다면 성공했을 테지만.
머리 부위만큼은 확실히 보호한 세이야가 바로 경비병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우리를 죽일 작정으로 공격한 건가요? 에잇!”
경비병들은 세이야가 멀쩡한 모습에 당황했으나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거기다 세이야의 공격은 빠르긴 했으나 주먹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몸의 균형을 잃었다.
경비병들은 비틀거리는 세이야의 주먹을 피하며 비웃었다.
“마갑은 장식인가?”
“기사인 줄 알았는데 움직임은 또 어떻고?”
“그러게 말이야. 차라리 몸으로 굴러가는 게 더 빠르겠는데.”
그 말을 들은 세이야가 갑자기 주먹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구른다라.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뭐라고?”
“다만 구르는 게 아니라 날 생각이지만요!”
세이야는 그대로 근처에 서 있는 경비병들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몸을 날렸다.
파워드슈츠의 조종이 어렵다지만 사용 가능한 기본 성능만큼은 동일했다.
100킬로에 달하는 파워드슈츠가 공중을 날았다.
3명의 경비병이 부딪히며 땅바닥에 쓰러진 자들이 저마다 뼈에 문제가 생겼음을 호소했다.
“켁? 다리가?”
“헉? 가슴이?”
“억? 허리가?”
세이야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경비병들 위에서 한 바퀴 더 굴렀다.
일어선 세이야의 발밑에는 비명도 못 지른 채 기절해버린 경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덕분에 좋은 공격 방법을 하나 깨달았네. 아차, 김검천님은?”
세이야가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자 경비병들은 이미 다 지면을 기고 있었다.
김검천의 주변으로는 박살 난 경비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선임 경비병의 얼굴은 김검천이 한 손으로 집어 올리고 있는 중이었고.
경비병 정도야 한 손만으로도 처리 가능했던 것이다.
선임 경비병은 김검천의 손에 잡힌 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사람 살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세이야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던 녀석이 목숨을 구걸하기는.”
“우리는 선량한 경비병들이라고!”
“그런 말은 여기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사람부터 감춘 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건 이쪽이 아니라 저기 있는 용병이 한 건데…”
선임 경비병의 고자질 대상인 용병은 이미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선임 경비병이 잡히는 순간 용병은 도망가기 바빴으니까.
세이야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앗, 김검천님. 저쪽이에요!”
용병은 이미 출입문을 넘어가 도망치는 중이라 달려가 잡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김검천이 선임 경비병을 들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
“그러면 경비병, 네가 잡으면 되겠군.”
경비병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김검천은 선임 경비병을 들어 도망치는 용병의 등 뒤를 향해 날렸다.
선임 경비병은 잠깐 동안이지만 새가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용병과 부딪혀 정신을 잃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