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퍽!
용병은 경비병이라는 원거리 무기를 맞고 쓰러졌지만 아직 움직일 힘은 남아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나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세이야가 물었다.
“김검천님. 저 용병 여전히 도망가는데요. 잡아 올까요?”
“됐어. 못 잡아도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쓸모가 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산책이라도 하고 있으면 구조 요청을 받고 다른 용병들이 알아서 튀어나올 테니까.”
“고블린을 때리면 다른 고블린이 나타나긴 하지요. 이곳 용병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가요?”
“테이룬이 용병 길드에 가보라고 했었거든.”
“주변의 아무에게나 용병 길드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요.”
“원래 생각은 그랬지. 그런데 이런 녀석들의 본거지로 가달라면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하긴 제가 이곳에 산다면 용병의 용자만 들어도 도망칠 거 같네요.”
“그보다 이곳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안 보이는군. 마물의 숲에 있는 네 마을보다 더한데.”
김검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변두리 영지라고 해도 영주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리는 장소여야 하는 것이었다.
세이야가 하늘에 뜬 태양의 색을 살펴보더니 그 의문에 대답했다.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강해지는 걸 보니 초월교의 행사 기간이 다가와서 그러는가 본데요. 행사 내용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긴 하는데 이 무렵에는 외출하는 걸 꺼려하더라고요.”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건가. 초월교라는 뭐지?”
“인간의 힘을 넘어선 초월 존재를 모시는 집단입니다.”
“함선을 보고 초월적 존재라고 놀라기도 했었지. 그건 뭔가 특별한 존재인가 보군.”
“각 나라의 왕이나 황제 같은 높으신 분들도 초월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면 초월교라는 곳의 입김은 어딜가도 강한 편이겠군.”
“나라를 초월한 힘을 발휘한다고 봐야지요.”
“그래도 왕이나 황제 같은 자들이 자기 머리 위에 누군가를 올려두고 싶지는 않을 텐데.”
그게 권력자의 속성 아닌가.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고 나눠주기도 싫은 게 권력인 것이다.
지구 역사 속에서도 권력을 쥐기 위해 일어난 세력 다툼은 무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세이야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 국왕은 예외적으로 초월교와 사이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있었네요.”
“그 왕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고 테이룬이 말했었지.”
“국왕이 그렇게 된 건 테우펠 공작이 관여한 일이라고 했었고요.”
“그 테우펠 공작 뒤에 혹시 초월교가 있을 수도 있겠군.”
“설마요. 아무리 초월교라고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죠.”
“…”
“아니겠죠?”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하지만 모를 일이지. 그보다 드디어 손님이 마중 나왔군.”
그건 세이야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김검천의 등 뒤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너희들이 영주를 죽였다는 놈들이냐?”
“잘했다! 안 그래도 영주가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게 짜증 났거든.”
“상으로 별로 안 아프게 죽여주마!”
김검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상이라면 죽는 것보다 여기 용병 길드 지부로 날 안내해주었으면 하는데.”
용병들이 비웃었다.
“상 좋아하시네!”
“안 그래도 상이 아니라 벌을 주려고 네 녀석들을 길드 지부로 끌고 갈 예정이라고!”
“지부로 가고 싶으면 얌전히 무릎이나 꿇고 있던가.”
김검천이 반중력 장치를 이용해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몸을 돌려보았다.
다리를 움직이는 편이 속도가 빨랐지만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데는 이런 장치가 유용했다.
그 모습에 저마다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던 건장한 용병들이 움찔했다.
김검천이 대답했다.
“허나 거절한다. 난 누가 끌고 가는 것보다는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게 좋거든.”
용병들이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김검천을 보며 수군거렸다.
“방금 뭐지? 발이 하나도 안 움직였는데 몸이 그대로 뒤로 돌았지? 귀신인가?”
“뭐야, 저거 무서워.”
“무섭긴 뭐가 무서워? 대낮에 유령이나 언데드같은 게 나올 리 없잖아!”
“멍청이들 같으니! 아무렴 어때. 놈도 칼에 맞으면 죽는다는 걸 보여주마!”
큰소리치며 용병 한 명이 칼을 들고 김검천을 향해 기세 좋게 뛰어갔다.
누가 앞장을 서니 나머지 용병들도 용기가 생겨 무기를 들고 따라갔다.
김검천은 가볍게 몸을 풀면서 주먹을 폈다.
“용기인지 만용인지 어디 한 번 확인해 주도록 하지.”
김검천은 맨 앞의 용병이 내려치는 칼을 피하는 대신 손날 부분으로 칼을 가격했다.
- 스윽.
부러진 것도 아니고 절삭음과 함께 칼날이 반듯하게 절단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몸 전체를 두르는 실드를 날카롭게 손 부분에만 전개시켜 사용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실드를 다루는 건 김검천이니 가능한 것이지 세이야에게는 아직 먼 경지였다.
“허억! 칼이! 칼이!”
“배상은 안 해줄 거라고? 난 너희들과 다르게 안 아프게 죽여줄 정도로 착하지 않고.”
김검천은 놀라서 몸이 굳어버린 용병을 잡아 들어 올렸다.
제대로 반항도 못한 채 잡혀버린 용병이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너희들에게 전술적 임시 무기를 맛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그러니 양해하라고.”
“누가 이딴 걸 이해했다는 거냐?”
“중요한 점을 잘 지적했네. 이 일에 네 의견 따위는 필요 없는 걸 몸으로 느끼라고.”
김검천은 한때 인간이라 불렸던 손에 든 전술적 임시 무기를 용병들을 향해 휘둘렀다.
무기를 휘두르기만 했지 한 번도 무기 대용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용병이 비명을 질렀다.
기겁을 한 다른 용병들이 휘두르는 칼이나 검에 몸이 베였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아! 무기 저리 치워! 저리 치우라고! 이러다 죽겠어!”
물론 자기 보호에 급한 다른 용병들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생체 무기가 된 용병은 칼에 베이는 게 싫었기에 팔과 다리를 힘껏 내저으며 버둥거렸다.
그러다 용병의 발에 얼굴을 걷어차인 용병 한 명이 악독한 눈빛을 내뿜었다.
“포로가 된 놈이 동료 용병마저 쳐? 그렇게 살 바에 차라리 놈과 같이 죽어라!”
그가 힘껏 찌른 검이 잡혀 있던 용병을 관통하며 박혔다.
잡혀 있던 용병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복수에 성공하자 얼굴을 차였던 용병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 속이 다 시원하군. 응?”
웃던 그의 눈앞으로 사람 하나가 점점 커지는 게 들어왔다.
그게 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김검천이 용병을 집어 던져 둘 다 같은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제 동료를 죽여 놓고 좋다고 웃고 있다니. 여기 용병이 어떤가 알 만하군.”
말을 하면서도 김검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옆에서 칼을 휘두르는 용병의 가슴을 향해 팔꿈치를 내질렀으니까.
용병이 바닥에 옆으로 얌전히 눕는 걸 보니 적어도 갈비뼈가 3개는 나간 모양이었다.
자신의 얼굴만 한 해머를 휘두르는 용병에게는 정면에서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을 맞은 해머가 뒤로 꺾이더니 주인인 용병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앞으로 머리 대신 해머를 달고 다니게 된 용병이 뒤로 넘어갔다.
그 상태로 김검천은 옆으로 한 걸음 걸었다.
- 부웅.
날카로운 못을 박아 넣은 곤봉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 지나갔다.
헛손질을 한 용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김검천을 보고 있었다.
김검천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았다.
눈앞에서 떨고 있는 용병 외에는 다들 입도 열기 힘든 상황이었다.
김검천이 유일하게 서 있는 용병을 향해 물었다.
“이 정도면 상을 받아도 되겠나? 말한 대로 용병 길드 지부까지 안내해 줬으면 하는군.”
용병은 눈을 열심히 굴렸다.
상대가 기사로 보이니 당당하게 굴면 놓아줄지도 몰랐다.
“이 몸은 동료를 파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배신자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여라!”
김검천이 아무 말 없이 주변에 굴러다니는 망가진 해머를 집더니 힘껏 주물럭거렸다.
해머는 금속인 주제에 모습이 변형되면서 종이처럼 납작하게 변했다.
용병은 반항할 생각을 접은 채 눈만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투박하지만 해머로 금속 학을 접은 업적을 달성한 김검천이 용병에게 물어보았다.
“응? 아까 뭐라고 했지? 뭐가 되고 싶은지 말만 하라고.”
용병은 아까와 달리 공손히 대답했다.
“사실 전 예전부터 길드 지부까지 가는 길을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좋은 태도다. 사람이 말을 하면 알아듣는 용병이 있다니 기쁘군.”
“그러면 전 살려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용병은 그때 세이야가 묘한 눈초리로 김검천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챘다.
세이야는 김검천이 하던 악당과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떠올리는 중이었고.
물론 김검천은 이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지만 세이야나 용병이 알리는 없었다.
살아남는 방향으로는 눈치가 빠른 용병이 급히 물었다.
“설마 당신은 안 죽인다고 했지만 대신 옆에 있는 기사가 저를 죽이는 건 아니겠지요?”
세이야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예? 제가 기사라고요?”
“그런 훌륭하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기사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그 말대로 세이야는 40킬로 정도의 금속 덩어리를 전신에 두르고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이세계에서 마나를 다루는 기사 외에는 보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거기다 아부라는 건 상대가 좋아하면 그만이었고.
자신이 왕족이라는 걸 실감 못 하던 세이야는 기사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 바로 대답했다.
“김검천님도 말씀하셨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아직까지 전 누군가를 죽여본 적도 없고요.”
한결 마음을 놓은 용병이 히죽거리며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제 제 목숨을 안전한 거군요. 명예를 지키는 두 분이 약속하셨으니.”
"가기나 해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용병이 앞장서서 용병 지부로 향했다.
용병들이 박살 나는 소란이 있었는데도 주변의 상점이나 주택에서 사람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창문 너머로 상황을 살피는 눈동자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김검천이 용병에게 물었다.
“이곳은 정말 끝내주는 느낌이야. 유령이 사는 곳 같거든.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냐?”
김검천이 겁나긴 하지만 이제 목숨만큼은 보장받았다고 생각한 용병이었다.
용병은 이미 김검천이 시킨 대로 따르고 있는 중이기도 했으니 숨김없이 말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영주가 시킨 일 때문에 그런 거니까요.”
“뭘 시킨 거지?”
“살인, 방화, 납치 등등 같은 건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군. 그걸 시킨다고 양심의 가책 없이 따라 한 건 너희 용병들이고.”
“아이고, 양심 같은 게 있으면 칼 들고 용병일 어찌합니까. 먹고 즐기며 살아야지요. 용병이라도 그 좋은 걸 싫다고 거절하는 별난 자들도 있긴 하지만요.”
“예를 들면?”
“이곳이라면 용병답지 않은 데탈과 내더 녀석들 정도겠군요. 특히 자유의 마을에 갔다 온 이후로는 더 이상해졌고요.”
“들어본 것 같은데… 아무튼 멀쩡한 용병도 있다는 거군. 그들은 어디에 있지?”
“얼마 전에 용병 지부로 잡혀 들어간 것 같으니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김검천은 그제야 데탈과 내더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자유의 마을에서 자릿세 받아내려고 김검천에게 시비를 걸었던 자들 아닌가.
지금 생각하니 다른 용병들에 비하자면 귀여운 행동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용병 길드는 거주 지역이나 상가와는 떨어진 외곽 지역에 있었다.
용병 지부는 나무 지붕이지만 벽은 돌로 만들어져 있는 2층 저택을 개조한 것이었다.
미리내가 간단히 살펴본 후 말했다.
[마그마가 식은 화강암으로 만든 건물이로군요. 주변에 화산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마물의 숲에서도 보았던 거 같네. 저런 무거운 돌을 옮긴다고 사람을 제법 굴렸겠는데.”
눈치를 보던 용병이 입을 열었다.
“저기 기사님. 들어가실 곳은 저쪽입니다.”
용병 길드로 들어가는 나무문은 두 사람도 제대로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좁았다.
거기다 문은 크기에 비해 높이가 낮았다.
김검천이 문을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자 용병은 왜 그러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저렇게 낮은 문이라면 들어갈 때 허리를 굽혀야 하니 그 순간 공격받기 쉬운 것이다.
용병은 크게 소리쳤다.
“어이! 나 한스야! 지금 문으로 들어갈 테니 절대로 공격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