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테이룬은 테우펠 공작에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4명의 근위 기사들에게 시선이 갔다.
4명의 근위 기사 모두 마나 플레임 소드를 사용할 정도로 수준이 높은 것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4명이라지만 마나 플레임 소드만으로도 오러의 힘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거기가 단 한 자루의 검도 잘려나가지 않다니 테이룬이 자존심을 상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김검천에게 당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지만 이 정도라니.
근위 기사들은 테우펠 공작을 호위하면서 한 편으로는 테이룬을 포위해나갔다.
테우펠 공작은 근위 기사들을 믿는지 도망갈 기색 없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왕국 최강 기사의 칭호는 앞으로도 10년은 지킬 수 있어 보이는군. 미리 축하라도 해주지.”
“이제와서 그런 칭호 따위는 관심 없다.”
“그래야겠지. 왕국 최강의 칭호는 기습 따위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어야 하니까.”
“기습당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침착해 보이더군. 본인이 방문하는 소리를 너무 크게 냈던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걸로 생각했나? 머리 위에 커다란 쥐새끼가 웅크리고 있는데.”
“쥐치고는 덩치가 꽤 크지 않나? 여기에 물리면 꽤 아프거든.”
테이룬이 오러가 서린 검을 테우펠 공작에게 향했다.
테우펠 공작이 빈정거렸다.
“아프다고 해도 이 몸에게 닿지 않으면 소용없는 이빨일 뿐이다.”
테이룬이 검으로 그의 주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보다 네 옆의 근위 기사들이나 소개시켜 주었으면 하는데 괜찮은가?”
“네가 직접 훈련시킨 근위 기사들인데 굳이 소개가 필요한가?”
“원래 알던 중급 수준의 기사들이라면 말이지. 얼마 못 본 사이에 상급이 될 만한 자들은 아니었어.”
“네가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나은 마나 증진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혹시 알고 싶나?”
“상대가 너라도 무슨 방법인지 알고 싶을 정도라면 충분한 대답은 되었겠지.”
“그러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해라. 그러면 넌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 테이룬.”
“강해진다는데 못 할 것도 없겠지.”
테이룬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말에 테우펠 공작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
“물론. 네 시체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어 줄 테니까. 그러니 얌전히 죽어주겠나?”
“이거 한 방 먹었군. 상관없겠지. 널 무릎 꿇릴 방법 같은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무슨 수로?”
“상대가 너라면 이런 방법도 있지. 나와라.”
테우펠 공작의 말에 벽에 갑자기 문이 생겼다.
테이룬은 알 수 없는 괴이한 현상에 흠칫했다.
“마법인가?”
“마법보다도 더 나은 것이지. 적어도 너한테 있어서는 그럴 거야.”
- 삐걱.
천천히 문이 열렸다.
갑자기 생긴 문으로부터 어떤 괴물이 나올까 긴장하던 테이룬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거기서 걸어 나온 건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국왕이었다.
테이룬에게 있어서는 어떤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도 더 최악의 조우였다.
테우펠 공작이 활짝 웃었다.
“어떤가? 테이룬. 이제 그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유연하게 굽힐 생각이 들었나?”
국왕의 얼굴은 죽은 자처럼 창백했고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멀쩡한 상태라고는 겉치레 인사라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인 것이다.
절대로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테이룬이 분노한 눈길로 테우펠 공작을 바라보았다.
“국왕 전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런. 기뻐해야 하지 않겠나? 국왕 전하가 저렇게 정정한 모습을 보이시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모습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냐!”
그의 말대로 지금 국왕의 모습은 시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테우펠 공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장이라도 죽지 않는 게 신기한 건가. 그래도 모시던 주인인데 너무한 표현이지 않나?”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저렇게나마 살려둔 네 속셈이 드러난 거겠지.”
“그래서 수도에 돌아왔는데도 국왕을 찾을 생각을 안 한 건가? 이 몸이 국왕을 인질로 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냐는 말이다.”
“애초에 전하가 인질을 삼을 수나 있던 상태였던가. 그랬다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았어!”
“이미 알아본 모양이었군.”
“따로 믿을만한 의사들에게 확인했지. 모두 다 국왕 전하가 곧 죽을 목숨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마물의 숲으로 간 건가? 유일하게 국왕을 살릴 방도인 소녀를 찾기 위해.”
“때는 이미 늦었던 건 같지만. 너도 역시 그 소녀에 대한 일을 알고 있었어.”
테우펠 공작이 허공을 향해 손을 폈다가 움켜쥐었다.
“물론이지. 성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이 손안에 있거든. 모든 이의 생명도.”
“너를 기습하기 전 국왕 전하를 찾아보았는데 없던 이유가 네가 이렇게 만들어서였구나!”
“너는 본인이 국왕이 죽었다는 걸 숨긴 채 이 나라를 마음대로 다룰 줄로 알았나?”
“너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녀석이지.”
“뭔가 착각하고 있군.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게 본인인 것이다.”
“그래서 국왕 전하를 인질로 삼아 목숨이라도 부지할 작정인 거냐?”
“아니, 귀족 회의에서 국왕 전하께서 하실 말씀을 들어보자는 거지. 이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인데 아직도 살아서 말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을.”
테우펠의 말이 떨어지자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던 국왕이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라. 이 나라의 왕위는 테우펠 재상에게 넘기도록 한다.”
국왕을 잘 알고 있던 테이룬은 그가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등골을 스며드는 불길한 느낌에 테이룬이 국왕을 향해 되물었다.
“국왕 전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람의 말 소리에 반응한 국왕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며 눈에 핏줄이 선 채로 말했다.
“들어라. 이 나라의 왕위는 테우펠 재상에게 넘기도록 한다.”
“전하?”
단순히 협박을 당해서 말하는 행동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런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 중인 국왕의 입에서는 이제 피마저 흘러나왔다.
“들어라. 이 나라의 왕위는 테우펠 재상에게 넘기도록 한다.”
눈앞의 광경에 테우펠 공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을 위해 불러온 제국의 치료사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어진 임무만큼은 훌륭하게 처리하지 않았는가.
망가진 장난감같이 하나의 말과 행동만을 되풀이하는 국왕이 이 자리에 있었다.
테우펠 공작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테이룬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테우펠 공작이 왜 국왕을 저런 상태로 살려냈고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제 곧 개최될 귀족 회의에서 국왕이 저 말을 한다면 차기 국왕은 테우펠이 될 것이었다.
왕족의 피가 흐르는 자들은 다들 죽었다고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단지 저 말만을 하기 위해서 국왕은 죽지도 못한 채 한 가닥 숨만 붙어 있는 것이었다.
국왕이 죽을 거라는 건 이미 각오한 바였다.
태어나면 죽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동등한 세계의 법칙이니까.
그런데 저렇게 자신의 의지로 죽지도 못한 채 살아 있는 모습이라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저런 모습만큼은!
테이룬은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테우펠--!”
테이룬의 흐트러진 모습에 테우펠 공작은 감정의 찌꺼기마저 남김없이 토해내듯 웃었다.
고귀한 국왕과 최강의 기사의 비참한 모습은 최고의 예술이었다.
“으하하하하! 마음에 드나? 이 멋진 작품이!”
“마나참!”
증오를 머금은 테이룬의 검이 반원의 마나를 허공에 그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그 궤적을 따라 테우펠 공작을 향했다.
테우펠 공작 근처에 있던 근위 기사 2명이 마나참을 맞이해 뛰쳐나왔다.
오러참도 아닌 마나참이라 혼자서도 막을 수 있어 보였지만 만약을 위해서였다.
그 순간 마나참이 2개로 늘어나며 테우펠 공작 외에 국왕마저도 공격 범위 내로 끌어들였다.
의식을 잃기 전 국왕은 테우펠 공작에게 잡혀 인질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 테이룬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지금, 국왕의 현재 상황을 목격한 테이룬은 망설임을 떨치고 검을 든 것이다.
“이 죄는 죽어서 갚겠… 아니?”
마나참이 닿기 전에 국왕은 벽에 흡수되는 것처럼 빨려 들어갔다.
- 파삭.
목표를 잃은 마나참은 성벽을 벤 채 그대로 밖으로 날아 나갔다.
벽 너머에 누가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안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의 큰 틈이 생겼다.
테이룬이 급히 눈을 돌려보니 테우펠 공작의 손가락이 기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 전 국왕을 나타나게 만든 것도 그랬지만 뭔가 이상한 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오러참!”
테이룬은 힘들게 오러를 만들어 내 테우펠 공작에게 날렸다.
불꽃 오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지금 몸 상태로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마나참을 막아 나선 2명의 기사가 돌아오기 전 테우펠 공작의 끝을 볼 작정인 것이다.
아까처럼 상급 기사 4명이라면 몰라도 2명의 힘으로는 오러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이 쓰는 건 마법인가? 아니면 주술? 큭…”
테이룬은 입가에서 실낱같은 핏줄기가 흘러나오자 손으로 안 보이도록 닦았다.
마나참에 이어서 오러참마저 날리기에 지금 몸 상태로는 무리였던 것이다.
김검천에게 당한 상처는 쉽게 나을 게 아니었으니까.
오러참이 테우펠 공작을 지키는 기사들의 푸른 마나 플레임 소드와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근위 기사들의 검에 맺힌 마나가 서로 부딪친다 싶더니 붉은 기운으로 변해갔다.
테이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게 무슨?”
세계의 정해진 법칙에 따라 마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푸른색이었다.
테이룬도 이제껏 붉은색의 마나 따위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더 놀라운 광경은 지금부터였다.
붉은색으로 변한 두 명의 마나 플레임 소드가 불꽃 형태에서 반투명한 유리처럼 변해갔다.
검을 휘두르자 서로의 마나가 합쳐져 오러가 된 것이었다.
붉은 오러 소드가 푸른 오러참과 부딪혔다.
- 치칙.
물이 증발하는 소리와 함께 오러참이 공중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무리한 공격으로 날뛰는 마나를 다스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테이룬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원거리 형이라 위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오러는 오러. 오러를 저렇게 없앨 수 있는 건 같은 오러밖에 없는데?”
테이룬이 약해졌다는 건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시간을 끄는 모습을 강한 자의 여유라고 착각한 테우펠 공작은 대답해 주기로 했다.
“맞다. 저건 오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테우펠. 네 녀석은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것이냐.”
“그걸 알고 싶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강제로 하는 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근위 기사 4명이 사방에서 테이룬을 향해 다가섰다.
테이룬은 오러를 끌어 올리면서 내심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2명만 모여도 오러의 힘을 쓸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말은 테이룬 혼자서 2명분의 오러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자신의 목숨마저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때였다.
- 콰쾅!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성벽이 폭발했다.
터져 나간 벽에서 돌조각이 사람들을 노렸고 뿌연 돌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이용해 암살 시도를 할까 걱정된 근위 기사들은 테우펠 공작 옆으로 이동했다.
사람만 한 구멍이 뚫린 성벽 밖에서 켈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룬 경! 이쪽입니다! 만약을 위해 준비해두길 잘했군요.”
테이룬이 그 틈을 타서 움직였다.
“잘했다. 켈헴!”
눈앞에서 테이룬을 놓치게 된 테우펠 공작이 짜증을 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이 소리와 냄새, 그리고 폭발 형태로 보아 아마도 화약이라는 게 폭발한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테우펠 공작은 큰소리로 테이룬을 불렀다.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자가 등을 보이고 도망갈 셈이냐!”
“아까 말하지 않았나? 그건 더 이상 관심 없다. 이미 김검천님에게 졌으니까 그 칭호 같은 건 네가 아무에게나 넘겨주던가!”
테우펠 공작이 점차 멀어져가는 테이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테이룬! 그냥 보내줄 것 같으냐!”
주술사를 처리했을 때처럼 테우펠 공작의 손가락이 기묘하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