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김검천은 세이야의 예상대로 광선검을 휘둘렀다.
- 푹!
그런데 정작 광선검이 노린 것은 라바골렘의 잔재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암석 덩어리였다.
김검천은 그대로 광선검을 움직여 원통 모양으로 바위를 도려내었다.
그 행위로 만들어진 것은 뚜껑이 있는 돌로 된 그릇이었다.
세이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걸로 무엇을 하시게요?”
“원래 먼 곳에 왔으면 기념품을 챙겨가야 하지 않겠어? 뜨거운 건 용기에 담아야 하는 법이고.”
김검천은 바위로 된 그릇으로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용암을 담아 들었다.
라바골렘의 용암이라고 해도 힘이 다해 식어가는 중이라 돌그릇을 녹이지는 못했다.
“김검천님. 그렇게 한다고 해도 라바골렘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를 일인데요.”
“나도 그것까지는 알지 못해. 그저 붉은 돌과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챙기고 보는 것이니까. 받아라.”
김검천이 세이야에게 용암이 담긴 돌그릇을 넘겨주었다.
세이야가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먹이로는 블러드트리라도 잘라 주면 좋을까요?”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키울 생각인 거냐. 너도 확실히 보통 녀석은 아니구나.”
세이야가 말하는 걸 들으니 라바골렘의 흔적만큼은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이 보였다.
용암이 움직이던 방향으로 김검천과 세이야는 걸어가 보았다.
잠시 후 동굴의 한곳에 도착하자 벽 주위로 붉은 돌이 널려 있는 게 보였다.
세이야가 붉은 돌을 보자 비틀거렸다.
김검천이 세이야를 부축했다.
“괜찮나?”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았는데 저것에 다가갈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면 일단 동굴을 나가도록 하지.”
“저 붉은 돌을 확인하지 않고요?”
“있는 장소를 확인한 것만 해도 충분해. 돌에는 발이 없잖아? 저게 어디로 가지는 않을 거다.”
“이미 따로 챙긴 것도 있으니까 무리하지 말자는 이야기시군요.”
김검천과 세이야가 동굴 밖으로 빠져나오자 불안한 얼굴로 기다리던 데탈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발화통이 들려 있었다.
마차 주위에는 검게 그을린 수십 마리도 넘는 고블린 무리가 널려 있었고.
밖에 있던 데탈도 자신과 마차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걸 본 김검천이 말했다.
“보기보다 먹을 욕심이 많은 것 같군. 하지만 요리는 먹을 만큼만 해야지.”
“취사용으로 쓴 게 아니라 살려고 사용한 건데요?”
“말 그대로 생존 요리라는 건가.”
“아니거든요? 그보다 같이 들어간 다른 용병들은 안 보이는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두 사람을 보자 안도하던 데탈이 다시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역시 넌 몰랐던 모양이로군. 저 동굴 안은 마나를 쓸 수 없는 지역이었다.”
“설마 지부장이 저주받은 장소로 데려간 것이었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그래도 한 때 동료였다고 대놓고 죽였냐고 말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녀석들이 불러낸 라바골렘에 의해 죽었지.”
“결국 자기 손으로 자기 무덤을 판 셈이로군요.”
이곳 지부의 용병들은 데탈과는 악연으로 묶인 자들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그들을 위해서 잠시 고개를 숙인 데탈이었다.
기도를 끝낸 데탈은 김검천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여기 지부를 정리하는 것뿐이네요.”
“아니, 가능하면 그대로 유지해주었으면 해.”
“어째서입니까? 여기 용병 지부는 이제 제 기능을 못 하는데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오히려 좋아 보이지 않나? 그동안 용병 지부가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말을 듣고 보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테우펠 공작과의 일도 남아있고.”
“헉! 그건 제 선에서는 무리입니다.”
“나도 알지. 그저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나에 대한 정보를 그 녀석에게 넘기라는 말이야.”
“그 말씀은?”
데탈이 잘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아서 김검천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테우펠 공작과 좋지 않은 일로 엮었지. 이번에는 근위기사까지 박살 냈지.”
“아하, 테우펠 공작이 가만히 앉아서 웃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겠네요.”
“그러니 근위기사든 누구든 나와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계속 사람을 보내오겠지. 내가 수도로 가서 그와 해결을 볼 때까지는.”
“그러니까 용병 지부장에게 한 것처럼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데탈이 김검천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나도 할 일이 있는데 이곳을 계속 찾아올 수는 없거든. 그러니 날 보고 싶으면 예전 자유의 마을이었던 장소로 찾아오라고 해.”
“그게 마물의 숲을 헤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네요. 그래도 그들이 제 말을 들어줄까요?”
“믿게 해줘야지. 용병 지부에 있던 근위 기사, 죽지는 않았을 거다. 그 녀석을 네가 치료해줘.”
“그러면 적어도 제가 그들에게 해가 될 사람은 아니라고 인식되겠군요. 돌려보내는 방도는요?”
데탈의 시선이 마차에 머물렀다.
김검천이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이걸 구한다고 이 고생을 했는데. 거기다 수리해야 하니 가져갈 생각이야.”
“그러면 어떻게 수도로 되돌려 보낸다는 말입니까?”
“설마 용병 지부장도 가지고 있는 마차를 근위 기사가 되어서 못 얻어낼까?”
“그건 그러네요. 이 영지에 용병 길드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필요하다면 연락하는 것도 잊지 말고. 테우펠 공작에게도.”
“그쪽은 왜요?”
“지금 상황을 알려주면 꽤 즐거워할 거 같거든.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해줘야지?”
***
김검천이 이야기했던 대로 근위기사는 테우펠 공작에게 돌아갈 수는 있었다.
수도로 올라오는 중간에 그가 몇 번 죽을 뻔한 건 테우펠 공작에게는 흥밋거리도 되지 않았지만.
테우펠 공작은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중인 것이다.
머리와 어깨에 피가 잔뜩 새는 붕대를 잔뜩 감고 있는 근위기사를 보고서도 참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김검천이라는 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는 거냐? 시킨 일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데다가?”
테우펠 공작도 데탈인가 뭔가 하는 용병의 연락을 받기 전만 해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일이 다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근위기사 한 명만 용병 지부장에게 동행시킨 건 어디까지나 정찰을 보낸 셈이었으니까.
물론 운이 좋아 단번에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엉망진창이 돼 버린 근위기사의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근위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반격을 할 틈도 없었기에 이렇게 된 것이니까요.”
“고작해야 그런 변명으로 이해해 달라는 거냐? 뚫린 것이 입이기는 한가 보구나.”
“하지만 제 실력을 못 낸 건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검도 제대로 못 휘두른 채 잡혀버렸으니까요.”
근위기사가 변명을 하면 할수록 테우펠 공작의 눈은 싸늘해져 갔다.
곁에 호위 중인 다른 근위기사들의 표정도 굳어갔고.
잘못을 했다면 일단 고개부터 숙이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상대가 상대인 만큼 더욱 그랬다.
“아하, 우리 근위기사께서는 기습 공격 때문에 별것도 아닌 김검천에게 당하고 오셨다는 건가?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근위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한마디씩 했다.
“같은 근위기사로서 부끄럽습니다.”
“테우펠 재상님 덕에 강해진 몸으로 저런 소리를 다 하다니요.”
“저 같았으면 지는 순간 얼굴을 들고 돌아올 생각은 못 했을 겁니다.”
붕대를 감은 근위기사가 동료 근위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한심함을 탓하는 테우펠 공작보다 동료들이 더 미웠다.
테우펠 공작 앞이지만 근위기사는 이 말 만큼은 하고 싶었다.
“쳇, 네 녀석들이 갔다고 해서 달라질 거 같으냐? 혼자서는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어!”
“뭐라고?”
“말 다 했냐?”
“진 녀석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변명은?”
점점 감정싸움이 되어가는 걸 본 테우펠 공작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들 그만! 묻지 않은 말에는 입을 다물어라!”
그제야 근위기사들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틈을 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테우펠 재상님. 뭔가 일이 잘 안 풀리시는 듯합니다.”
테우펠 공작이 고개를 돌려보니 제국에서 온 치료사가 원래 거기 있었다는 듯 서 있었다.
마치 어디선가 솟아난 것처럼 은밀하게 말이다.
근위 기사들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기에 테우펠 공작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치료사, 넌 제국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사람이 항상 말처럼 행동할 수도 없고요.”
“비공식적이라면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 분명 눈에는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정도는 관대히 봐주시지요. 여기저기 치료할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건 제 소임이니까요.”
“치료할 곳이라고?”
“김검천인가 하는 자 때문에 테우펠 재상님의 마음이 아프신 것 같아서 찾아온 겁니다.”
“호오, 사람의 마음을 치료할 정도로 네 실력이 좋던가? 하긴 머릿속을 바꿔버리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테우펠 공작은 치료사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였다.
국왕을 치료사의 힘으로 자기 입맛대로 바뀐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국왕처럼 되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렇기에 필요한 일이 끝난 이후로는 가능한 치료사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치료사가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하시는군요. 전 다만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러 온 것뿐입니다.”
“이 몸을 도와주겠다고? 일개 치료사 따위가 말이냐.”
자존심 높은 테우펠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치료사가 능력이 있다는 건 국왕의 일을 끝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게 된 일이었다.
다만 치료사 따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일국의 재상인 자신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다니.
국왕의 일로 도움을 받은 것도 제국에서 치료사를 보낸 사람을 봐서 넘어간 것이었다.
거기다 그 대가로 제국과 진행 중인 일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네가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면 도움 같은 것도 받지 않았을 것이었다. 알고 있나?”
치료사가 그런 테우펠 공작의 태도를 보면서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말씀은 제가 아닌 격에 맞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라면 받겠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렇다면?”
“저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치료사입니다. 그러니 싸우는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거든요.”
“흥, 너 같은 녀석이 평범하다는 말을 입에 담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치료사가 다 죽었나 보지?”
“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보다 이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치료사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기둥 너머로 붉은 마갑의 기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갑에는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얼굴에 부상이라도 입었는지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고.
치료사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 제국에서 특별히 모셔왔지요. 마스터 나이트들 중 한 분, 킬만님이십니다.”
- 챙!
호위를 서던 근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 중에는 테우펠 공작에게 욕을 먹던 근위 기사도 끼어 있었다.
순식간에 형성된 마나 플레임 소드가 제국의 마스터 나이트를 향했다.
“어떻게 제국의 마스터 나이트가 이 자리에?”
“저 치료사가 한 짓인가?”
“아니면 마나로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가.”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