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미 며칠을 굶은 근위 기사 대장은 데탈이라는 용병이 말한 걸 떠올렸다.
식량이나 식수를 영지에서 자유의 마을까지 왕복할 분량 정도만 챙겨가도 되겠냐고.
기사들 말고 전문적인 짐꾼이라도 데려가라는 말도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던 근위 기사 대장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턱짓 한 번으로 탁자 가득히 음식이 차려지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심지어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에서도 먹을 게 떨어진 적이 없었다.
고급 식재료가 아니라서 데려온 요리사가 만든 음식 맛에 투덜거리긴 했어도.
“그런데 이게 뭔가? 이럴 줄 알았다면 보급품을 좀 더 챙겨 오는 것인데.”
근위 기사 대장의 눈에는 정말로 바닥에 나 있는 잡초를 뜯어 먹는 기사가 보였다.
심지어 흙도 입에 먹는 기사도 있었다.
“잡초다! 먹을 것이야!”
“저기 봐. 얘 흙 먹어.”
“먹을 수 있는 흙이면 이쪽도 나눠줘!”
근위 기사들이 굶은 건 어제부터였지만 일반 기사들은 3일 전부터 굶었으니까.
조금 남았던 식량과 식수를 근위 기사들만 먹어치운 것이다.
더구나 물을 이틀째 못 마셔서 주변을 정찰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괴물이라도 잡아먹을 기세였다.
잡초마저 못 찾은 기사 한 명이 움푹 들어간 눈으로 근위 기사 대장에게 말했다.
“근위대장님.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파요. 특히 목이 말라 죽을 거 같습니다.”
수도에서는 번쩍거리던 기사의 갑옷이 이제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회색 외투 같아 보였다.
씻을 수 없었기에 기사의 몸에서는 지독한 냄새마저 풍겨왔다.
기사가 마실 식수도 없는데 씻을 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웃기게도 근위 기사들만은 3일 전까지만 해도 망토에 남은 식수를 부어 몸을 씻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깨끗한 근위 기사 대장이 다가오는 기사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면 거기서 죽던가.”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보다 함정 준비는 완벽하지?”
“그건 도착하자마자 시작해 어제 끝난 일이니 이제 사냥감이 오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알았으니 더 이상 다가오지나 마라. 냄새가 나니까.”
상관의 명령 아닌 명령에 기사가 주춤거리다 용기를 내 물었다.
이렇게라도 불만을 늘어놓지 않으면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이라도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위대장님. 왜 저희들을 근위 기사들과 다르게 대하십니까?”
“다르게 대한 것 없다. 어차피 모두 테우펠 공작님의 명령에 따르는 몸 아닌가?”
배가 고픈 데다가 갈증까지 겹친 기사가 발끈했다.
차별을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없다고 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여기까지 짐을 짊어온 것은 기사들입니다. 근위 기사들은 자기 장비만 챙기면 되었지요. 거기다 며칠 전부터 기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도 근위 기사들에게 상납해야 했습니다.”
“너는 한 번도 그런 일을 안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기사들은 병사들에게 어떻게 대하지?”
“기사는 병사들의 지휘와 전투를 위해 가능한 전투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근위 기사들도 마찬가지. 너희들을 전투에 도움이 될 거라고 데려온 건 아니다.”
데려온 기사들은 가장 실력자라고 해보았자 중급 정도의 수준이었다.
못해도 상급 기사에 달하는 근위 기사들과는 전투력부터가 달랐다.
근위 기사 두어 명만 나서도 기사들을 다 처리할 수 있었다.
화가 나 눈이 돌아가려는 기사가 이성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차별은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저희는 같은 기사 아닙니까?”
“차별은 아니지. 계급과 실력에 따라 대우가 다른 것뿐이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말조심해라. 너희는 지금 임무 수행 중이니 현장에서 바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거다.”
“그러면 잠시 영지로 돌아갈 수나 있게 해주십시오. 어차피 보급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근위 기사 대장이 잠시 갈등했다.
솔직히 보급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반쯤은 오기였다.
아무 성과도 없는데 테우펠 공작의 명령을 어겨가며 영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당연하지만 먹고 마실 게 하나도 없는 상태로 앞으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근위 기사들을 그나마 나았지만 나머지 기사들은 배고픔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마나는 신체를 강화해주는 것일 뿐 생존할 수 있는 에너지마저 해결해 주는 건 아니었다.
근위 기사 대장도 별다른 수가 없기에 동의하려는데 기사의 당당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 자신의 말대로 영지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는 모습이었다.
머리로는 기사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그 말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위 기사 대장은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여기서 놈이 올 때까지 끝까지 버티도록 한다.”
“근위대장님?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기가 찬 기사가 근위 기사 대장에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스윽.
기사의 목 위로 근위 기사 대장의 검이 올라왔다.
근위 기사 대장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원래 명령이란 부조리한 거지. 임무 수행 중 명령 불복종은 죽어도 할 말 없는 행동이다.”
마침내 폭발한 기사가 마을 전체에 울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젠장! 싸워서 죽는 것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서서히 굶어 죽자니! 지금이 영지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마지막 경고다.”
“경고든 뭐든 우리를 이끄는 당신이 제정신이라면 그런 명령은 말도 안 된다고!”
그렇게 소리치는 와중에도 뭔가 불안함을 느꼈지만 기사도 나름대로 생각은 있었다.
안 그래도 다투는 소리에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모두 이곳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문제는 모든 기사들의 공통된 불만이었으니 대화 내용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공개적으로 항의하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 그냥 넘어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기사의 착각에 불과했다.
하급자에게 무시당해 자존심이 상한 근위 기사 대장은 생각보다도 더 미친 짓을 했다.
- 서걱.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기사의 목이 베어져 나갔다.
그곳에 있는 기사들 전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근위 기사들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을 뿐이었다.
근위 기사들은 테우펠 공작 덕에 전보다 강해지기는 했지만 그만큼 참을성이 줄어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들 중에서도 근위 기사 대장의 성격이 여간 더러운 게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근위 기사 대장 또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극도로 민감해진 상태였다.
원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방금 죽은 기사의 행동이 하극상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다만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일도 지금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근위 기사 대장은 주변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피에 굶주린 자나 지을 수 있는 잔인한 미소였다.
“또 명령에 불만 있는 자가 있나? 죽고 싶다면 나와라.”
- 투둑.
검 끝에서 기사를 베고 묻어 나온 피가 지면으로 흘러내렸다.
죽은 기사와 가까운 동료 한 명이 눈을 뒤집은 채 근위 기사 대장에게 덤벼들었다.
“여기도 있다! 어디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미 부하 기사를 죽인 참이었다.
거기에 한 명 정도 더해진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기에 검이 허공을 갈랐다.
- 쓰윽.
근위 기사 대장이 휘두른 검에 기사가 목부터 가슴까지 마갑채로 잘려나갔다.
기사를 벤 검에는 붉은 피가, 근위 기사 대장의 눈에는 빨간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솟구친 피를 보니 상쾌한 느낌이 들어 근위 기사 대장은 흐뭇한 미소가 지었다.
멍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씩 아무 말 없이 검을 빼 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건 그들의 지휘자도 기사도 아니었다.
그저 한 마리의 미친 살인귀일 뿐.
기사들의 눈에는 적을 보는 듯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걸 본 근위 기사 대장은 오히려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솟구쳐 오르는 살육의 쾌감에 그는 이쯤에서 손을 멈추는 대신 최후의 선을 넘기로 했다.
“다 죽여!”
피를 보자 기다리고 있던 근위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그 뒤로 일어난 건 기사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일뿐이었다.
달려든 기사들 중에서 겁에 질려 도주하던 자들도 있었지만 근위 기사들이 끝까지 쫓아갔다.
잠시 후 현장을 정리한 근위 기사들이 근위 기사 대장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주위에서 움직이는 대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다 죽어버리자 그제야 제정신을 찾은 근위 기사가 근위 기사 대장에게 물었다.
“대장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근위 기사 대장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기사의 시체에 마른 침을 뱉었다.
입안이 건조해 침도 제대로 뱉기 힘들었기에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긴. 김검천이라는 놈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해야겠지. 변명도 될 테고.”
“무슨 변명 말입니까?”
“기사들이 다 죽었잖아. 이것보다 영지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이유가 어디 있겠나?”
“아! 김검천과 싸우다 기사들이 죽었으니 전력 정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영지로 가야겠지요.”
“김검천의 흔적도 찾을 수 없어서 손가락만 빨다가 돌아가는 것보다는 체면이 서지 않나?”
“기왕이면 김검천이라는 놈도 우리와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고 할까요?”
“그것 좋은 생각이구나. 어차피 우리 손에 죽을 놈 아닌가? 그 정도 거짓말은 괜찮겠지.”
“그러면 바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근위 기사가 밝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기사들만 불쌍하게 된 상황이었다.
대화에 끼어드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내 허락도 없이? 날 보러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누구냐!”
근위 기사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검천이 있었다.
빨리 오려면 올 수 있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온 참이었다.
어차피 좋은 일로 만날 상대는 아니었으니 고생 좀 해보라는 의도도 있었다.
그 결과가 눈앞에 벌어진 참상이었다.
김검천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혹시 여기 죽어 있는 자들은 너희와 같은 편 같아 보이는데. 맞나?”
근위 기사 대장이 대답했다.
“흥! 감히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불손한 무리들을 처단했을 뿐이다. 그보다 네 놈이 김검천이더냐!”
“지금 같은 시기에 여기까지 올 사람이 나밖에 더 있을까.”
“왜 이제야 온 것이냐! 우리가 언제 여기에 도착한 줄 알기나 하는가!”
“그걸 나에게 따지는 이유가 뭐지?”
“그거야 네 놈이 여기서 보자고 했으니까!”
“아, 그거. 하긴 내가 이곳에서 만나자고는 했었지. 그런데 언제 보자고 한 적이 있었던가?”
근위 기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다고 없던 기억이 새로 생겨날 리는 없었지만.
근위 기사 대장도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없… 없다. 그 데탈이라는 용병은 너와 만날 장소만 이야기했었지.”
“그 말대로 너희들이 미리 여기 도착한 거라고. 그건 그렇고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데우펠 재상님의 명령으로 네 녀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긴 했지. 그건 왜 묻는 거지?”
“며칠 늦은 걸로 서로 살육전을 벌일 정도라면 조금은 일찍 와주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닥쳐라! 이 모든 일이 다 네가 늦게 와서 생긴 참사란 말이다!”
사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김검천을 생각하지 못하고 보급에 소홀히 한 게 문제였지만.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이봐.”
“뭐냐!”
“너 나 죽이러 온 거 맞지? 그런 상대에게 뭘 바라면 안 되지. 내가 해주면 또 모를까?”
“오냐! 원하는 대로 죽여주도록 하마!”
“원하는 대로? 거절하면 날 안 죽이고 그냥 돌아가려고? 너무 상냥해서 눈물이 날 정도네.”
“크아악! 이놈이!”
반쯤은 진심이 담긴 김검천의 말에 근위 기사 대장의 눈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