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김검천이 미리내에게 말했다.
“녀석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
[추락하는 순간 그의 신체로부터 급격한 변화가 감지되긴 했습니다.]
“하긴 혈석 같은 걸 날 걸로 먹고 나서 멀쩡할 리가 없지. 식중독이라도 걸린 모양이로군.”
[그러면 혈석은 구워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게 야외에서의 필요한 최저한의 요리법이거든. 특히 이상한 걸 먹을 때는 필수라고.”
[언젠가는 한 번쯤 드시겠다는 말로 들리는 걸 착각일까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어쩌다 그런 것도 한 번쯤은 먹어 볼지 모르는 게 인생이지만.”
김검천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살펴보려고 다가가는 중에 이상한 게 눈에 보였다.
거리를 좁혀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근위 기사 대장의 몸은 점점 작아지고 있던 것이다.
마침내 혈석으로 보이는 붉은 돌이 되었다 싶더니 검은 연기와 함께 증발해 버렸다.
근위 기사 대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은 지면에 약간 고인 붉은 액체뿐이었다.
그나마도 흙으로 흡수되어 사라져버렸고.
미리내가 물었다.
[혈석을 사용할 거라고 쿠퍼에게 맡기셨지요? 저걸 보시고도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혈석이라는 게 저 정도까지 불량식품인 줄은 몰랐거든. 그래도 시도는 해볼 거야.”
[저런 것에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육체마저 없어질 거 같습니다.]
김검천이 한때는 근위 기사 대장이라고 불렸던 젖은 지면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내가 저렇게 무식하게 혈석을 사용할 것 같아?”
[직접 혈석을 먹는 것은 뭐라고 하셔도 절대로 반대입니다.]
“나도 저걸 보고 먹을 정도로 다급하지는 않거든? 먹지 말고 파워드슈츠에 양보할 거야.”
파워드슈츠의 에너지 반응로에서 빛이 저절로 깜빡거렸다.
자신도 그런 건 싫다는 듯이.
***
함선으로 귀환해 잠시 쉬고 있자니 쿠퍼가 웃으며 다가왔다
혈석에 관련된 일에 대한 피로 때문인지 눈 밑에 그늘이 져 있는 게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김검천이 쿠퍼에게 말했다.
“혈석 때문인지 얼굴이 말이 아니군. 잠을 제대로 자기라도 한 건가?”
“문제없습니다. 기한을 맞추기 위해서 수면 시간을 조금 줄이기는 했지요.”
“건강까지 상해가며 할 필요는 없어.”
“제가 원해서 한 거니까 괜찮습니다. 강제로 시키셨으면 오히려 느긋하게 했을 거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로군. 웃는 걸 보니 결과도 좋은 것 같고.”
“미리내의 도움이 컸습니다.”
“미리내가?”
미리내가 김검천에게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쿠퍼를 위해 제 AI의 기능 일부를 함선에 남겨두고 갔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결과를 내려고 가상공간에서 혈석에 대한 실험을 시도한 건가?”
[예. 얻어낼 수 있는 불완전한 데이터는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요.]
“네 연산 기능으로 불필요한 중간 과정을 단축하는 건 잘한 일이지. 그러니 쿠퍼가 이렇게 결과를 낸 모양이니까.”
“저, 김검천님.”
“왜 그러지? 쿠퍼.”
“그런데 정말로 혈석을 사용해가면서 차단문을 여실 생각입니까?
김검천이 쿠퍼를 보니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요리를 했다면 배가 부르더라도 성의를 봐서 조금 맛은 봐야 하지 않겠어?
“이건 요리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적어도 요리는 먹고 위험에 처하지는 않습니다.”
“요리 재료에 따라 다르겠지. 그냥 놔둘 수는 없다는 면에서는 마찬가지고. 그 고생을 하고 구해온 걸 버리는 건 아깝지. 쿠퍼, 너도 힘들게 만든 걸 그냥 버리고 싶은가?”
“차라리 제가 대신 파워드슈츠를 입고서 혈석을 사용하겠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 일에 가장 적합한 건 나야. 무엇보다도 난 혈석 따위로 죽지 않아.”
자신이 넘치는 김검천의 태도에 쿠퍼가 한 걸음 물러섰다.
하긴 어떤 위험이라도 닥쳐온다고 해도 김검천은 이겨낼 것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말이 나왔으니 당장 해보도록 하지. 이런 건 뒤로 미루면 하지 싫어지는 법이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쿠퍼가 물러서자 미리내가 물었다.
[근위 기사 대장 이야기는 쿠퍼에게 안 하실 겁니까?]
“그건 나중에 혈석을 사용해 본 다음에 하도록 하지.”
[쿠퍼도 그렇지만 저도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김검천 함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 문 열다가 힘이 다해 죽은 함장으로 함선 기록에 남을 생각은 없거든.”
[여기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그 기록을 본다면 10,000년 뒤에도 화제가 되겠군요.]
“그게 싫어서라도 절대로 살아남을 생각이거든.”
얼마 후 쿠퍼가 달려와 김검천에게 알렸다.
“무기고에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쿠퍼에게도 출입 권한을 임시로 내준 상태였기에 거기 파워드슈츠의 정비는 가능했다.
파워드슈츠의 사용 권한은 아직 없긴 했지만.
김검천이 무기고로 들어가 기계 팔 위에 올려진 파워드슈츠를 향해 몸을 돌렸다.
- 키잉.
기계 팔이 움직이며 가슴부터 발끝까지 파워드슈츠의 부품을 하나씩 장착시켜 나갔다.
파워드슈츠 장착이 끝나자 그 위로 비즈릴 판과 그것으로 감싸인 혈석이 부착되었다.
가슴 부분에 부착된 혈석의 모습은 새로운 미래를 부여해줄 것만 같이 보였다.
아니면 현재 누리고 있는 일상을 파괴하든지.
김검천이 움직이자 함선 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김검천이 다음 구역 차단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시스템 체크.”
[95%까지 출력 안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쿠퍼가 고생한 게 제대로 된 숫자로 나타나는군. 그런데 나머지 5%는?”
[아쉽게도 혈석 성분 분석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임상시험을 할 대상도 없었고요.]
“그래도 복권보다는 당첨 확률이 훨씬 높은데. 내가 역사에 남을지 말지 여러 가지로 궁금해지네.”
[마석이 연동되면 성공 확률 5% 미만으로 저하됩니다. 정말로 시도하실 작정입니까?]
“이미 결정한 일이야. 10,000년 뒤에도 역사에 기록되려면 이 정도는 해봐야겠지. 시작해.”
결정이 내려졌으니 미리내는 김검천을 말리는 대신 파워드슈츠의 제어에 집중했다.
[외장 파츠 접합. 마석 에너지 증폭. 출력 상승합니다.]
마석과 결합되자 하얗게 백열하던 에너지 반응로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비즈릴 판이 마나의 영향을 받아 파랗게 물들어갔다.
김검천이 차단문을 꽉 주며 자세를 잡았다.
[혈석 기동. 마석 결합.]
“증폭 최대로.”
- 끼아악.
혈석으로부터 비명 같은 이상한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심장 부근에 장착해둔 혈석으로부터 붉은색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석과 혈석의 빛이 전신을 휘감은 상태로 김검천은 차단문을 잡아당겼다.
“이얍!”
사람들이 홀린 듯이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마석과 혈석의 빛이 서로 어울린 김검천의 모습은 마치 하늘의 태양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광경에 쿠퍼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이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검천님은 그저 빛이야.”
“저분은 빛이 필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빛을 뿜어내시고 있군요.”
리에와 댕댕이는 재미있다는 듯 주위에 비치는 붉고 푸른빛을 향해 손을 내젓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둘이 허공을 만질 때마다 빛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갔다.
- 파캉.
상호 증폭되어 넘쳐나는 에너지에 못 이겨 먼저 비즈릴 판이 깨져나갔다.
비즈릴 판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에너지에 파워드슈츠가 폭발할 듯이 부풀어 올랐고.
그래도 혈석을 사용한 보람은 있는지 차단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긴 했다.
겨우 주먹만 한 틈이 생겼을 때였다.
붉은빛이 점점 줄어들더니 고정해 둔 혈석이 녹아내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혈석은 마석이 뿜어내는 힘을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마나에 굶주린 라바골렘이 폭주했을 때와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미리내가 경고했다.
[김검천 함장님. 혈석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문은 아직 다 안 열렸어! 현재 상태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나?”
[안됩니다. 거기에 더해 증폭된 출력도 점점 불안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김검천은 열린 틈으로 차단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현재 쓸 수 있는 모든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순순히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겨우 주먹만 해진 크기의 틈새로는 리에도 못 지나갈 정도였다.
마석의 힘을 탐하던 혈석은 이제 파워드슈츠 안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몇십 초 후면 혈석은 파워드슈츠가 아니라 김검천 함장님을 잡아먹을 겁니다. 대피를!]
“몇만 년 뒤의 역사에도 남을 좋을 기회를 놓치라고?”
[여유 부릴 때가 아닙니다!]
그때 김검천의 눈빛이 반짝였다.
일행 중에는 사람이 아닌 존재도 있지 않은가.
아직 식사 전이었는지 마침 지금은 손바닥만 한 크기이기도 했다.
“세이야! 댕댕이를 저 너머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긴장하던 세이야가 급히 댕댕이를 집어 차단문 너머로 넘겼다.
댕댕이가 공중제비를 돌며 다음 차단문 구역으로 떨어져 내렸다.
“긴급 회피!”
[긴급 회피 모드 가동.]
- 푸학.
파워드슈츠의 모든 부위가 개방되며 김검천이 튕겨 나왔다.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 성공한 김검천은 급히 파워드슈츠를 살펴보았다.
혈석은 파워드슈츠를 절반 정도 덮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파워드슈츠에 멈추지 않고 함선까지 퍼질 기세였다.
실제로 함선 환풍구를 통해 넘어가려는지 벽에 붙으려는 모습을 본 김검천이 명령했다.
“미리내. 파워드슈츠 전기능 중지. 그리고 에너지 공급을 끊어!”
[기능 중지. 혈석 잠식 속도 둔화. 하지만 혈석에 의한 잠식 자체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마석으로 증폭된 잔류 마나가 아직 남아있는 건가? 다른 방도는?
[제힘으로는 더 이상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즉시 이 구역을 포기하시고 대피를 권합니다.]
“…분명 혈석은 마나라는 에너지가 있어야 움직이는 모양이었지? 그러면 그걸 없애 버리면!”
[무엇을 시도하실 작정이십니까? 이 구역을 포기하시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아니, 아직 저 혈석이 덩치를 불리기 전에 처리하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야. 이런 걸 그냥 놔두면 함선을 포기해야 할 사태가 될지도 모르니까.”
김검천이 자신의 한 팔을 파워드슈츠의 에너지 반응로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거기다 문제가 생겼다고 이대로 끝낼 거면 시작도 안 했어! 1차 문양 비상 개방!”
김검천의 손등으로 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비상 개방으로 인한 나노 머신 강제 기동. 설마 스스로 몸을 던져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지 한번 보자고.”
살아 있는 생명체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파워드슈츠를 지나 함선 내부로 퍼져나가려던 혈석은 진행 방향을 바꾸었다.
혈석의 뻗어 나간 부위가 파워드슈츠에 돌아오더니 김검천의 팔을 집어삼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