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지켜보고 있던 쿠퍼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움직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물체가 움직였으니 깜짝 놀란 것이다.
- 위이잉.
기동음과 함께 배틀 머신의 흉부 장갑이 닫히면서 그대로 김검천을 삼켜버렸다.
잠시 주춤했던 쿠퍼가 급히 해머를 찾아와 다시 쥐면서 외쳤다.
눈앞의 강철거인이 무섭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눈앞에서 김검천이 사라진 게 더 두려웠다.
“김검천님! 설마 배틀 머신이라는 것에 잡혀 먹히신 겁니까! 제발 대답해 주십시오!”
배틀 머신 안에서 시스템을 기동시키던 김검천이 외부 스피커를 열 다음 대답했다.
“진정해. 배틀 머신에 탑승한 것뿐이니까. 이건 육식 같은 건 안 즐기는 종류거든.”
[그렇다고 채식만 즐기는 취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요.]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배틀 머신에 혀라도 달아줘야겠는데. 맛이라도 볼 수 있도록.”
김검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만 들리니 유령이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인간 사냥꾼의 머리를 깨며 미친 듯이 날뛸 때와는 달리 이런 쪽은 약해 보이는 쿠퍼였다.
쿠퍼는 안 보이는 김검천의 모습을 찾기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탑승이라고요?”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위험하니 배틀 머신으로부터 좀 떨어지라고. 미리내. 충전율은?”
김검천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배틀 머신의 조정석 부위였다.
조정석에서 뿜어져 나온 은색으로 빛나는 나뭇가지 같은 줄기가 김검천과 연결되어 있었다.
파워드슈츠의 에너지 반응로에서 나오는 빛의 입자들을 이용해서 말이다.
[현재 충전율 7%.]
“방치해둔 사이에 에너지 팩에 있던 게 많이 방전되었나 본데.”
[말씀하셨듯이 어디까지나 배틀 머신의 에너지 팩은 비상용으로 쓰는 거니까요.]
“장비가 좋아질수록 필요한 에너지가 많아지니 항상 아쉽단 말이지.”
[장비의 화력이 더 증가할수록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긴 하지. 그러면 테스트도 겸해서 슬슬 움직여 볼까나.”
김검천이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따라 배틀 머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철컹. 철컹. 쿵.
10미터는 될 듯한 배틀 머신이 발을 떼자 쿠퍼가 약간 공중에 떠올랐다.
배틀 머신이 움직일 때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중심을 잡아야 할 정도인 것이다.
수만 킬로에 해당되는 배틀 머신의 중량을 바로 옆에서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진동이 줄어들자 쿠퍼가 고개를 들어보았다.
근처에서 보자니 배틀 머신의 다리 쪽에 시선이 막혀 머리 부분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중에서는 큰 편에 해당되는 쿠퍼지만 배틀 머신과 비교하면 무릎에도 닿지 않았다.
쿠퍼가 감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배틀 머신?”
배틀 머신의 얼굴이 쿠퍼 쪽으로 향했다.
김검천이 쿠퍼를 바라보자 배틀 머신도 행동에 맞춰서 따라 한 것이었다.
“어떤가? 쿠퍼.”
“크고…아름다워요. 정말 멋진 놈입니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겠는데요.”
“그 정도는 아니야. 들어가는 에너지만큼 시간이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까.”
잠시 걸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던 배틀 머신이 함선 벽에 등을 대고 섰다.
- 위이잉.
배틀 머신의 흉부 장갑이 열리며 김검천이 나왔다.
김검천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10미터 정도 높이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반중력 장치를 이용해 내려섰기에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가벼운 착지였다.
쿠퍼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거 오늘은 계속해서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는데요? 방금 전에 그건 뭡니까?”
“반중력장치로 중력을 무효화시킨 거야. 그러고 보니 쿠퍼는 이동식 원반을 아직 못 받았었지. 나중에 넘겨주도록 하지.”
“세이야에게 준 물건인데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뺏어서 줄 게 아니야. 이 구역을 찾아보면 새 이동식 원반이 있을 테니 그걸 준다는 거야.”
“그런 거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보다 저렇게 배틀 머신을 세워두셔도 되겠습니까?”
“저게 쓰러질 것 같아서 신경 쓰이는 건가? 괜찮아. 원래 저렇게 세워두는 녀석이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저렇게 세워두면 정비하거나 사용하는데 머리가 아플 거 같아서요.”
김검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처음 군에 들어와 배틀 머신을 보았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눕혀 두면 바로 탑승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세워두는지를.
“원래는 세워두는 게 더 편해. 에너지가 제대로 공급돼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잘 봐.”
“예?”
김검천이 세워둔 배틀 머신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김검천의 손등으로부터 인장이 빛나고 있었다.
“1차 인장 강제 해방. 머신 융합.”
말이 떨어지자 배틀 머신의 어깨 부근부터 한쪽 팔이 떨어지더니 김검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 쉬익!
“으헉!”
쿠퍼는 자기보다도 2배는 될듯한 금속 팔이 김검천을 향해 날아오는 걸 보자 기겁을 했다.
더욱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당장이라도 깔아뭉갤 것 같던 배틀 머신의 일부가 김검천의 팔에 그대로 결합된 것이다.
몸에 장착된 배틀 머신의 팔을 움직여 보던 김검천이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위관급 파워드슈츠의 출력만으로 이걸 마음대로 움직이기에는 좀 무겁군.”
쿠퍼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급히 물었다.
금방이라도 깔려 버릴 듯한 상황이었는데 배틀 머신이 팔에 장착된 것이다.
“김검천님. 그건 또 어떻게 된 겁니까?”
“배틀 머신 사용법 중 하나야. 탑승 안 해도 배틀 머신의 힘을 쓸 수 있다면 유용하겠지?”
“하긴 지금처럼 불러올 수 있다면 굳이 저기까지 열심히 올라갈 필요도 없겠군요.”
“그렇다고 마구 쓸 수는 없어. 어디까지나 위급 상황에서 쓰는 방법이거든.”
“그냥 부르기만 해도 몸에 저절로 장착되는 데 편하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그냥 쓰겠는데요.”
“나 정도 되니까 하는 거지. 이걸 받아내려면 반중력 장치에 팔의 각도를 잘 맞춰야 하거든.”
“그렇게 어렵습니까? 옆에서 보기에는 간단해 보였거든요.”
“쿠퍼. 네가 나 대신 배틀 머신의 팔을 받으려고 들었다면 아까 어떻게 될 것 같나?”
“뭐, 그거야….”
쿠퍼가 자신이 배틀 머신을 호출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멋지게 손을 들며 외치는 자신과 배틀 머신이 결합하려는 순간이었다.
날아드는 배틀 머신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해 그대로 깔려 버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뭇한 표정이었다가 죽을상으로 변하는 쿠퍼의 얼굴에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어때? 자칫하면 팔에 깔려서 납작해질 것 같지? 실제로도 많이 일어났던 사고거든. 혹시 해보고 싶으면 말만 하라고.”
“무슨 말씀을. 저 같으면 그냥 배틀 머신의 탑승구까지 성실히 올라가는 걸 택하겠습니다.”
“안전제일이라는 거군.”
“몸이 멀쩡해야 다른 일도 할 테니까요. 그런데 돌려보낼 때도 그런 식으로 보냅니까?”
“아까처럼 해도 되는데 에너지가 제법 소요되는 만큼 보통 때는 이렇게 하지.”
김검천이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돌아다니던 무인 장비들이 다가오더니 파워드슈츠로부터 기계 팔을 뽑아냈다.
뽑아낸 파츠를 들고 무인 장비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도로 배틀 머신에게 팔을 달았다.
쿠퍼가 물었다.
“어라? 저 녀석들 배틀 머신의 수리도 할 수 있는 겁니까?”
“저건 수리라기 보다 그냥 가져다 붙인 것뿐이니까. 방금 보았듯이 배틀 머신은 분리가 가능한 물건이거든.”
“그냥 조립하듯이 끼워 넣은 거란 말씀이군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 자세한 과정은 우리가 알 필요가 있을까?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그러네요. 알아도 쓸 때가 없으니까 말이지요.”
쿠퍼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파워드슈츠는 몰라도 저런 크기의 배틀 머신은 자신이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쓸모없어진다는 건 좋은 기분이 아닌 것이다.
쿠퍼가 기운이 없어진 걸 눈치를 챈 김검천이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쿠퍼, 배틀 머신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파워드슈츠는 써야 해. 거기다 이 세계의 물품을 다루는 데는 네가 없으면 누가 도와주겠어?”
그 한마디에 쿠퍼가 기운을 차렸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지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배틀 머신 다음 차단문 여는 것에도 쓸 수 있겠는데요.”
“유감스럽지만 그렇게는 사용할 수 없어.”
“왜 그렇습니까?”
“함선 내에서는 배틀 머신의 출력이 제한당하거든. 사고 방지를 위해 부여된 기능 같아.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차단문을 잡고 열 만한 크기도 아니고.”
“하긴 배틀 머신의 크기로 보면 제대로 잡고 힘을 줄 수도 없겠네요.”
“그래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해. 나중에 활용할 방도가 있나 고민할 가치는 있겠어.”
그때 쿠퍼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구슬 같은 걸 꺼내 들었다.
무인 장비를 내려치기 전 획득한 물건이었다.
“아차, 여러 가지 일이 생겨서 깜빡했는데 이것도 저 무인 장비처럼 뭔가 쓰임새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미리내가 대답했다.
[그건 중계형 드론입니다. 통신이나 수색 범위를 넓혀주는 장비지요.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그게 부전원실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어 무인 장비들이 움직일 때 이것도 움직이더라고.”
김검천이 중계형 드론을 넘겨받으며 말했다.
“무인 장비를 대하는 반응을 보니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겠군. 이것도 망치로 후려친 건가?”
“갑자기 날아들어서 저도 모르게 공격했는데 그 바람에 고장이라도 난 겁니까?”
쿠퍼가 김검천의 눈치를 보았다.
중계형 드론을 살펴보던 김검천이 한 곳을 길게 눌렀다.
- 부웅.
중계형 드론에 빛이 들어오더니 공중으로 떠오르며 사람들의 주위를 돌았다.
다행히 고장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손바닥에 들어갈 정도로 크기가 작으니 망치에 빗맞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수도에 있는 프리와 연락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마침 잘 되었군.”
“역시 수도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실 생각이시군요.”
“문제의 원인은 테우펠 공작이지. 즉 테우펠 공작만 때려잡으면 모든 일은 해결되는 거야.”
“전혀 조용히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재상이자 왕의 대리인 테우펠 공작이 상대라고요.”
“그렇다고 마물의 숲에 움츠리고 평생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들키지 않게 처리할 필요가 있어.”
“테우펠 공작이 중간에 도망가면 곤란할 테니 은밀히 움직일 필요는 있겠네요.”
“그쪽은 내가 바로 쳐들어간다고 해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그 정도 되는 권력자라면 그게 더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김검천님에게 한 대 맞는 순간 뼈저리게 느끼겠군요. 진작 도망가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요.”
“맞으면 후회할 시간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준비도 필요하고.”
김검천이 손을 들자 중계형 드론이 밖으로 날아갔다.
적당한 지점에 자리 잡으면 수도에 있는 프리와 연락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김검천이 사라져가는 중계형 드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왕위 양보를 위한 일을 한창 진행 중이겠지? 나와 내 사람을 건드렸는데 그냥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다른 문제 해결법은 없을까요?”
“문제의 해결책은 역시 원인을 파괴하는 게 최선이지.”
“갑자기 테우펠 공작이 불쌍해지는 건 제 기분 탓이겠지요?”
***
테우펠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보고 받은 내용도 그랬지만 돌연히 기분이 나빠진 것도 한몫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테우펠 공작의 눈치를 보던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오늘 호위 책임을 맡게 되어 테우펠 공작에게 보고를 하게 된 것을 원망하면서.
“말씀드렸다시피 김검천이라는 녀석을 잡으려고 보낸 근위대장 및 근위 기사들이 모두 전멸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그들이면 마스터 나이트 두 사람을 이기지는 못해도 감당할 정도의 전력이라는 말이다!”
“저야 연락받은 대로 보고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됐다. 넌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입도 열지 말고 그냥 사라져라.”
테우펠 공작의 살기 어린 어조에도 기사가 눈치 없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짜증이 난 테우펠 공작이 손으로 기사를 가리켰다.
어차피 저런 자들은 주위에 쓰레기만큼이나 넘쳐났다.
“입을 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도 도대체 들어먹지를 않는군. 됐다. 넌 필요 없다.”
“억? 이게 뭐지? 테우펠 재상님? 살려주십시오!”
늪처럼 변한 바닥 밑에 끌려간 기사는 잠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우펠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처리하기 전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오라고 할 것을.”
잠시 불만을 늘어놓던 테우펠 공작이 텅 빈 공간을 노려보았다.
“나와라.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이 몸이 모를 줄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