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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으로 귀환해서 이세계 최강-76화 (76/250)

76화

테우펠 공작의 말이 끝나도 텅 빈 공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테우펠 공작이 입꼬리를 비틀며 손을 기묘하게 움직였다.

“기분 탓이었나?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니 손장난을 친다 해도 문제 될 건 없겠지.”

손의 움직임에 맞춰 주변의 벽과 바닥이 서서히 일그러져나갔다.

공간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이게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성격도 급하십니다.”

- 화르륵.

방 안의 마법등이 깜빡거리더니 순간적으로 어둠이 찾아왔다.

다시 밝아지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싶더니 제국의 치료사가 나타났다.

그가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 테우펠 공작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성격 급한 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그리고 거기에 맞추는 건 너희들이 할 일이야.”

“요즘 들어 일이 잘 안 풀려서 성격이 더 급해지신 거 같아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겁니다.”

“잘 안 풀리다니?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뿐이다.”

“국왕에 대한 일을 논하게 될 귀족 회의와 제국과 벌어질 일만큼은 제대로 진행 중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지금 진행하는 일과 김검천에게 근위 기사들이 당한 것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너무 안일하신 것 아닙니까?”

“뭣이?”

선을 넘은 것 같은 발언에 테우펠 공작이 발끈했다.

치료사는 두 팔을 들어 올려 적의가 없다고 표현하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그 김검천이라는 자가 수도로 올라와 테우펠 재상님을 노린다면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테우펠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근위 기사들을 처리한 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찾아와 이 몸을 노린다는 말이냐?”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반역자가 되는 거지. 본인은 이 나라의 재상이자 왕을 대신해 국가를 움직이는 몸이니까.”

“뭔가 단어 선택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만.”

“무엇이 말인가?”

“반역자는 여기 국민일 때나 해당되는 것이지요. 김검천이라는 자는 마물의 숲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럴듯하군.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테우펠 공작이 눈앞의 치료사가 김검천이라도 되는 듯 살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본인을 노리는 자는 누구든지 간에 용서하지 않는다. 설령 그게 너희들이라고 할지라도.”

치료사가 보일 듯 말듯한 의미 불명의 미소를 지었다.

“설마 김검천이라는 자를 제국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사람 일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저번만 해도 제국에서 마스터 나이트까지 불러올 줄은 생각도 못 했지.”

“순수한 호의에서 시도했지만 왜곡되어 뜻이 전달된 모양입니다.”

“말하는 거야 쉽지. 뭐, 계약대로는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개입은 용서하지 않겠다.”

치료사가 긍정이라고 하듯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습니다. 테우펠 재상님. 정말 저희들의 힘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까?”

테우펠 공작이 딱 잘라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러면 다음에 뵐 때는 다른 입장으로 만날지도 모르겠군요. 앞으로 이쪽은 알아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했나? 그건 용납하지 않겠다. 잠깐…”

말을 끝낸 치료사가 고개를 들었다.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흰자위 하나 없는 붉은 눈.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치료사의 모습에 테우펠 공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치료사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테우펠 공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놈들과는 이 정도에서 손을 끊기를 잘한 것 같군. 적어도 이 몸은 인간이기는 하단 말이지. 아니, 어쩌면 거기서 거기인가?”

뭔가 넣어둔 가슴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던 테우펠 공작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직접 문을 열고 나가더니 문 주위에서 경비를 서던 자들에게 명령했다.

“거기 너희들, 왕실 마법사를 불러오너라!”

얼마 후 왕실 마법사가 달려와 테우펠 공작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자리에 앉은 테우펠 공작이 거만하게 그를 맞았다.

“부르셨습니까. 테우펠 재상님.”

“그렇다. 너에게 맡긴 혈석들의 상태에 대해 듣고 싶다.”

왕실 마법사는 왕의 옆에서 조언자 역할이라 형식상 지위만큼은 테우펠과 맞먹는 자였다.

왕이나 그 후계자에게나 머리를 숙여야 했지 재상에게 굽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마법사가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는 눈치가 없거나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는 있어도 머리가 나쁠 수는 없었다.

왕실에서 일하는 만큼 협조를 구하는 일이 있으니 다른 마법사보다는 눈치도 있어야 했다.

그런 만큼 왕실 마법사는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테우펠 공작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건 테우펠을 차기 왕으로 인정한다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이미 왕으로 보고 있던가.

그런 테우펠 공작 앞이니 왕실 마법사가 망설이다 대답했다.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점차 다룰 수 있는 상태가 되어갑니다.”

“아직도?”

“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수급되는 인간의 숫자가 적었습니다. 그만큼 혈석의 조정도 힘들어지고 있고요.”

“너에게 듣고자 하는 건 힘들다는 게 아니다.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만 말해라.”

“됩니다! 왕위 계승에 대해 논할 대귀족 회의 전에는 무조건 될 겁니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 대답이 나왔군. 잘 기억해라. 네가 왕실 마법사로 일하게 된 이유를.”

“물론입니다. 어떻게 그걸 잊겠습니까. 제가 겪은 그 굴욕을!”

왕실 마법사가 이를 악물었다.

물론 테우펠 공작은 그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야.”

“물론입니다. 저는 마법 도구처럼 맡은 일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니까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그러면 나가는 길에 왕실 호위 책임자… 아니, 그는 방금 전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부책임자라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왕실 마법사가 자리를 뜨자 테우펠 공작이 중얼거렸다.

“저 녀석도 이제 쓸모가 없어져 가는가? 뭐, 근위 기사들도 그렇고 왕이 될 때까지만 버텨주면 그만이야. 제대로 된 혈석만 있으면 그 정도 녀석들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오늘은 왕실 경비 책임자도 없고 호위 책임자도 없는 날이었다.

그들을 대신해 불려오게 된 호위 부책임자에게 테우펠 공작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현재 수도의 경비는 어떻게 하고 있지?”

“각지에서 대귀족들이 집결하고 있기에 평상시보다 치안에 신경 쓰고 있는 중입니다. 시민들도 나아진 치안에 테우펠 재상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경비에 신경 쓰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건 오해입니다. 수도 경비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해? 지금 네가 이 몸의 판단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테우펠 공작의 말소리가 커졌다.

왕실 호위 부책임자의 이마로 식은땀이 맺혔다.

괜히 수도 경비 책임자에 대해 변명을 해주다가 자신이 죽어 나갈 판국이었다.

“헉!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수도 경비 책임자에게 있는 겁니다!”

“당연한 말을. 그러니 수도 경비 책임자에게 알려라. 지금부터 수도에 들어오는 자에 대해서 신분 확인을 철저히 하라고. 만약 신분이 불분명한 자를 통과시킬 경우에는 그 죄를 묻겠다고. 알겠나?”

“명령하신 대로 신분이 불분명하거나 범죄자들은 절대로 수도에 들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아, 부책임자, 너 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왕실 호위 부책임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사죄의 말을 했다.

테우펠 공작이 짜증을 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제부터 네가 왕실 호위 책임자라고 알려주려던 거다.”

“영광입니다! 목숨을 바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실 호위 책임자가 된 그는 아부한 게 먹혔다고 착각한 채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나섰다.

전 왕실 호위 책임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기분이 안 들었을 테지만.

호위 부책임자가 물러나자 테우펠 공작이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결코 그 치료사 놈이 말한 김검천이라는 녀석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게 아니야. 그저 귀족 회의가 끝나고 왕위 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걸 확실히 해두려고 그러는 것뿐이라고.”

김검천의 얼굴을 정확히 알았다면 수배서를 배포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붙잡도록 할 텐데.

테우펠 공작은 그런 생각이 든 걸 깨닫자 깜짝 놀랐다.

뭐가 무섭다고 김검천이라는 자를 그렇게까지 처리하려 드는가.

설마 자신은 김검천이라는 자를 겁내고 있는 것인가.

***

김검천은 테우펠 공작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건 아직 그는 모를 일이었다.

수도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검사를 받던 상인을 향해 경비병이 말했다.

“안 돼. 돌아가. 안 봐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벌써 몇 년이고 봐온 사이 아닙니까? 평소에는 그냥 넘어가 주셨으면서.”

경비병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무슨 헛소리야? 널 언제 보았다고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고! 신분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과장된 경비병의 행동에 상인이 뭔가 알아챈 듯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헤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가는 게 없었습니다. 이거 별 것 아니지만 마음의 양식이 될 겁니다.”

경비병은 저절로 눈이 가는 주머니를 보려고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까 말한 걸 못 들었나? 신분증을 제출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단호한 경비병의 말에 상인이 울상을 짓더니 비슷한 주머니 하나를 더 꺼냈다.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동료분들과도 이런 즐거움을 같이 나눠야겠지요?”

“으으, 안 된다니까.”

상인이 떨리는 손으로 다른 주머니 하나를 보여주었다.

“아이고, 생각해보니 윗분께 인사도 드려야지요? 그런데 더 이상 드리면 저도 망합니다요.”

“크흑…”

경비병이 고개를 돌려 선임 경비병의 눈치를 보았다.

선임 경비병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했다.

뒤에서는 이번 근무 책임자인 중급 기사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경비병이 상인을 힘껏 밀어내며 단호히 외쳤다.

“너야말로 계속 이런 짓을 하려 들면 체포하겠다. 꺼지기나 해! 다음!”

그 와중에 상인이 꺼내든 주머니는 다 챙긴 경비병이었다.

상인이 허탈한 얼굴로 돌아가는 걸 보자 지나가던 행인이 동료에게 말했다.

“저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경비병들이 자기 본분을 다하기 위해 각성이라도 한 건가?”

“각성은 무슨. 그런 놈들이 돈주머니만 챙기겠냐? 위에서 지시라도 내려온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제법 군기가 들어있는데. 꽤 높으신 분의 명령인가 보군.”

그 말대로 테우펠 공작의 명령이 내려진 이후로 수도 경비대는 철저한 검문을 요구받았다.

수도 경비대 책임자가 직접 나서며 원칙을 강요했던 것이다.

경비병이 행인들의 말을 들으며 인상을 구겼다.

그도 매번 용돈을 쥐여주는 상인들을 이렇게 구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경비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뒤에 비슷한 크기의 커다란 짐을 끌고 오는 마차를 본 것이었다.

마차의 겉 부분이 괴물들의 체액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니 꽤 험난한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마부석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자가 앉아 있었지만 말이 끌고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저런 마차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에 경비병은 앞서 상인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공손히 말을 꺼냈다.

“신분 확인을 위해 마차의 창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창을 내리자 마차 안에서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김검천과 세이야가 수도에 도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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