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들이 숨어 있는 비밀장소는 회의실의 바닥에 은밀하게 만들어진 좁은 방이었다.
작은 방이라지만 각종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서 마법에 탐지되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 테이룬의 인도에 따라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도 찾기 힘든 장소인 데다 그 위에 회의실 탁자가 있어서 더욱 발견하기 힘들었다.
사람이 들어가야 했기에 거기를 만든 사람이 성의 위아래 층 높이를 조정한다고 고생했다.
그런 정성이 들어간 장소에서 김검천이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들었다.
미리 약속해둔 수신호였기에 미리내가 대기 중인 명령 시행을 끝냈다.
[내부 방음 모드, 외부 청음 모드 기동 완료. 이제 큰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김검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다들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큰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말해도 문제없다.”
세이야가 물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의 말은 들을 수 있는데 저들은 우리 말소리를 못 듣는다니 신기하네요.”
“간단히 말하면 미리내가 청취한 저들의 대화를 증폭시켜 줘서 듣는 게 가능한 거다.”
“우리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건요?”
“실드를 조종해 주변을 막은 거고. 소리라는 건 공기의 진동이라고 할 수 있거든. 그러니 공간 자체를 막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아, 완전히 이해했어요.”
김검천은 세이야의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함께 있는 테이룬도 세이야와 같은 수준으로 이해했기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으니까.
켈헴은 이 자리에 없었는데 다른 비밀통로를 통해 외부 벽에 화약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만약을 위해 대비 중이었는데 해본 적이 있는 켈헴이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힘든 일은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법이었다.
김검천은 켈헴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다시 관심을 돌렸다.
“하긴 내가 몇 마디 했다고 너희들이 그걸 단번에 이해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그래서 원활한 대화를 위해 세이야에게 지식 주입기를 사용한 게 아니던가.
김검천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용하는 입장이기도 했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테이룬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테우펠이 저기에 있는듯하니 바로 뛰쳐나가면서 오러를 한 방 먹이면 끝나지 않을까?”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실패 확률이 있어 보여. 적어도 한방에는 못 끝낼 거 같네. 그의 주변을 보라고.”
테이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마치 머리 위가 보이는 듯이 말하는군. 여기서 보이는 거라고는 벽밖에 없는데.”
“난 지금 미리내의 도움으로 석벽 너머를 보고 있는 중이지.”
“우리는? 혼자만 보다니.”
“나의 관대한 이해심으로 상황을 대신 말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뭐가 말이지?”
“성으로 잠입했을 때를 떠올려 봐. 기사와 병사들의 배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나?”
김검천의 말에 테이룬이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는 길이 오히려 경비가 삼엄했지. 기사들과 병사들이 배치된 방향은 들어오는 자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모양이겠지. 들어올 때는 자유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는 건가.”
“테우펠에게는 그게 최선인지도 모르지. 일이 잘못되면 불러온 병력 중 누가 배신을 할지 모르니까. 반대도 마찬가지니 귀족들도 불안하겠지만. 그보다 테우펠의 호위는?”
“그의 곁에 근위 기사로 보이는 자 2명뿐이야.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건가.”
“테우펠 본인도 뭔가 숨겨진 힘이 있는 것 같으니까.”
“어떤 힘이?”
“무슨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벽에서 사람을 꺼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시동어가 없었다.”
“마법 양피지 같은 도구를 쓴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마나의 극에 달해 오러를 다루는 테이룬의 말이었다.
그런 사람의 감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김검천 또한 비슷한 일들을 겪어 보았기에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만약을 대비해야겠군. 일단 저들의 대화를 들으며 테우펠을 노릴 절호의 기회를 노려보도록 하지.”
“너무 시간 끌면 곤란해.”
“시간을 끌고 싶어도 못 끌걸. 아까 실드로 공간을 차단했다는 했었지. 그 말은 숨 쉴 수 있는 공기량도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라고.”
“오래 여기 있으면 호흡을 못 하게 된다는 거잖아. 너는 정말?”
“저들을 잠시 지켜볼 정도 시간은 있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라고.”
김검천이 테이룬을 다독이는 사이 귀족들도 본격적으로 회의에 진입한 참이었다.
“올해에 거둬들인 세금은…”
“마탑의 건설은…”
“제국과의 외교는…”
회의 진행 중 제국의 이야기가 나오자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테우펠 공작이 침묵을 깼다.
“다들 제국과의 일에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귀족들 중에서 수장 역할을 맡고 있는 백발의 노귀족이 대꾸했다.
“당연한 것 아니겠소? 제국에게는 어떤 트집도 잡히기 싫은 게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노귀족은 테우펠 공작을 힐끗 보았다.
테우펠 공작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예전부터 말하긴 했지만 그러니 이 몸이 왕이 된다면 당신들도 좋고 본인도 좋다는 거요. 당신들은 어떤 책임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을 테니까.”
“테우펠 재상, 당신이 모든 것을 책임질 거라는 말이요?”
“왕만 된다면!”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사실 테우펠 공작이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그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왕이라는 건 절대 권력자라는 단어와 똑같았다.
책임을 지기는 싫지만 권력은 누리고 싶은 귀족들이 선뜻 결정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본 테우펠 공작이 한숨을 쉬며 도발했다.
“한심하기는. 아직도 결정하기 힘든가? 그동안 얼마나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노귀족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테우펠 공작이 일국의 재상이라고 할지라도 자신 또한 대귀족들을 대표하는 수장이었다.
테우펠 공작에게 하대를 들을 위치는 아닌 것이다.
“테우펠 재상. 말이 심하군. 이런 일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가.”
“쉽게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줘 볼까나?”
어느새 말이 짧아진 테우펠 공작이 등을 보이고 있던 자기 옆의 좌석을 돌렸다.
“헉!”
“저분은?”
귀족들이 숨을 삼켰다.
사람을 가릴 정도로 큰 테우펠 공작의 의장 자리에는 국왕이 앉아 있었다.
왜 테우펠 공작이 안 앉고 서 있나 했더니 국왕이 이미 그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국왕의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다.
“국왕 전하?”
“중병으로 병석에 누워 계시던 게 아니었던가?”
“듣자 하니 모든 의사들이 포기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다고 하시던데 이런 자리에?”
귀족들이 다들 한 마디씩 의혹이 담긴 말을 내뱉었다.
시체가 움직인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국왕은 병약한 모습이었다.
모습과는 다르게 국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뚜렷했다.
“들어라. 이 나라의 왕위는 테우펠 재상에게 넘기도록 한다.”
몇 마디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모여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느닷없는 국왕의 출현에 소란스럽던 대회의실이 한순간에 조용해 졌으니까.
귀족들의 그런 모습을 본 테우펠 공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들 똑똑히 들으셨을 거요. 국왕 전하께서 직접 이 테우펠에게 왕위를 양보하겠다는 말씀을.”
왕이 이 자리에 나타난 건 상상 밖의 일이었다.
테우펠 공작을 차기 왕으로 지목한 건 예상외의 일이었고.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귀족들로서는 국왕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노귀족이 방금 전 국왕의 발언에서 아직 충격에서 못 벗어났는지 더듬거렸다.
“국… 국왕 전하. 진심으로 테우펠 공작에게 왕위를 이양한다고 하신 겁니까? 뭔가 잘못 말하신 게 아니신지?”
노귀족의 말에 대답한 건 왕이 아니라 테우펠 공작이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들은 말이요. 굳이 대답하실 필요가 있겠소?”
“하긴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귀족 대대회의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씀하셨는데 농담일 리는 없을 테지만….”
귀족들이 서로 수군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생긴 마른 귀족 한 명이 손을 내저었다.
호위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무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국왕 전하의 용태를 확인 좀 해봐도 되겠소?”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분이 국왕 전하인 것을 못 믿겠다는 건가.”
“돌아가셨다고 생각이 이 자리에 위치해 계시니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구려.”
테우펠 공작이 다른 귀족들을 살펴보니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흥, 이제 와서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거기다 다들 미리 이야기가 된 부분인 것 같군.”
“재상께서는 그렇게 보이오? 이런 때니까 모두 마음이 통했을 뿐일 거요.”
노귀족이 턱짓을 하자 호위 기사 2명이 테우펠 공작에게 마법 도구를 내밀었다.
하나는 순수 혈통 검사기였고 다른 하나는 양피지로 된 마법 스크롤이었다.
테우펠 공작이 노귀족에게 물었다.
“마법 문자로 적힌 걸 보니 마법 해제 스크롤인 거 같은데 맞소?”
“그렇다오. 뭔가 걸리는 게 없다면 스크롤을 사용해도 상관없을 거라고 믿소. 테우펠 재상.”
“당연한 말을. 그저 확인차 물어보았을 뿐이요.”
테우펠 공작은 바로 국왕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호위 기사들이 하는 일에 어떤 참견이나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듯이.
그걸 승낙 신호로 받아들인 호위 기사 2명이 들고 있던 마법 도구를 사용했다.
마법 해제 스크롤이 찢어지자 국왕의 몸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국왕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고도 국왕의 신체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순수 혈통 검사기를 들고 있던 호위 기사도 확인을 끝냈는지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검사기의 반응을 보아 푸른 피를 가지신 고귀한 분이 맞습니다.”
“마법 해제 스크롤을 사용했지만 마법에 걸린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마법 해제 스크롤로는 치료사가 건 세뇌가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
괜히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아닌 것이다.
기사들의 답변에 굳게 다물린 테우펠 공작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모두 들으셨지요? 이걸로 모두가 확신했을 거라고 믿소. 이 테우펠이 명분과 실리, 모두를 충족시키는 유일한 왕위 계승자임을 말입니다.”
귀족들이 저마다 속삭였다.
이미 그들도 오기 전 그들끼리 비밀리에 만나 대략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했다.
“왕족이 모두 죽었으니 우리들 중에 한 명이 왕위에 오르기는 해야지 않겠소?”
“제국과의 일도 있고 하니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귀족들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은 별로 없겠지요.”
“국왕 전하의 말씀까지 있으셨으니 테우펠 공작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분란이 가장 적겠지요?”
자신의 말이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아서 테우펠 공작은 품속에서 마법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테우펠 공작을 왕으로 모시는 데 찬성한다는 내용만이 적혀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노귀족 앞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귀족들의 수장이신 당신부터 모범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게 뭐요?”
“다들 이 자리에서 본인이 왕위에 오르는 걸 찬성한다는 걸 서명해주기를 원해서지요.”
“당신도 귀족이면서 고귀한 귀족들이 한 입으로 다른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노귀족의 말에 테우펠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귀족인 만큼 같은 귀족들의 생리를 모를 것 같소?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딴소리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까 전 당신들이 먼저 마법 스크롤을 썼다는 걸 기억해 주시오.”
“크흠. 그거야 살다 보면 사정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
“바로 그거요. 그러니 여기서 확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 아니겠소?”
혹시나 싶어 노귀족과 다른 귀족들이 모두 마법 양피지를 확인해 보았다.
서명한 본인을 확인하는 용도 외에는 아무런 속임수도 없는 마법 양피지였다.
별문제 없다는 걸 확인하자 대회의실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서명했다.
테우펠 공작이 서명한 내용을 살펴본 후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협조에 감사드리오. 본인이 왕이 된다면 전적으로 살아남은 귀족들과 협조를 아끼지 않겠소.”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테우펠 공작은 왕권을 강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한 것이다.
노귀족은 테우펠 공작의 말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방금 뭐라고 했소? 살아남은 귀족들이라니?”
“아, 이건 마지막 안건으로 말하려고 했지만 서명도 받았으니 지금 말하도록 하지요. 왕이 되었으니 대관식을 올려야 하지 않겠소?”
“초월 존재에게 고하는 행위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오.”
“그날 모두가 모인 앞에서 제국과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요. 그러니 살아남으라는 거요.”
“뭐라고 했소! 제국과의 전쟁!”
여태까지 여유가 있어 보이던 노귀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왕이 되면 제국과 싸우겠다니?”
“물론 제정신이지. 이제 왕이 될 몸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로 곤란하지 않겠소?”
“아직은 왕이 아니라는 걸 알아 두셨으면 하오.”
“물론이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제국에 대한 것을 같이 의논하려고 했지. 태도를 보니 이야기가 안 통할 것 같지만.”
일이 잘 풀려 가는가 싶던 테우펠 공작과 귀족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다.
이건 마치 테우펠 공작이 일부러 귀족들을 도발하는 모양새였다.
상황을 전달받던 테이룬이 김검천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 같은데. 거기다 슬슬 숨이 막히는 느낌이거든.”
“잠깐만. 켈헴이 지금쯤 시작할 모양이거든.”
켈헴에게 넘긴 군용폰으로부터 보낸 신호가 전해진 것이다.
화약을 터트리겠다는 신호였다.
원래는 김검천이 연락한다면 터트리기로 했는데 뭔가 일이 꼬인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쾅!
“어억?”
“이게 뭐지?”
회의실에 있던 모든 귀족들의 얼굴이 변했다.
귀족들과 동행한 호위 기사들이 주위를 살피며 검 자루에 손을 얹고 공격에 대비했다.
바깥에서 폭발음과 함께 대회의실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