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폭발의 원인은 테우펠 공작을 향해 날아드는 테이룬의 오러였다.
오러가 사냥감을 포착하려는 순간 테우펠 공작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오러를 날린 테이룬은 테우펠 공작을 찾기보다는 국왕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막 손이 닿으려는 순간 국왕마저 테우펠 공작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테이룬이 눈앞에서 공기처럼 놓쳐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야말로 코폴드 판이군.”
테이룬과 세이야의 뒤를 지키며 비밀 공간에서 나온 김검천이 말을 받았다.
“코폴드한테 사과해.”
“어째서?”
“코폴드보다 더한 놈들이니까.”
“그건 그렇군. 갑자기 코폴드에게 미안해지는데.”
“지켜보는 게 좋다고 했잖아. 약간만 더 저들이 신경을 분산시켰으면 성공했을지도 몰라.”
오러를 유지한 채로 주변을 살피던 테이룬이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테우펠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귀가 썩어 버릴 것 같았다.”
“나도 그 말에는 동감이다. 사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뛰쳐나갔을지도 모를 정도였거든.”
귀족들이 생각하기에 지옥에서 초월 존재라도 만난 기분일 것이다.
귀족들이 테이룬을 보며 환호했다.
“아니, 저분은 테이룬 경?”
“왕국 최강의 기사가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우리는 살았어! 제 역할도 못 하는 기사와는 달리 테이룬 경이라면 우리를 구해주실 거야!”
테이룬이 귀족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놈들을 구하려 나타난 게 아니다. 방금 전만 해도 테우펠에게 달라붙어 왕권을 내주려고 했던 자들이 할 말이 있다는 건가!”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원래 국왕파였던 테이룬과 자신들은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테우펠 공작 대신해 그가 자신들에게 검을 휘두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주제를 파악한 귀족들이 조용해지자 테이룬이 김검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켈헴은 이곳 대회의실을 폭파하기로 하지 않았나? 다른 곳을 터트린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쪽에서 방해가 들어온 모양이야.”
“하긴 화약이 터진 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나름 대비를 한 거였나. 켈헴은 이걸 각오하고 행동한 거였군.”
“주의는 끌었으니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야. 그도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한 셈이군.”
“당연하다. 그는 어엿한 근위 기사니까.”
“켈헴을 인정하고 있었나?”
“당연하다. 다만 아직 갈 길이 멀어서 엄하게 대하고 있는 것뿐이야.”
“켈헴이 들으면 기뻐하겠는데. 그런 건 직접 말해주라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줄 생각이다.”
그걸 듣자 테이룬에게 잡힌 켈헴이 강해지기 위한 훈련에 끌려간 모습이 떠올랐다.
강해질 거 같긴 하지만 지옥을 맛볼 것 같았다.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는 말로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테이룬. 저기를.”
“이쪽도 방금 알아챘다. 이제야 나타나셨군.”
김검천이 가리키는 방향에 테우펠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테우펠 공작이 입을 열었다.
“흥, 비밀장소에라도 숨어 있었던 건가. 테이룬 경.”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국왕 전하에게 특별히 들은 장소지.”
“특별한 곳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단 말인가?”
“쥐도 쥐 나름이겠지. 기사의 푸른 이빨은 날카롭다고. 각오해라. 테우펠.”
“성미도 급하군. 잠시 인사라도 하고 나서… 으헉?”
- 타타탕.
테우펠 공작이 말을 하다가 기겁을 하며 검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김검천이 아무 말 없이 테우펠 공작을 향해 암건을 쏘았기 때문이었다.
화가 난 테우펠 공작이 벽 속에서 나오며 김검천에게 소리쳤다.
“갑자기 뭐하는 짓거리냐!”
“왜 그렇게 놀라지? 가볍게 인사를 했을 뿐인데.”
“그게 인사라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몸도 죽을 뻔했다고!”
“네 명복을 비는 인사였거든. 그건 그렇고 바로 피한 걸 보니 이게 뭔지 알고 있었나?”
“근위 기사들을 통해 그런 무기를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렇군. 네가 김검천이로구나.”
“이거 일국의 재상님께서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영광이로군.”
“죽어 준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테지만.”
“못 해줄 것도 없지.”
무슨 속셈인지는 알 수 없었던 테우펠 공작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더냐?”
김검천이 관대한 마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물론이지. 네가 먼저 어떻게 하는지 시범을 보여준다면 못 해줄 것도 없다고.”
“사람을 놀리다니!”
“아니, 반의반 정도는 진심인데?”
“그 나머지는 농담이란 말 아닌가!”
김검천에게서 시선을 돌린 테우펠 공작이 테이룬에게 말했다.
“테이룬 경. 미리 말해두지만 이 몸이 죽는다면 국왕 또한 죽는다는 걸 알아둬라.”
“…국왕 전하의 죽음은 이미 각오한 바다. 전에 너를 포함해 국왕 전하까지 공격을 한 걸 기억해라.”
“그런 것치고는 미련이 남아서인지 방금 전에도 국왕을 구하려고 움직이지 않았는가?”
“손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시도했을 뿐이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은 분이야.”
말은 그랬지만 막상 국왕이 인질이 된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김검천은 주의를 돌리기 위해 테우펠 공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테우펠. 하나 물어봐도 될까?”
테우펠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몸은 네 친구가 아니다. 테우펠 재상님이라고 불러라.”
김검천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만약 국왕 전하를 구해낸다고 해도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어차피 돌아가실 분이었잖아?”
“너처럼 눈치 빠른 녀석은 정말 싫군.”
“너와 마음이 통하는 구석도 있는데? 나도 네가 싫어.”
“이 무례한 자가!”
테우펠 공작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등 뒤의 벽에서 소환된 붉은 오러의 창이 김검천을 향해 튀어나왔다.
“김검천님!”
주변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세이야가 광선검으로 붉은 창을 튕겨냈다.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김검천이 도움을 주기 위해 움직인 세이야를 칭찬했다.
“잘했다. 이제 꽤 조작이 능숙해졌어. 이 정도면 네 한 몸은 지키겠는데.”
“별말씀을요.”
첫 공격이 실패한 테우펠 공작이 이번에는 양손을 움직였다.
“너희들의 상대는 이 몸이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냐?”
테우펠 공작의 손짓에 맞춰 검은 공간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 횟수만큼이나 김검천과 테이룬의 주위로 붉은 무기들이 튀어왔다.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테이룬이 김검천에게 말했다.
“저 녀석, 저 괴상한 무기가 튀어나오는 공간은 하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지금 덮쳐오는 무기는 한두 개가 아닌데.”
“자세히 보면 검은 공간은 하나뿐이다. 양손으로 공간을 여닫는 속도가 빨라서 그런 거야.”
“공간을 빠르게 열고 닫아 공간에서 생긴 무기가 많아 보였던 거였군.”
테우펠 공작의 공격 속도가 점차 빨라지자 살아남은 귀족들이 혼란에 빠졌다.
“으악! 귀족 살려!”
“다른 귀족들은 죽어도 좋으니 본인만큼은 살아남아야 해!”
“남아있는 기사들은 뭐 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갈 수단을 만들어내라!”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던 기사들이 대답했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리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저 둘이 테우펠 공작을 견제하는 틈을 타 어떻게든 마나 소드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생겨난 정체불명의 검은 공간이 마나 소드의 마나를 먹어치웠다.
아무래도 문이나 벽에 뭔가 장치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간간히 검은 공간에서 붉은 무기가 튀어나오며 기사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문 옆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은 그렇게 반격당해 죽은 것이다.
“어떻게 방법을 내봐라!”
“살려줘!”
“기사들이라는 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놈들이야!”
테이룬이 몸을 돌리더니 아직도 못 빠져나간 귀족들을 향해 오러를 뿜어냈다.
싸움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끄러웠기에 당장이라도 날려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네 놈들은 이 자리에서 빨리 꺼지기나 해라!”
“오러다! 저 미친놈이 테우펠은 놔두고 왜 우리에게?”
“테이룬 경이 보기에는 우리나 테우펠이나 같겠지!”
“닥치고 피해!”
귀족들과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이어 테이룬의 오러참이 회의실의 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문에 나타난 검은 공간이 오러참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테이룬이 잠시 흠칫했다.
저 검은 공간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오러마저 흡수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테우펠 공작을 견제하던 김검천이 테이룬과 교대했다.
“흥미로운데. 이번에는 내가 나서 보지.”
- 키잉.
미사일 하나가 김검천의 어깨로 나타났다.
“조준하는 대로 발사.”
테이룬이 기겁을 하며 김검천과의 거리를 벌렸다.
미사일에 맞아 죽을 뻔한 기억이 아직도 몸에 생생했다.
테우펠 공작에게 공격을 받은 것도 다 김검천에게 당한 덕분 아닌가.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그런 걸 날릴 생각인가!”
“하늘이 살릴 사람은 살겠지. 저놈들도 이대로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테이룬의 반응을 본 귀족들도 난리가 났다.
최강의 기사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연약한 귀족들로서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테이룬 경도 피할 정도의 무기인가 봐!”
“으악! 피해!”
“젠장! 기사들은 우리 귀족들을 위해 몸으로 막아서기라도 해라!”
귀족들은 방 한구석에 피하자 기사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다음 생애에는 반드시 새로운 주인을 잘 만나겠다고 빌면서.
[발사합니다.]
미리내의 신호에 따라 미사일이 쏘아졌다.
하지만 미사일도 허무하게 문에 다시 생겨난 검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난리 친 귀족과 기사들은 허탈한 듯이 검은 공간을 바라볼 뿐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공격이었을 텐데 먹히지 않은 거지?”
“이제는 어떡하지? 포기 해야 하나?”
“고통 없이 죽는 게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군.”
포기한 자들과는 다르게 김검천은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미리내에게 물었다.
“검은 공간으로 쏘아진 미사일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추적 불가. 검은 공간은 물리적인 힘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예상 확률이 98%입니다.]
“잠깐만. 저 검은 공간은 닿는 부위만 흡수하는 것처럼 보이지?”
[여태까지 수집된 정보로는 그렇습니다.]
“혹시나 싶지만 만약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저 공간을 눌러버리면 어떨지 계산해봐.”
[예상 결과 도출을 위해 몇 가지 데이터가 필요해 더 많은 전투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 부분은 나와 테이룬에게 맡겨둬.”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어제 프리에게 이야기해서 미리 준비해 둔 걸 쓰면 될 것이었다.
원래 비장의 무기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었다.
테이룬과 겨루던 테우펠 공작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해 보이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하하, 보았느냐? 이 힘 앞에서는 네 녀석들의 공격 따위는 소용없다는 것을!”
“놀라운 힘이긴 하지만 그걸 쓰는 네 육체는 평범하니 널 잡으면 그만이다!”
테이룬이 오러 소드를 휘두르며 테우펠 공작을 덮쳤다.
테우펠 공작은 이번에는 몸을 피하지 않고 바로 앞에 검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테우펠 공작이 소리쳤다.
“벌써 잊었나? 이 공간은 오러도 먹어치웠다는 것을!”
그가 만들어낸 검은 공간이 테이룬의 오러 소드를 그대로 삼켰다.
테이룬이 검을 움켜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공간으로부터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테이룬의 손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테이룬의 검에 서린 오러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룬이 테우펠 공작에게 말했다.
“오러를 먹은 것처럼 나도 먹어치울 작정인가?”
“물론이다. 이렇게 잡힌 이상은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할 것이니 작별 인사나 해두지.”
“잡힌 게 아니라 잡혀준 것이라면?”
“뭐라고?”
“오러도 통하지 않는다면 피하지 못하는 거리에서 이걸 먹여주마! 오러의 불꽃이여! 적을 불태워라!”
- 화르륵.
검에 서린 푸른 오러가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 키아악!
검은 공간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괴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룬을 밀어내었다.
손을 내저으며 테우펠 공작이 공간을 통제하려고 들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러의 불꽃이 검은 공간 자체에 타격을 입힌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어느새 테우펠 공작에게 다가선 김검천이 주먹을 휘두르는 참이었다.
“테이룬만 신경 쓰면 내가 섭섭하다고?”
테이룬에게 당한 공간의 통제를 포기한 테우펠 공작이 다른 검은 공간을 등 뒤로 불러냈다.
새로 불러낸 검은 공간으로부터 아까 사라졌던 국왕이 나타나더니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검은 공간을 동시에 통제하려다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검은 공간을 한 개씩 불러냈던 것 같았다.
테우펠 공작은 국왕을 포기한 채 검은 공간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소리쳤다.
“그렇게 뻔히 보이는 주먹에 맞을 거 같으냐!”
“보고도 못 피하는 주먹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김검천의 팔 쪽 장갑 부분이 개방되며 튀어나온 노즐로부터 화염이분사되었다.
그러자 주먹이 3배는 빨라지며 사라지려는 테우펠 공작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크아악!”
아쉽게도 스치기만 한 테우펠 공작이 비명을 지르며 검은 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국왕 옆으로 세이야가 달려가 부축했다.
“국왕 전하! 무사하신가요?”
“크으윽….”
국왕의 눈이 천천히 떠지며 부축해주는 세이야에게 양손을 가져갔다.
뜨여진 국왕의 두 눈은 그저 흐릿하기만 했다.
그가 쓰고 있던 왕관으로부터 붉은빛이 번뜩이는 듯했다.
그러자 국왕의 두 손은 세이야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하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국왕 전하?”
세이야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되듯이 국왕은 세이야의 목을 졸랐다.
국왕은 테우펠 공작의 세뇌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