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크… 윽. 전하?”
숨이 막힌 세이야가 더 이상 목이 졸리기 전 급히 국왕의 양손을 붙잡았다.
파워드슈츠를 입고 있는 세이야였지만 국왕의 팔을 떼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국왕의 힘은 평범한 인간의 완력을 능가하고 있던 것이다.
다만 그렇게 증가한 힘은 육체의 내구력이 못 따라주는 것 같았다.
- 우드득.
국왕이 팔에 힘을 줄수록 피부가 찢어지며 몸속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야는 국왕의 팔을 강제로 떼어내려다가 그만 손을 멈추었다.
국왕은 자신이 발휘하는 힘조차도 감당 못 하고 있었다.
국왕을 떼어 놓으려면 그 이상의 힘을 줘야 했다.
안 그래도 다 죽어가는 국왕을 상대로 세이야는 그럴 수 없었다.
거기다 테이룬의 말에 따르면 국왕은 이제 하나뿐인 자신의 혈족 아닌가.
“세이야. 괜찮나?”
김검천과 테이룬이 세이야에게 다가갔다.
먼저 달려온 테이룬이 국왕을 강제로 떨어트리려 하는 걸 본 세이야가 급히 말했다.
“일단은요. 그리고 저분은 그냥 놔두세요.”
“무슨 소리냐? 그냥 가만히 있다가는 네가 죽는다고!”
“지금 국왕 전하의 신체는 힘만 강화된 상태라고요. 강제로 떼어내면 견디지 못하실 겁니다. 설마 이분을 죽이실 생각을 가지신 건 아니시겠지요?”
세이야의 말을 들은 테이룬은 손을 멈추었다.
테우펠 공작의 손에서 기껏 구해낸 국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의 테이룬은 세이야가 가장 우선순위였지만 그렇다고 국왕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테우펠 공작 앞에서는 상관없는 듯이 행동했지만 실제로 그럴 때가 오자 망설여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어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주마.”
“저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해볼게요.”
태연한 말과는 달리 세이야의 팔은 부들거리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국왕을 떨쳐 버릴 수도, 마음대로 하게 놔둘 수도 없는 상황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전력을 다해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힘 조절을 해 제압하는 게 더 힘든 법이다.
그때 세이야의 목 부위에서 흔들리던 목걸이의 마석이 국왕에게 닿자 푸른빛을 발했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국왕이 쓰고 있던 왕관에 닿았다.
- 치이익.
왕관으로부터 묘하게 끈적거리는 느낌이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테이룬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얼마 전에 저런 걸 본 적이 있던 김검천이 대답했다.
“저 불쾌한 붉은 연기가 이번 일의 원인 같군. 저기서 혈석의 기운이 느껴진다.”
“금지 물품이라는 혈석 말인가? 그보다 저 목걸이는 뭐기에 저런 일을 하는 건지 아나?”
“리에가 세이야에게 주었다는 것 외에는 나도 잘 몰라. 확실한 건 좋은 나쁘든 지금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다.”
국왕의 붉어졌던 눈동자가 마석의 푸른빛에 닿자 본래의 색으로 변해갔다.
평온해진 국왕의 표정에 세이야가 급히 물었다.
“국왕 전하. 혹시 제정신을 찾으신 겁니까?”
“케이론… 설마 케이론이냐? 오오, 기억 속의 얼굴과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테이룬처럼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라 세이야는 한숨을 돌렸다.
“그건 아버지 성함입니다. 전 세이야라고 합니다. 국왕 전하.”
“세이야라. 그러고 보니 테이룬에게 케이론을 찾으라고 했었지. 케이론은?”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이곳에 온 것이고요.”
“그렇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일이 기억난다. 왕실에 남은 유일한 핏줄이자 내 손자여.”
구석에 숨어서 아직 질긴 목숨을 이어가던 귀족들이 국왕의 말에 경악했다.
오늘따라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살아남은 왕족이 있었다니.”
“그것도 국왕께서 직접 공인한 왕실 직계 혈족이야. 왕위 계승 순위로 따지면 1순위라고.”
“잠깐. 그러면 테우펠 공작은 차기 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이잖아.”
“적법한 왕위 계승자가 있으니 우리가 테우펠 공작에게 써준 서명들은 쓸모없는 쓰레기지.”
“테우펠 공작 녀석. 꼴좋게 되었군.”
테이룬이 중요한 순간에 시끄럽게 떠드는 귀족들이 짜증 나는지 그쪽으로 오러참을 날렸다.
- 서걱.
아까와 상황이 달라졌는지 이번에는 검은 공간으로 방해받지 않은 오러참이었다.
오러의 힘은 회의실의 문 같은 건 잘라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테이룬의 무력시위에 겁에 질린 귀족들이 소리쳤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차도 타드리지 않았습니까! 테이룬 경!”
“앞으로 왕가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줏대 없는 귀족들의 천박한 행동에 기가 찬 테이룬이 말했다.
“헛소리 말고 너희들은 여기서 꺼지기나 해라. 싸우는 데 방해다!”
“예? 꺼지라고요? 엇, 회의실 문이 박살 난 상태야! 나갈 수 있어!”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들어 뚫려 나간 회의실 문을 보았다.
도망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어 보였다.
위험 속에 처하면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방금 했던 말과는 다르게 귀족들의 몸은 솔직했다.
“그 안 열리던 문이 드디어! 비켜!”
“이 구역에서 가장 먼저 나갈 사람은 본인이다!”
“먼저 나가면 그만이라고!”
이럴 때만큼은 마스터 나이트만큼이나 빠르게 행동하는 귀족들과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도망가든 말든 국왕은 신경 쓰지 않고 세이야에게 몰두하고 있었다.
“세이야, 넌 지금 날 죽여야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직 이 몸에 걸린 세뇌는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석의 빛으로 잠시 정신이 돌아온 것뿐이다. 당장이라도 테우펠을 향해 복종하고 싶은 이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다오.”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떻게…”
“해야 한다. 아니면 이 왕국과 국민들은 테우펠의 손안에 떨어지고 말 것이야!”
세이야가 바로 결단을 못 내리며 고민하는데 테우펠 공작이 공간을 가르며 나타났다.
두들겨 맞은 충격에서 이제야 겨우 벗어난 모양이었다.
“상급 마법 도구인 왕관의 힘을 억누르며 건 세뇌다. 그렇게 간단히 풀릴 거 같으냐!”
테우펠 공작이 나타나자 국왕의 두 눈이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붉게 변해갔다.
“세이야, 더 늦기 전에 과인을…! 차기 왕이라면 단호히 결단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저는 가족이 필요한 거지 왕 따위가 되고 싶어 온 게 아니에요!”
테이룬이 검을 으스러져라 굳게 쥔 채로 테우펠 공작을 노려보았다.
“테우펠, 너란 놈은…”
“흥, 이 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지 않나. 그래서 지금 느낌은 어떤가?”
“최고로 좋은 기분이야. 널 죽이고 싶은 생각이 넘치고 있거든. 아아, 네가 오러염으로 죽지 않고 다시 나타나 다행이다.”
“오러의 불꽃이라도 죽을 정도는 아니더군. 오히려 김검천이라는 놈의 주먹이 더 아찔했지.”
테우펠 공작의 시선이 김검천을 향했다.
이제는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테이룬보다 김검천이 더 신경 쓰이는 테우펠 공작이었다.
테이룬이 그런 테우펠 공작에게 질문했다.
“하나만 묻자. 국왕 전하가 네게 잘못한 거라도 있었던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무능력한 자가 국왕인 게 잘못이지. 이 몸이 왕이 되면 이 나라는 달라질 거다.”
“뻔뻔한 놈. 국왕 전하를 원래 상태로 돌리고 떠나라. 그러면 쫓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모든 걸 내려놓고 목숨만 부지하라고? 그렇게 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테우펠 공작의 손가락이 움직이려 들었다.
그가 끼고 있던 붉은 반지에서 희미한 빛이 번뜩이려는 순간 테이룬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기습적으로 오러섬을 발현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오러섬에 미처 공간을 열지 못한 테우펠 공작이 손가락을 잡고 비틀거렸다.
“크헉? 반지가?”
오러섬에 적중된 붉은 반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테이룬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필요했던 건 너만이 아니야. 네 검은 공간에 대해 이런 식의 대처법도 생각나더군.”
테우펠 공작의 붉은 반지가 빛날 때마다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힘의 근원이라 보이는 붉은 반지가 사라졌으니 이제 테우펠 공작도 별수 없을 것이었다.
기습 공격에 성공한 테이룬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검을 들었다.
“반지가 없어졌으니 그 검은 공간도 못 만들겠지. 마지막 경고다. 국왕 전하를 원래대로 돌려놔라!”
테우펠 공작이 자신의 한 손을 부여잡으며 비웃었다.
“무슨 수로 말이냐? 국왕을 세뇌한 건 제국의 치료사가 한 일이다.”
“뭐라고? 치료사라면…”
“너도 예전에 보았을 테지. 제국에서 왔다는 그자를.”
“설마 이 일에 제국이 끼어들었다는 건가?”
“아니라면 내가 무슨 재주로 상급 마법 도구로 보호받던 국왕의 정신을 건드릴 수 있었겠나?”
“그런 거였나. 그런데 네 녀석. 무슨 의도로 그런 이야기까지 털어놓은 거냐?”
“손은 빠르지만 이런 쪽은 둔하군. 시간을 끈 거지. 곧 죽을 자들에게 무슨 말을 못하겠나?”
테이룬이 주위를 보니 세이야와 국왕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모습을 안 보이던 사이에 회의실에 독이라도 푼 모양이었다.
잘려나갔던 회의실의 문은 어느새 검은 공간으로 막혀 있었다.
“설마 독을 풀기 위해서 시간을 끈 건가?”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밀폐된 공간에서의 독이다. 오러로 몸을 강화한 너도 버티는 게 한계일 테니 나머지 사람들이 어찌 죽을지는 뻔한 일이지.”
테이룬이 회의실을 덮고 있는 검은 공간을 향해 달려가 오러의 불꽃을 퍼부었다.
검은 공간이 흔들리는 걸 보니 오러염은 통하는 모양이었지만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검은 공간을 없애기 전에 세이야와 국왕이 무사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테이룬이 다시 몸을 돌렸다.
“검은 공간은 어떻게 다시 생성한 거지? 그 힘의 원천은 반지가 아니었나?”
“처리할 우선순위를 잘 선택했어야지. 테이룬. 반지 따위를 먼저 노리는 게 아니었어.”
테우펠 공작은 검은 공간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테이룬이 빨리 움직여도 테우펠 공작에게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완전히 검은 공간으로 사라지기 전 테우펠 공작이 상의를 잡아당겨 상체를 드러내었다.
그의 쇄골 부근에 박혀있던 혈석으로부터 붉은빛이 번뜩였다.
“속았구나. 테이룬!”
“속였구나! 테우펠!”
“하하, 반지 따위는 눈속임일 뿐! 네 일행과 같이 국왕과 사이좋게 죽어가라!”
그때 김검천이 앞으로 나섰다.
체내에서 나노 머신이 동작하고 있는 한 이 정도 독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독가스라고 해도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니 그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면 그만이야.”
“지금까지 빠져나가려고 해도 실패했으면서? 이 안에서는 오러도 안 통한다. 그런데 어떻게 나가겠다는 거지?”
“그걸 지금부터 보여주겠다는 거다. 두 눈 크게 뜨고 잘 지켜보라고.”
손을 뻗은 김검천의 손등에서 인장이 빛났다.
“1차 인장 강제 해방. 머신 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