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테우펠 공작이 치료사를 올려다보는 순간에도 그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속마음이 어떻든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테우펠 공작도 그런 치료사로부터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지만 아직 믿는 곳이 있었다.
“너희들은 아직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내가 필요할 텐데?”
“하긴 테우펠 재상님이 없다면 약조한 바가 지켜지지 않겠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걸 꼭 당신이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지요. 마지막까지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던 건 그쪽입니다.”
테우펠 공작은 발끈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었기에 더욱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네 놈 따위가 이 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냐?”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특히 지금의 테우펠 재상님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아, 이제는 재상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군요.”
“본인은 아직도 국왕 대리이자 이 나라의 재상이다!”
“국왕이 복귀하면 가장 먼저 할 것이 당신을 재상 자리에서 내쫓는 일일 텐데요.”
“네 놈….”
“그때쯤이면 재상도 공작도 아닌 반역자라는 호칭이 대신 붙어 있겠군요. 반역자 테우펠. 테우펠 재상이라 불리는 것보다 훨씬 멋진데요. 안 그렇습니까?”
반역자.
치료사의 입으로 그 말을 듣자 테우펠 공작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방금 전만 해도 왕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자신이 언제 이렇게까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말인가.
치료사와 대화한다고 잠시 잊었던 가슴의 고통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극심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다가 혈석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테우펠 공작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혈석이 남아있다. 궁정 마법사에게 맡겨 정제한 혈석만 있으면 마스터 나이트급 기사마저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여전히 재기할 저력이 남아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혈석이라는 것만 있다면요.”
“이 몸은 아직 패배한 게 아니다. 그저 적을 얕본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이상하군요.”
치료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불안한 느낌이 든 테우펠 공작이 되물었다.
“뭐가 말이지?”
“혈석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데 당신은 왜 여기서 땅을 기고 있는 겁니까?”
“테이룬의 검에 의해 망가진 혈석을 고치기만 해도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바로 저 너머에 있는 혈석들을 이용하려는 거니까요.”
“알고 있었구나. 너도 이 몸이 없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 것이야.”
“원하시는 대로 해보시도록 하시지요.”
치료사가 옆으로 걸음을 옮겨 테우펠 공작이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테우펠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까지 부축하거나 도와줄 생각도 없는 건가?”
“알아서도 잘하신다는 분 아니십니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셨다면 그때 요청했어야지요.”
속이 좁은 놈 같으니라고.
테우펠 공작은 몸을 끌면서 모퉁이를 향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슴의 혈석만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몸은 바로 회복될 것이었다.
그 후에는 바로 치료사부터 박살 낼 작정이었다.
그리고는 수도 내의 기사와 병사를 몰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왕이 돌아왔다는 걸 모르고 테우펠 공작에게 붙을 자들이 있을 테니까.
기어서 이동 중인 테우펠 공작에게 치료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혈석을 사용했어도 거느린 마스터 나이트급 기사는 4명에 불과했지요?”
“그건 목숨을 걸고 자원하겠다는 기사가 얼마 없어서 그랬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 그들을 혈석으로 강화시키는데 한계가 있던 게 아닙니까?”
“…그건 어떻게 알았지?”
“아까 묻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제가 이곳에 있는지를. 길 안내를 해준 사람이 있었거든요.”
“왕실 마법사인가? 그 배신자 놈이. 이 장소를 아는 건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밖에 없으니.”
“배신자라니요. 그와 당신은 서로 주고받는 게 있을 뿐인 계약 관계였을 텐데요. 저는 그저 필요한 것만 챙기려고 온 겁니다.”
치료사의 이상한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테우펠 공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제 손만 뻗으면 보일 혈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테우펠 공작은 예상외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붉은빛을 뿜어내며 그를 맞이해야 할 혈석들이 모두 박살 나 있었다.
혈석을 만들기 위해 모아둔 몇몇 사람들의 시체만이 주위에 널려 있는 채로.
그가 본 붉은빛은 소멸해가는 혈석의 마지막 비명이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혈석들이 다 파괴된 상태라니.”
테우펠 공작의 멍한 얼굴을 보고 치료사가 웃었다.
“후후후,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요. 그 모습만으로도 여기까지 살려서 데려온 보람이 있군요.”
“도대체 누가 저렇게 만들었는지 묻지 않았느냐!”
“제가 했는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라도? 아, 시간이 없어 대충 박살 내서 죄송합니다.”
“네가 왜? 혈석만 있다면 마스터 나이트급 기사들을 양산할 수 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치료사가 묘한 눈으로 테우펠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그 정도가 혈석에 대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겠지요.”
“마스터 나이트급을 늘린다는 게 고작 그 정도의 생각이라고?”
“박살 낸 혈석들은 그저 씨앗에 불과하니까요.”
“씨앗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혈석은 혈석일 뿐일 텐데.”
뭔가 알 듯 말 듯한 치료사의 말에 테우펠 공작이 물었다.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니라지만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들을 늘릴 수 있는 게 혈석이었다.
혈석을 이용해 계속 마스터 나이트급의 기사를 늘린다면 제국과도 싸울 수 있었다.
제국이라도 보유하고 있는 마스터 나이트의 숫자는 10명을 넘지 않았다.
오러를 사용하는 건 하늘이 내린 재능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 줘야 했으니까.
물론 혈석을 사용해 실력을 향상시킨 기사들에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러를 사용하려면 적어도 둘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문제도 아직 남아있었다.
테우펠 공작이 쓴 힘은 어쩌다 만들어진 특이한 혈석을 이용했기에 양산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혈석으로 마스터 나이트급을 수십, 수백 명 만들어낸다면 큰 결함은 아니었다.
수가 적으면 양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치료사는 세계정세마저 바꿀 수 있는 혈석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테우펠 공작의 마음이라도 알아챈 듯 치료사가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시지요. 혈석 자체를 우습게 보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한 느낌에 테우펠 공작이 움찔했다.
평상시라면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민감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너? 방금 마음속을 읽은 거냐?”
“당신을 상대로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한데요.”
“큿, 그렇게나 얼굴에 티가 나던가?”
“그야 그쪽도 혈석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데 제국이 혈석의 이용 방법에 대해 몰랐을까요?”
“그러고 보니 혈석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온 건 왕실 마법사였지. 혹시?”
“불과 몇 년 전에 그가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힘으로 당신은 후작에서 공작이, 그리고는 재상이 되어 왕이 되는 꿈을 꾸었고요.”
그 말에 테우펠 공작은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왕실 마법사는 자신을 배신한 게 아니었다.
원래부터 테우펠 공작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배신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치료사가 계속해서 변해가는 테우펠 공작의 표정을 즐기며 말했다.
“이제 감이 잡히시는 모양입니다. 당신의 왕실 마법사는 처음부터 우리 쪽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법사를 통해 혈석에 대한 정보를 흘린 건 너냐?”
“그렇지요. 물론 모든 걸 알고 있던 건 아닙니다. 전 말하자면 중간 관리자라고 할까요?”
“큭큭큭. 너도 고생이 많겠군.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닦달하고 있을 테니까.”
“중간에 끼인 자의 고충을 알아주셔서 고맙군요.”
“아무래도 좋으니까. 왜지? 혈석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이 몸을 키워준 것이냐?”
“그래야 국왕을 배신하고 왕위에 오르려고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도 그랬고요. 화려한 환상에서 깨어나면 더욱 어두운 현실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키워준 다음에는 이렇게 버릴 작정이었고?”
허탈한 얼굴의 테우펠 공작을 향해 치료사가 차갑게 웃었다.
절망에 빠진 인간은 항상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좀 더 나중의 일이었지요. 이렇게까지 쓸모가 없는 인간인 줄은 몰랐거든요. 이제 지겹군요. 끝을 내도록 하지요.”
“난 다른 하찮은 인간과는 다르다! 그냥 죽을 거 같으냐!”
테우펠 공작이 전력을 다해 손을 움직였다.
벽에 열린 검은 공간으로부터 붉은 단검이 튀어나와 치료사의 가슴에 박혔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 정도의 힘은 회복한 것이었다.
이제 손가락도 꿈쩍할 수 없게 된 테우펠 공작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된바 너라도 지옥으로 같이 가자…”
“미안하군요. 죽는 사람 소원도 못 들어줘서.”
치료사가 가슴에서 붉은 단검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테우펠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그게 이제와서 뭐가 중요합니까? 그래도 이것만큼은 칭찬하지요.”
- 푸욱.
치료사의 팔이 테우펠 공작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 무슨… 짓을?”
“일이 망했으니 이거라도 찾아가려는 겁니다. 이제 당신에게 쓸만한 건 이것뿐이니까요.”
치료사가 테우펠 공작 가슴에서 쑤셔 넣은 손을 빼자 거기에는 망가진 혈석이 들려 있었다.
“사람에게 박아 넣어도 부작용이 별로 없는 혈석은 드물거든요.”
“도… 돌려줘….”
이제 잘 들리지도 않은데 테우펠 공작은 열린 가슴을 움켜잡은 채 애원했다.
치료사의 손에 들린 혈석을 바라보면서.
치료사의 눈초리가 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혈석을 힘껏 움켜쥐었다.
“싫어.”
- 퍼석.
치료사가 들고 있던 혈석이 부서지며 그것의 파편이 테우펠 공작을 두들겼다.
기껏 얻어낸 혈석을 왜 부쉈는지에 대한 의문은 테우펠 공작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 쿵.
파편이 부서지는 순간 테우펠 공작 또한 모든 희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흐려져 가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죽기 전 환상이라도 보는 모양이었다.
“이 몸은 국왕의 자리에 올라 혈석의 힘으로 오러를 쓰는 기사들을 길러낼 것이다. 혈석을 키울 제물로 하찮은 인간들을 모을 것이야. 그리고 제국을 처리하고 대륙의 유일한 패자가 될 것이다. 오직 이 몸만이 세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야. 흐흐흐! 하하하하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우펠 공작은 숨을 거두었다.
치료사가 고개를 저었다.
“능력은 안 되는데 욕심은 많은 자의 최후라는 건 이렇군요. 한심하기는.”
그리고는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가 펴자 테우펠 공작의 망가진 혈석이 다시 나타났다.
아까 치료사가 부쉈던 건 테우펠 공작의 것이 아닌 주변을 굴러다니던 혈석의 파편이었다.
치료사는 그저 테우펠 공작의 절망한 얼굴을 보기 위해 속임수를 썼을 뿐이었다.
치료사가 아직 남아있는 것들을 파괴하면서 혈석의 재료가 되었던 사람들을 지나쳐갔다.
그러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테우펠 놈…살아서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그 소리를 들은 치료사가 고개를 숙여 발로 소리를 낸 자를 툭툭 쳤다.
이런 곳에서도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살아남은 그는 테우펠 공작에 의해 사라졌던 주술사였다.
“호오, 아직 말을 할 정도로 기력이 남은 자가 있었다니. 용병대장이 테우펠 공작에게 인간들을 데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났을 텐데.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에 제법 흥미가 생기는군요.”
테우펠 공작에게 말한 대로 주술사는 끝까지 살아남았던 것이다
치료사에게 끌려간다면 살아난다고 해도 좋은 일이 겪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치료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때마침 김검천이 나타났다.
김검천이 치료사에게 딱 잘라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연히 여기까지 왔다는 변명 같은 건 서로 하지 않기로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