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김검천을 본 치료사는 깜짝 놀랐다.
이곳은 테우펠 공작의 비밀이 숨겨진 최후의 은신처였다.
자신도 왕실 마법사에게 듣지 못했다면 왕성 지하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김검천이라는 자는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그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김검천?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 온 겁니까? 누워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정말 유능하시군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를 알고 있다니. 모르는 사이에 내 인기가 많아지기라도 했나?”
“좋든 싫든 간에 당신은 제 머릿속에 각인되었거든요. 여기 일을 화려하게 망쳐주셨으니까요.”
“더 화려하게 해치워주지 못해 아쉽더군.”
치료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기에 오히려 손을 쓰기 힘든 자세였다.
“그런 의미에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이번은 그냥 서로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직 당신에 대한 처우는 결정이 안 났거든요.”
“글쎄. 누가 그걸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봐야겠는데.”
“그러면 전 고민하는 사이에 가봐야겠군요.”
“잠깐!”
치료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고 하자 김검천이 그를 잡기 위해 손을 힘껏 뻗었다.
그 손은 그림자를 잡은 것처럼 치료사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직 회복 안 된 상처로부터 튀어나온 피 몇 방울이 치료사의 옷에 묻었을 뿐이었다.
“기다려라! 너의 이름은?”
“치료사라는 호칭 정도만 알아 두시지요. 가능하면 만나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치료사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이 정도라도 김검천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들인데 굳이 대답해 주었으니 말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치료사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치료사가 사라지자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미리내. 방금 전 녀석에게 나노 머신이 묻었나?”
김검천은 치료사를 잡지 못했지만 태연한 이유가 있었다.
핏속에 들어있는 나노 머신을 치료사에게 묻힌 것이다.
나노 머신도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미리내가 에너지 발생원을 추적 가능했다.
치료사는 김검천이 어둠 속에서 피를 뿌리는 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상대에게 들킨다고 단순히 팔을 뻗다가 피가 옷에 묻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미리내가 대답했다.
[묻긴 했지만 극소수의 양이라 시야 안에 들어올 정도가 아니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나 가까이 다가서야 발견할 정도인가? 그래서 지금은 어때?”
[탐색이 안 됩니다. 이미 탐색 범위 밖으로 나간 모양입니다.]
“일단 흔적을 남긴 것에 만족해야 하나. 하긴 테우펠 공작이 우선이니까 저 녀석은 나중에 생각해보자고. 응? 이것들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미리내가 주변을 분석해 보았는지 즉시 대답했다.
[이건 그때 보았던 혈석의 잔재들로 확인됩니다.]
“그렇군. 라바골렘이 있던 동굴과 같다는 건가. 일단 야간 모드로 전환해 줘.”
[야간 모드 발동. 빛 입자 광량 조절.]
적외선으로 본 이곳의 광경은 동굴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동굴에서 라바골렘에게 당한 자들은 해골만 남았었다.
여기서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김검천이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명복을 빌었다.
그 사이에도 근처에 잔뜩 있던 혈석은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한여름의 태양에 노출된 얼음처럼.
[이 모든 걸 테우펠이 한 짓일까요. 여기까지 도망을 왔으니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니, 그가 한 일은 아닌 것 같군. 저 모습을 봐.”
김검천이 가리키는 곳에 테우펠 공작이 죽어 있었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라 가슴이 뚫린 채로 두 눈을 뜬 채로 비참하게 말이다.
김검천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테우펠 공작의 상태를 확인했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죽지 않고 뒤통수를 때리려던 적들도 있었으니까.
“확실히 죽은 걸로 보이지?”
[그렇습니다. 이 육체에서는 생체 신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슴에 있던 혈석도 없어졌어. 도주까지 시도한 녀석이 이런 장소에서 스스로 죽을 리는 없을 테고. 아무래도 아까 그 녀석이 손을 썼겠지.”
김검천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테우펠 공작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미리내가 물었다.
[테우펠 공작이 죽은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이 장소를 국왕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지. 그냥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니니까. 세이야에 대한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
테우펠 공작과의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국왕이 호출한 귀족 대회의가 새로 열렸다.
회의실에 모인 백작 이상의 대귀족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국왕 전하의 양옆에 비어있는 의자는 누구를 위한 자리일까나.”
“지금 그게 문제인가?”
“아니란 말인가?”
“못 들었나? 테우펠 공작이 재상 자리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국왕 전하가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테우펠 공작이 제멋대로 나라를 주무르긴 했지.”
“잘못하면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테우펠 공작과 친하게 지내던 대귀족들이 좀 많았는가.”
“자네 말인가?”
“어허, 테우펠 공작하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그런 소리를 하면 되겠나?”
“언제는 그에게 마차에 뇌물을 가득 채워 갔던 주제에.”
“이 자식이? 넌 안 그랬냐?”
“마차의 반 정도밖에 안 가져갔다고!”
“가격은 3배나 되는 거였잖아!”
다들 서로 숨기고 싶은 부분을 사람들 앞에 폭로하고 있었다.
다툼 끝에 멱살을 잡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그들을 진정시킨 건 근위 기사의 외침이었다.
“국왕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헛! 국왕 전하께서!”
대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기립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였다.
대귀족들은 국왕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다 깜짝 놀랐다.
국왕의 뒤를 이어 김검천과 테이룬, 그리고 세이야가 나타난 것이다.
대귀족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과연. 의자가 비어있던 이유가 있었군. 저들 중 테이룬 경은 알겠지만 다른 두 사람은 누구지?”
“검은 머리의 남자는 김검천, 다른 한 사람은 세이야라고 하더군.”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
“당연한 일 아닌가? 테우펠 공작이 쫓겨났으니 앞으로 누가 권력을 잡을지 미리 파악해야지.”
“아차, 그렇군. 그러면 국왕 옆에 누가 앉는지도 중요하겠지.”
“두말하면 잔소리지.”
대귀족들의 시선이 김검천과 테이룬, 세이야를 따라 국왕 양옆에 있는 의자로 이동했다.
김검천은 국왕을 구해준 은인, 테이룬은 왕국 최고 기사, 세이야는 국왕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비어있는 의자는 두 개뿐이었다.
왕성에 의자가 모자랄 일은 없을 테니 저것은 의도한 것이분명했다.
대귀족들은 누가 의자에 앉을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다.
먼저 국왕이 한가운데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 뒤를 이어 세이야가 국왕의 왼쪽 자리에 착석했다.
그걸 본 대귀족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알려진 세이야가 오른쪽도 아닌 왼쪽에 앉다니.
왕의 왼쪽에 앉은 자보다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국왕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권력에 민감한 자들은 1인자와 2인자의 구별을 확실히 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인 것이다.
대귀족들의 관심이 김검천과 테이룬에게 쏠렸다.
“과연 저 자리에 앉을 자는 국왕의 은인일까?”
“아니면 이 나라 최강의 기사일까.”
“저 의자는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
테이룬이 그런 대귀족들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
들리지 않도록 말하는 것 같지만 마나로 강화된 신체의 소유자인 그에게는 잘 들렸다.
그건 김검천도 마찬가지였고.
테이룬이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김검천님이 남은 자리에 앉으면 되겠군.”
“넌?”
“기사는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충분하다.”
테이룬이 국왕의 뒤로 걸어가 호위를 서려고 했다.
그걸 본 대귀족들이 입을 벌렸다.
“저 마스터 나이트인 테이룬 경이 자리를 양보했어?”
“아니, 그 전에 테이룬 경이 김검천님이라고 불렀잖아!”
“도대체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김검천이 그런 테이룬을 불러 세웠다.
“아니, 네가 여기에 앉아라. 다들 앉아 있는데 너만 서 있으면 이상하다고.”
테이룬이 김검천의 말에 발을 멈추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수록 대귀족들의 얼굴이 괴이하게 구겨져 갔다.
거기에 더해 세이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아, 그러면 제가 앉을만한 의자를 가져올까요? 김검천님은 어떤 의자가 좋으신가요?”
그걸 들은 대귀족들은 이번에는 경악했다.
너무 놀라 의자 채로 뒤로 넘어간 대귀족도 있었다.
세이야는 항상 함선에서 하던 버릇대로 행동하는 거였지만 그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헉! 왕위 계승 서열 1위 세이야님이 저 김검천이라는 자를 위해 직접 의자를 가져오겠다고?”
“그 고집 센 테이룬 경이 김검천이라는 사람 말 한마디에 자기 의견을 꺾다니?”
대귀족들은 긴장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구에게 가장 잘 보여야 하는지 알아채기에는 충분했다.
대귀족들 중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한 자들이 의견을 교환했다.
“저 김검천이라는 자에게 잘 보여야겠는데.”
“이봐. 그렇다면 김검천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저기 두 분만 해도 우리보다 윗사람인데.”
“하긴 두 분이 김검천님이라고 부르실 정도니 우리도 그래야겠군.”
귀족들의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김검천이 세이야에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으니 너도 그냥 앉아 있어라.”
미소를 짓던 테이룬도 한마디 했다.
“하긴 시종이나 하인도 있는데 굳이 손수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난 저 의자에 앉고 싶었거든.”
김검천은 대귀족들을 대표하는 노귀족이 앉아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노귀족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테우펠 공작을 처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건 분명했다.
그렇기에 국왕도 자신의 바로 옆자리를 내준 것 같았고.
그래도 앉아 있던 의자를 빼앗아 가는 건 테우펠 공작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번에 국왕 전하를 구해준 일은 정말 감사하고 있다네. 하지만 이건 예의가 아닐세.”
“예의? 당신에게?”
김검천이 노대귀족에게 다가섰다.
움찔하던 노대귀족은 슬며시 눈을 돌리며 반박했다.
“힘이 있다고 너무 막 나가는 게 아닌가? 무례하군.”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거든 저 기사를 따라 잠시 나갔다 와보시지. 그리고 나서 내가 무례한지에 대한 대답을 들어 보도록 하지.”
굳어 있는 표정의 근위 기사들은 이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데다 국왕에게 명령을 받았다.
귀족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준비를 시킬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리에 계시는 모든 귀족분들은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이는 국왕 전하의 명령입니다.”
노귀족은 김검천과의 분쟁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귀족들은 왜 기사를 따라가야 하는지 불안해했다.
하지만 귀족들을 대표하는 노귀족이 움직였으니 다른 자들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사를 따라 이동했다 돌아온 대귀족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한 모습이었다.
“우엑!”
“자네, 괜찮은가? 여기다 토하게나.”
그들은 테우펠 공작이 왕성 지하에 저지른 참상을 보고 돌아온 것이었다.
신원파악 중이라 아직 놔두었던 시체들의 산을 말이다.
노귀족도 얼굴빛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귀족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못 볼 꼴을 많이 보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노귀족은 김검천에게 아까 전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대귀족 자신들이 그동안 테우펠 공작을 방치한 결과물이 바로 그 참혹한 현장이었으니까.
대귀족들의 그런 모습을 본 김검천이 말했다.
“이제야 다들 진지하게 회의를 할 분위기가 된 모양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