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국왕도 김검천의 말에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조용해진 귀족들의 분위기가 만족스러운지 국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임시 귀족 대회의를 시작하겠소.”
국왕이 회의 시작을 알리자 노귀족이 누구보다도 먼저 발언권을 청했다.
“국왕 전하.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말하시게나.”
“저희들이 기사를 따라 왕성 지하 감옥에서 본 그것들은 도대체 뭡니까?”
“거기가 기온이 낮아 신원파악을 위한 보관도 용이해 놔둔걸세. 일이 끝나면 공동묘지로 이송 준비할 거네.”
“그게 아니라 국왕 전하가 직접 성 아래 지하 감옥을 폐쇄한 게 언제인데 어째서 시체들이 거기서 나온 겁니까?”
“누가 성 내에서 그런 일을 하고도 비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설마 테우펠 공작이 저지른 일인 겁니까?”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재상이 된 테우펠 공작이 한 일이지.”
이 정도까지 말이 나왔으니 대부분의 대귀족들도 국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국왕이 책임을 물으면 곤란하니 아예 입을 닫는 자들도 나왔다.
물론 눈치 없는 자들은 어디를 가도 있었다.
“으음. 테우펠 공작이 쫓겨난 이유를 알겠군요.”
“아는 걸로 끝나면 곤란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국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네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것일세. 백성들은 이 나라의 근본인데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 명에 가까운 인원을 학살하는 동안 어찌 모를 수 있었나?”
국왕이 대귀족들을 노려보았다.
대귀족들이 할 말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침묵을 지키던 노귀족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변명했다.
“그걸 저희에게 따지시면 곤란합니다. 저희가 한 게 아니라 테우펠 공작이 한 일 아닙니까?”
“이 자리에는 왕성 지하 일에 관여된 사람들이 아무도 없나 보군. 그렇다면 근위 기사들을 보내 조사를 해도 문제 될 것도 없겠어.”
“그런 말이 아니라…”
노귀족은 뭐라고 더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행동은 결코 좋을 게 없었으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목에 힘 좀 쓰고 큰 소리 좀 낸다는 대귀족들은 더욱 그랬고.
자칫하면 테우펠 공작을 물리친 김검천과 테이룬을 상대해야 할 판국이었다.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이야.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국왕 전하.”
“우선 가장 중요한 안건부터 말하도록 하지. 여기 세이야는 다들 알 테지? 이 녀석이 다음 국왕이 될 거라는 걸 공식적으로 알리는 바일세. 대관식은 아직이지만 그렇게 알아 두도록.”
세이야가 국왕의 유일한 후계자인 만큼 잘 보여서 나쁠 것도 없었다.
노회한 국왕과 다르게 아직 어렸으니 잘 다루면 귀족들과 말이 통할지도 몰랐다.
이때다 싶어서 대귀족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렇군요. 세이야님이야 말로 왕실의 적통 계승자라고 들었습니다.”
“왕위 계승자 서열 1위 아닙니까? 이제 세이야 왕세자님이라고 불러야지요.”
“생김새가 꼭 닮은 게 누가 봐도 국왕 전하의 핏줄이라고 생각되는 용모입니다.”
누가 봐도 아부가 분명한 발언에 세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국왕과는 그렇게 비슷한 곳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국왕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가? 어느 곳이 닮았는가?”
닮았다고 말을 꺼낸 백작 한 명이 당황하다가 겨우 한 부분을 찾아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면 국왕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칠지 몰랐기에 속으로는 떨면서.
“제가 보기에는 특히 귀 부분이 비슷한 거 같습니다.”
가끔은 아부인 걸 알지만 기분 좋은 말도 있는 법 아닌가.
국왕에게 있어서는 그게 세이야에 대한 일이었고.
국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잘 생겼는지. 백작. 자네도 제법 보는 눈이 있군.”
“영광입니다. 전하.”
백작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다른 귀족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나라의 재정을 책임지는 자들 중 최고 책임을 맡고 있는 재무 대신이었다.
“국왕 전하.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에 신하 된 몸으로서 초월 존재께 감사드립니다. 영명하신 후계자를 찾으신 것도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재무 대신. 듣기 좋은 이야기지만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하시게.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군.”
“예.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이 나라에는 식량이 부족합니다.”
“저번 회의 때는 말하지 않은 내용인가?”
국왕이 주위의 귀족들이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니 그들은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
하긴 여기 있는 귀족들이 굶주릴 정도라면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는 가야 할 것이었다.
대귀족들과 다르게 나라의 재정을 파악해야 하는 위치의 재무 대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테우펠 공작에게도 매년 보고서는 제출했지만 소용은 없더군요.”
“식량이 모자란 이유는?”
“수입해 오는 식량의 가격은 오르고 양은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일시적인 현상인가?”
“근래 몇 년간 계속 그랬습니다. 맛이 아니라 배를 채울 식량마저 부족할 정도입니다.”
대귀족 한 명이 아는 척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러게 말일세. 그러고 보니 오늘은 생선 대신 고기를 메인 코스로 해서 먹어볼까 하는데.”
“생선이나 고기가 주요리로 나오는 코스 요리도 이제 질렸어. 다른 게 먹고 싶단 말이지.”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고 말귀도 못 알아들으면 고의로 하는 행동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옆에 있던 다른 대귀족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왕성 지하의 그것을 보고도 잘도 식사 이야기를 꺼내는군.”
“우웁. 더이상 언급하지 말게. 또 토할 거 같거든.”
국왕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대귀족들의 저런 모습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했다.
국왕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아까 과인이 한 소리를 못 들었나?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을.”
국왕의 호통에 놀란 귀족들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국왕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저희들이 어찌 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국왕 전하의 어떤 말씀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부 섞인 영양가 없는 발언이지만 그래도 국왕이 입만 떼면 반대하던 예전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지금은 국왕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주고 있으니까.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너희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면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을 위해 사비를 풀 준비가 되었겠지?”
“예?”
“우선 왕실부터 국고를 풀도록 하겠다. 너희들도 각자 성의를 보이도록 해라. 물론 얼마나 냈는지는 확실히 기록해서 과인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 보도록 하겠느니라.”
“그건….”
“참고로 과인에게 거짓말을 한 자들은 테이룬 경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귀족들의 눈이 테이룬을 향했다.
이를 드러낸 테이룬이 검집을 툭툭 쳤다.
예전이라면 국왕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면 귀족들이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국왕이 절대 권력자이긴 해도 귀족들이 힘을 모으면 견제 못 할 것도 없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국왕을 조종하던 테우펠 공작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대든다면 죽었다 살아난 국왕이 귀족들을 향해 뭘 못하겠는가.
적어도 국왕과 싸우는데 앞장선 귀족의 머리만큼은 몸과 작별을 고할 것이분명했다.
그때였다.
노귀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누가 봐도 국왕에게 속에 쌓인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국왕에 대한 반대 의견을 원하는 귀족들의 열렬한 시선을 받던 노귀족이 소리쳤다.
“국왕 전하의 그런 말씀이 있으신데 신하된 도리로 어찌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미력하나마 제가 먼저 국왕 전하의 고귀한 뜻을 따라 주머니를 풀겠습니다!”
귀족들이 멍하니 노귀족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에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귀족도 있었다.
귀족들의 반응이야 어떻든지 노귀족의 대답에 만족한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족들을 대표하는 자네다운 말이군. 누구보다도 앞장서 뜻을 밝힌 건 잊지 않을 걸세.”
노귀족이 귀족들을 돌아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를 노려보던 귀족들의 눈빛이 한 방 먹었다는 듯이 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차피 내야 할 돈도 돈대로 뺏기고 생색은 못 내게 생겼다.
분위기에 휘말린 나머지 귀족들도 앞을 다투어 지원을 약속했다.
국왕의 우세가 확실한 상황에 반대 의견을 내 미움받아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속으로는 울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국왕에게 잘 보이려 들었다.
기세를 타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회의를 진행하던 국왕이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쿨럭, 쿨럭.”
“괜찮으십니까? 국왕 전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국왕의 상태를 걱정했다.
특히 세이야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의사를 부르러 나가려 들었다.
그런 그들을 국왕이 손을 내저어 말렸다.
“멈춰라. 단순한 기침이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이야기가 끝났으니 회의는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하지.”
폐회가 선언되자 귀족들은 서둘러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왕 지원을 약속했다면 빨리 물건을 보내면 보낼수록 국왕의 기억에 남을 테니까.
어쩌면 다음 대 왕인 세이야의 기억 속까지도.
귀족들이 모두 돌아가자 국왕은 김검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한 게 괜히 시간만 보내도록 한 게 아닌가 모르겠구려.”
김검천은 고개를 저었다.
귀족 회의에 참석한 덕에 일반적인 경로로는 얻을 수 없는 많은 정보를 들은 참이었다.
덕분에 이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에 대해서도 간단히는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별말씀을.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정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네. 사실 이것 때문에 붙잡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어서 받으시게나.”
원래는 세이야의 말을 듣자마자 왕관을 넘기려고 했다.
다만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왕관이 보이지 않았다면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랐다.
그렇기에 돌아가려는 김검천을 잠시 만류했던 것이다.
국왕은 쓰고 있던 왕관을 김검천에게 내밀었다.
왕관에 박혀있는 상급 마석이 불빛에 비쳐 반짝였다.
“기왕 주시는 거니 감사히 받도록 하지요.”
김검천이 왕관을 냉큼 받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국왕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자네는 예의상 거절이라는 걸 모르나?”
“어차피 주시려고 하는 걸 그런 예의로 내미신 손을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하하! 맞네. 생각 같아서는 왕관 대신 왕위라도 물려주고 싶은데 혹시 생각 있는가?”
“왕이 될 세이야가 제 말을 따르는데 그런 골치 아픈 자리가 왜 필요합니까.”
이게 책임없는 쾌락이라는 것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세이야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검천이 몇 번 더 왕관을 만지더니 세이야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둬.”
“예? 이거 김검천님이 받기로 하신 게 아니었나요?”
“이런 화려한 왕관을 내가 어디다 쓰겠어? 너라면 모를까. 나는 이거면 충분해.”
어느새 김검천의 손에는 왕관에 박혀있던 상급 마석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본 세이야가 왕관을 국왕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그러면 이건 다시 돌려드릴게요. 마석은 없어졌지만 왕관은 대대로 내려온 가보 같은 거니까요.”
“가보인 만큼 결국 너에게로 다시 돌아갈 테고 말이다. 마석이야 언젠가 다시 채워놓으면 되는 일이지.”
국왕은 다시 왕관을 받아들며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김검천에게 말을 걸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가능하면 들어 주었으면 좋다는 마음일세.”
“어떤 겁니까?”
“괜찮다면 이 나라의 대공 작위를 받아 줄 수 있겠는가?”
“대공이라면….”
“왕을 제외하고는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일세. 테우펠도 공, 후, 백, 자, 남으로 나뉘는 오등작 중 최고인 공작의 자리에는 올랐지만 대공은 될 수 없었지.”
김검천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국왕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