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국왕도 대공이라는 지위를 넘겨주는데 부탁이라고 했을 것이고.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김검천은 모르는 척 응답해 보았다.
“그런 대단한 자리라면 부탁을 안 하셔도 원하는 자들은 넘쳐나지 않습니까?”
“물론 대공이라는 작위를 노리는 자들은 넘쳐나지. 그 지위에 적합한 사람이 없어 그렇지.”
대공이라는 작위는 귀족 계급에 속했지만 왕족이 받는 직위이기도 했다.
국왕 외에 가족이 없는 세이야로서는보다 김검천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세이야도 국왕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김검천님이 대공이 되어 주신다면 저도 정말 마음에 든든할 거 같아요.”
“세이야, 내가 대공이 되면 네 부하가 된다는 건데? 대공이라도 결국 왕의 아래잖아.”
“엣, 말이 그렇게 되나요?”
국왕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로 김검천이 거절하기라도 하면 이 왕국은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테이룬이 있다지만 그의 힘은 한계가 있었다.
그 혼자 감당할 수 있다면 테우펠 공작의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고 모든 권리는 누릴 수 있도록 해도 좋네. 신하로서의 대공이 아니라 그저 대공이라는 작위만 받아줘도 그만이라는 말이네.”
“그러니까 주시겠다는 작위는 일종의 명예직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실권도 있는 명예직이지. 세이야가 왕이 된다고 해도 자네를 어떻게 할 생각이 있겠나? 대공 작위가 있다면 이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걸세. 부탁하네.”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고맙네. 고마워. 이제 김검천 대공이라고 불러도 되겠군.”
왕 다음가는 작위를 넘겨주는 사람이 오히려 감사해하는 신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래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대공이라는 작위로 김검천을 묶어 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편하신 대로 하셔도 좋지만 이건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뭘 하고 안 할지는 스스로 정한다는 것을요.”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이 나라의 대공이 되어 준 것만 해도 충분하네. 그러면 세이야.”
“예. 할아버지.”
세이야만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국왕이 입을 열었다.
“너도 그렇겠지만 김검천 대공도 긴 회의로 피곤하실 테니 이만 쉬러 가도록 하려무나.”
“그러고 보니 제가 김검천님 생각을 못 했네요.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왕이 바로 사람을 불러 김검천과 세이야를 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김검천과 세이야가 회의실을 떠나자 국왕도 테이룬과 함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에 아무도 없자 국왕이 입을 열었다.
“테이룬.”
“예. 국왕 전하.”
“오늘 귀족 대회의에서 과인이 보인 행동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국왕 전하의 진정한 모습을 본 것 같았습니다. 전에는 귀족들과 무슨 일을 진행하려면 하나를 얻는 대신 다른 걸 내줘야 했으니까요.”
“후후, 자네 입에서 칭찬이 나오다니 오늘 회의가 꽤 속이 시원했나 보군.”
“대부분의 귀족은 쓰레기니까요. 테우펠 공작이 저들을 다 죽인다고 해도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자네는 그들을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 않았나?”
“당장은 필요하니까요.”
“바로 그걸세. 필요하면 제물로 바칠 자들이 필요한 거지. 저들이 백성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서 배를 불리는 건 일종의 먹이와 같은 거야.”
국왕은 세이야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사람 좋게 보이던 국왕이라도 일국의 지도자였으니 마냥 착하기만 할 리 없었다.
상황에 따라 냉혹해 보이거나 잔인한 일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귀족들도 그냥 있지는 않을 겁니다. 죽을 각오가 되신 겁니까?”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야. 세이야에게 문제가 될 일은 죽기 전에 가져갈 생각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세이야에게 짐이 될 만한 걸 남기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아아, 이런 세상이라도 세이야는 가능한 좋은 것만 보이고 싶거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검천님과 제가 있는 한 세이야에게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으니까. 자네도 그렇고. 들어가지.”
침실에 도착한 국왕이 침대 옆의 벽을 눌렀다.
그러자 작은 상자가 하나 나타나자 테이룬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왕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모르는 비밀장소라서 놀란 건가? 왕실의 비밀을 자네가 전부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이걸 받게.”
“이것은 뭡니까?”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나 세이야가 상자를 열어보도록 하게.”
“김검천 대공은 어떻게 합니까?”
“그가 몰라도 되는 일은 없다네. 어차피 자네나 세이야가 김검천 대공에게 숨길 것 같지도 않고.”
두 사람이 김검천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국왕은 이미 어떤 관계인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국왕이 지쳤는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열어야 하는 때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걸세. 그러면 자네도 이만 쉬러 가보게나.”
홀로 남게 된 국왕은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김검천과 테이룬. 그들이라면 세이야를 믿고 맡길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한 뒤틀린 진실을 알려줘도 될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겠군. 후후,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다니.”
이 비밀은 이 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는 테우펠 공작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가 만약 진실을 알았다면 국왕을 세뇌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자존심만큼은 누구보다도 높았던 그가 견딜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반드시 진실이라는 걸 알아서 행복한 건 아니지. 차라리 모를 때가 더 나을지도.”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국왕의 혼잣말은 공허하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국왕은 천천히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상하게 차가웠다.
***
함선으로 돌아가기 전 김검천은 세이야와 함께 왕국 수도를 잠시 구경하기로 하기로 했다.
국왕이 지나가는 말처럼 권유했는데 꺼냈는데 세이야가 찬성한 것이다.
김검천도 이곳에 대해 잠시 둘러보고 싶기도 했고.
- 똑똑.
“김검천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세이야가 어디서 났는지 가방을 짊어지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벼운 복장으로 입고 온 걸 보니 그 차림으로 외출을 나갈 모양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검천은 언제든 전투가 가능하도록 파워드슈츠를 착용한 채였다.
“세이야. 넌 이제 이 나라의 왕실 계승자 서열 1위야. 내가 대공이라도 존칭을 하면 남들이 뭐라 생각할까.”
“알게 뭡니까? 전 왕자가 되기 전에 이미 김검천님의 부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텐데요.”
“녀석하고는. 네 뜻은 알겠다. 그러면 가볼까.”
“예! 할아버지가 충분히 챙겨주셨으니 돈 걱정은 마세요. 모자라면 국고도 터신다던데요.”
“왕실 예산으로 수도에 있는 물건을 전부 다 살 생각이냐?”
김검천과 세이야가 통로를 걸어 왕성 연무장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순찰 중인 근위 기사들이 지나가다가 한 명이 김검천과 세이야에게 말을 걸어왔다.
“거기 너희 둘. 왜 그냥 지나가는 거냐.”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중에 이야기하면 되잖아.”
“아냐, 이런 건 차라리 빨리 알려주는 게 낫다고.”
근위 기사들의 대화가 이해가 안 된 세이야가 되물었다.
“우리에게 말하는 건가요?”
“그래. 처음 보는 얼굴이 마갑을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니 기사단의 신입 같은데 선배를 보고 경례도 안하고 가냐?”
“아, 뭔가 착각하셨구나. 우리는 근위 기사가 아닌데요. 심지어 저건 마갑도 아닌데.”
“근위 기사가 아니라고? 그러면 어느 귀족분을 수행하고 온 기사나 시종인가?”
“기사도 아니고 시종도 아닌데요.”
“지금 장난치자는 거냐? 그러면 너희는 누구란 말이야?”
근위 기사들이 짜증을 내자 김검천이 나섰다.
“이미 답을 말했는데 억지라도 부릴 생각인가.”
“뭐라고?”
“그러니 대부분의 근위 기사들이 테우펠 공작에게 달라붙어 꿀이나 빨려고 했을 테지.”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더냐!”
“이상하군. 테이룬이분명 그랬는데. 그 녀석이 거짓말을 한 건가?”
“테이룬은 또 어떤 놈이야? 어디 있는지 말해라.”
“말한다면?”
“그런 소리를 하는 녀석은 근위 기사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당장 베어버릴 작정이다!”
근위 기사가 소리치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근위 기사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테이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기억나는 거 없냐?”
“없기는.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테이룬 경이 있잖아. 서… 설마?”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룬을 따로 왕국 최강의 기사라고도 하더군. 요즘은 그 칭호를 버릴지도 모르지만.”
“아니, 테이룬 경을 친구처럼 부르는 너… 아니, 두 분은 누구십니까?”
그나마 한 명은 동료와 다르게 눈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누구인지 묻는다면 대답해 주는 게 도리겠지. 여기 있는 기품 넘치는 사람은 세이야. 난 김검천이라고 한다.”
“김검천? 세이야? 헉!”
근위 기사의 동료가 기겁을 했다.
근위 기사가 그런 동료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야, 너 왜 그래?”
“바보야! 기사단에서 어제 내려온 공문 안 읽었냐?”
“공문이라고 뭐 다른 게 있겠어? 제국하고 전쟁이라도 난 것도 아닌데.”
“우리들에게는 더 큰 일이지. 국왕 전하를 도와준 은인의 성함이 김검천, 세이야라는 이름은…”
근위 기사들이 입을 다물고 몸을 떨었다.
김검천이 그들의 의혹에 확인 사살을 했다.
“세이야는 이 나라의 왕이 될 몸. 그런 사람에게 반말을 하다니. 근위 기사가 무섭긴 무섭군.”
“죽어주십시오! 세이야 왕자님!”
“헉! 죽을죄를 졌습니다! 왕족 모독죄만큼은 제발!”
왕족 모독죄는 즉결 처형이라도 어디 가서 할 말이 없는 죄였다.
이 왕국의 정점에 있는 게 왕족 아닌가.
그것도 상대는 왕이 될 사람이었다.
계급 사회에서는 사람을 살해한 것보다도 더한 중죄인 것이다.
근위 기사 2명이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세이야가 그들의 어깨를 짚으며 따스하게 말했다.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왕자라고 해도 며칠 전에 겨우 공식적으로 결정된 일입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모르고 한 일인데 죄를 물을 수는 없지요. 일어나세요.”
“세이야 세자 저하!”
“평생토록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일어선 근위 기사 2명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세이야를 바라보았다.
세이야가 별일 없었다는 듯 지나치려다가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다음에 또 이러면 곤란하겠지요. 이름과 기사단에서의 직책을 알고 싶네요.”
활짝 피었던 근위 기사들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새로 왕이 되실 분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드러워 보였지만 결단을 내릴 때는 단호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뒤 끝도 있었고.
김검천이 한마디 했다.
“세이야, 전에 네가 살던 마을을 떠날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넌 의외로 무서운 성격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