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왕성을 벗어나 거리로 내려오자 세이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에서 식사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나와서 먹는 것도 기대되는데요?”
“어디 맛있는 곳이라도 알고 있는듯한데.”
“어제 귀족 한 명에게 물어봐서 제법 괜찮은 고급 레스토랑을 하나 알아 두었거든요.”
“현지의 맛은 어떤지 기대가 되는걸.”
수도라서 그런지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을 걷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는 귀가 뾰족하거나 키가 작은데도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도 있었다.
주변에는 가게뿐만이 아니라 길거리 옆으로 간단한 음식과 물건이 파는 가판대도 있었다.
그런데 보이는 대부분의 먹을 것들은 딱딱한 빵이나 휴대용 식량이었다.
과일이나 야채, 고기 같은 것도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나마 진열되어 있는 것들도 대부분 신선한 게 아니었다.
대충 봐도 말라비틀어진 물건 군데군데 하얀 곰팡이가 피어난 것들도 있었으니까.
그런 물건인데도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기에 세이야에게 물어보았다.
“먹을 것들이 저런 거밖에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심지어 여기는 수도잖아.”
“수도니까 먹을 걸 저렇게 쌓아두고 팔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것 아닌가요? 변두리 영지에서는 휴대용 식량 같은 거나 팔지 저런 것도 없었어요.”
세이야의 대답은 김검천의 예상과는 달랐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인지 둘 사이의 상식은 다른 점이 있었다.
김검천의 경우 원하는 음식 같은 건 함선 내 식당만 가도 뭐든지 나오지 않았는가.
지금은 남아있는 것들로 버티는 중이지만 원래는 식량 생산도 가능한 함선인 것이다.
김검천은 데탈이 불만을 늘어놓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눈으로 보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이 실감이 되는군.”
“저도 마물의 숲에 살아서 그런지 밖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몇 년 사이에 사정이 점점 더 나빠지는 건 알고 있다고요.”
“그건 어떻게?”
“마물의 숲을 벗어나지 못했어도 자유의 마을은 몇 번 방문했으니 소문 정도는 들었지요.”
하긴 거기라면 변두리 영지 마을과는 별 차이 없었을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팔 수 있는 건 뭐든지 팔려고 들던 마을 아니었는가.
심지어 먹을 것뿐만 아니라 인간도 팔았고.
주변을 둘러보던 세이야가 간식으로 휴대용 식량을 하나 샀다.
김검천이 휴대용 식량을 입에 가져가려던 세이야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세이야가 뭔가 알아챈 듯한 표정으로 막 먹으려던 휴대용 식량을 내밀었다.
“앗, 김검천님은 이런 거 싫어할 거 같아 일부러 안 산 거예요. 미리 물어볼 걸 그랬네요.”
“하나만 산 걸 너한테 뺏어 먹을 생각은 없다. 그저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본 것뿐이야.”
“그러면 반으로 나눠 먹을까요?”
세이야가 휴대용 식량을 반으로 부러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뜻처럼 부러지지 않았다.
주변에 지나던 사람들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거 휴대용 식량 아니야?”
“저거 곡물가루와 지방 등으로 만든 건조식인데 보존 기간은 늘었지만 그만큼 딱딱해졌지.”
“물이나 스프 등으로 불려서 먹지 않으면 이빨도 안 들어가는 건데 맨손으로 쪼개질 리가.”
하긴 유통기한을 늘리려면 수분을 제거해서 단단하게 굳힌 후 잘 건조해야 할 것이었다.
그게 통조림처럼 멸균 후 병에 넣어 밀폐할 것이 아니면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김검천이 열심히 힘을 쓰고 있는 세이야로부터 휴대용 식량을 가져갔다.
“맨몸으로는 하기 힘들 테니 내가 하지.”
휴대용 식량을 반으로 나누려던 김검천은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조금 놀랐다.
파워드슈츠를 입고서도 힘을 줘야 할 정도면 돌과 비교해서 차이가 없었으니까.
비상시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이런 걸 먹어야 한다니 안타까울 정도였다.
세이야가 반으로 잘 나눠진 휴대용 식량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김검천님. 이렇게 나누니까 간식으로 먹기에는 딱 좋은 분량이네요.”
“식사 전에 많이 먹을 필요는 없지. 그러면 어디 한번 나도 맛이나 볼까나.”
김검천은 딱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번 베어 물어보았다.
뭐든지 새로운 시도는 흥미로운 법이다.
남자가 일찍 죽는 이유이기도 했고.
- 으드득.
잇몸에서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튼튼한 식량덕분에 나노 머신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식량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전투용 무기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김검천이니까 어떻게든 으깨서 먹을 수 있었다.
입에 욱여넣은 세이야는 씹지 못했기에 뺨이 부풀어 오른 채 우물거리면서 길을 가야 했다.
그 상태로 소개받은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종업원 한 명이 막아섰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레스토랑이니까 식사하러 온 거지 다른 이유가 있겠소?”
“그게 아니라 이곳은 품격 있는 분들을 위한 고급 레스토랑입니다. 기사분은 그렇다 치고 이쪽 분은 조금…”
종업원의 눈이 세이야가 여전히 우물거리고 있는 원인으로 보이는 휴대용 식량으로 향했다.
잡상인처럼 세이야가 지고 있는 짐도 한몫했고.
시선을 눈치챈 세이야가 짐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짐 좀 맡아 줄래요? 나갈 때 회수할게요.”
“손님. 이곳은 적어도 기사 정도는 되어야 입장할 수 있는 곳입니다. 혹시 기사십니까?”
“기사는 아닌데요.”
세이야는 기사가 아니라 왕세자였으니까.
그런 대답으로 세이야가 왕세자라는 걸 알아챈다면 종업원이 아니라 예언자일 것이다.
그걸 알 리 없는 종업원이 정중히 거절의 말을 건네었다.
“준귀족도 아니시라면 이 짐을 가지고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여기 규칙이 그렇습니다.”
그때 예복 차림의 한 명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앗, 지배인님. 이쪽 사람이 나가 달라는 말을 안 들어서요.”
“규칙은 설명했나?”
“예. 기사는 되어야 들어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분은 기사가 아니라고 했고요.”
지배인이 웃는 얼굴로 세이야에게 물었다.
“손님, 이미 이곳의 규칙을 설명 드려서 입장이 어렵다고 했는데 다른 문제라도?”
세이야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출입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요. 기사가 아니라는 말을 했을 뿐이라고요.”
지배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귀족 분이시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뇨. 귀족도 아닌데요.”
지배인의 표정이 흐트러지려는데 귀족 한 명이 레스트랑에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지배인. 지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죄송합니다. 금방 해결하겠습니다.”
김검천과 세이야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노귀족이 다른 귀족 일행들과 서 있었다.
노귀족이 김검천과 세이야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김검천 대공 저하와 세이야 세자 저하 아니십니까. 귀한 분들이 이런 누추한 곳에 웬일로 오셨습니까?”
세이야가 대답했다.
“이곳을 추천받았거든요. 당신들도 이곳에 자주 오는 모양이네요.”
“그렇습니다. 기분 전환하기에는 좋은 곳이니까요. 괜찮으시다면 어떻습니까? 저희와 합석하시는 게.”
“아, 잠깐만요. 물어보고요.”
“예? 물어보시다니 누구에게 말씀입니까?”
세이야가 지배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지배인은 김검천과 세이야의 정체가 알게 되자 혀를 깨물기라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출입하는 데 문제가 있을까요?”
“헉! 문제라니요. 귀족이 아니라 왕족이셨군요! 몰라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
“모를 수도 있지요.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며칠 전의 이야기니까요.”
“지금까지의 무례는 최선을 다해 모시는 걸로 갚겠습니다. 부디 이쪽으로 오시지요.”
지배인이 종업원을 내버려 두고 직접 사람들을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지배인들이 요리사와 종업원들에게 주의를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 문제가 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다 지배인의 말대로 뒤이어 나온 코스 요리는 제법 맛이 있긴 했다.
전채에 이어 스프와 빵, 샐러드, 주식인 고기, 디저트까지 먹은 김검천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맛은 있었지만 조금 아쉬운 감이 있군.”
차의 피어오르는 향기를 즐기던 노귀족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허허, 이곳의 요리가 국내 최고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만 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쁘다는 게 아니야. 내 입맛에는 좀 더 어울리는 요리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미식가이기도 한 노귀족이 입맛을 다셨다.
귀족 사이에서도 평이 좋은 이곳의 요리보다 나을 정도라면 얼마나 맛있다는 것일까.
그런 요리를 한 입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돈 같은 건 얼마를 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 노귀족은 김검천과 세이야에게 자리를 권유한 까닭을 떠올렸다.
원래 좋은 건 혼자 차지해야 하는 법이었다.
다른 일행들에게 잠시 자리를 물리게 한 다음 물었다.
“그런 요리는 저도 한 번쯤은 먹어보고 싶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프리라고 아십니까?”
“알고 지내는 사이기는 하지.”
“실은 프리라는 자로부터 이런 물건을 받았지 뭡니까. 어디서 난 물건인지 말로 하니 안 들어 강제적으로 김검천 대공 각하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무리한 방법을 써서 죄송합니다.”
프리가 새로운 판매 경로를 뚫기 위해 노귀족을 만났다가 혼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손을 내저었다.
“프리 녀석이라면 피해를 본 만큼 보상해주면 오히려 좋아할 거요.”
“그런 걸로 넘어가신다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이것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노귀족이 주머니에서 꺼내든 건 회중시계였다.
함선 내 굴러다니던 물건 일부를 모아 프리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무기 외에도 승무원들이 가지고 다니던 개인 물건들이 있었으니까.
물론 김검천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복고풍이라는 유행은 항상 돌아오기는 법이었다.
아날로그 감성의 시계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비싼 취미로 김검천의 시대에 인기가 있었다.
그런 감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능과 디자인에 노귀족도 뭔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별 건 아니오. 그저 시계에 새겨진 숫자에 맞춰서 시간을 확인할 때 쓰는 물건이니까.”
“아, 그런 용도였군요. 이제까지는 마탑에서 나온 마법도구로 시간을 확인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나눠어 있으니 더 편리한 느낌입니다. 모양도 더 멋지고요.”
“가벼운 데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과시하기에는 그만한 것도 없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가능하면 몇 개를 더 얻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이게 아니더라도 다른 물품도 탐이 나더군요. 발화통이라든지 손전등이라는 것 말입니다.”
노귀족의 간청에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선을 살피면 저런 물건 몇 개 정도는 충분히 나올 거 같았다.
아니면 미리내에게 설계도를 그리게 하고 제작은 쿠퍼에게 만들게 해도 좋을 거 같았다.
원래 7D 프린터로 만드는 거지만 쿠퍼가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그 정도라면 나중에 프리에게 전달하라고 하지요.”
“감사합니다!”
노귀족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자리를 물러났다.
테우펠 공작이 그토록 꺼려하던 과학의 산물을 지배계층인 노귀족이 퍼트리게 생겼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뭐든지 처음이 있는 법이다.
김검천과 세이야는 지배인의 배웅을 받으며 수도에서 가장 큰 마석 상점으로 향했다.
프리에게 부탁하면 싸게 구할 수 있을 테지만 당장은 돈보다는 마석이 더 급했다.
상점을 향해 이동하던 김검천이 갑자기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이야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니다.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사람이 많으니 방향이라도 겹친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긴 상관없지만.”
김검천과 세이야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뒤를 쫓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감각 한번 뛰어난 녀석이로군. 뭐,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기회를 보면 되겠지.”
어차피 호기심으로 잠시 살펴보는 중이었으니까.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좋은 선택도 아니었고.
그들을 살피던 검은 그림자는 미행하는 걸 포기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미행하던 눈을 떨쳐낸 김검천은 상점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중급이나 상급 마석을 모두 구입하고 싶군. 가격은 제대로 쳐주지.”
상점 주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손님. 중급 마석만 해도 100골드는 줘야 그림자라도 볼 수 있는 제품입니다. 요즘은 특히 물건이 줄어서 더 가격이 나가는 편이고요.”
4인 가족이 1달 동안 아껴 쓰면 2골드로 생활할 수 있었다.
“얼마면 돼요? 얼마면 되냐고요.”
세이야가 짊어지고 왔던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렸다.
- 쿵.
- 꿀걱.
상점 주인이 군침을 삼켰다.
100쿠퍼가 1실버고 100실버가 1골드였다.
저 안에 든 게 다 쿠퍼는 아닐 테니 중급 마석가격으로는 충분했다.
“저게 다 돈입니까?”
“물론. 그리고 당신이 염려하는 점도 알고 있지요.”
세이야가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여는 순간 번쩍이는 황금빛이 주변으로 퍼졌다.
가방 안에 있는 건 모두 골드였으니까.
국왕이 모자라면 국고를 털어 줄 수도 있다더니 아예 국고를 털어 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