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김검천의 말에 쿠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함선 내에 머무른다면 마나도 차단할 수 있는 모양이니 상대가 그냥 지나치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가 겁이 나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테고.”
“녀석을 처리한다고 해도 이번 일이 끝날 거 같지 않아서입니다.”
“하지만 벌레가 한 마리밖에 안 보인다고 놔두면 계속 늘어나기만 할 뿐이야.”
“이미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시군요.”
“뭐든지 처음이 중요하거든. 네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다만 이미 선택을 했다는 거지.”
목표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기에 미리내가 경고했다.
[김검천 함장님. 갑자기 표적의 움직임이 빨라졌습니다.]
“표적들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왔다는 건가.”
[원래 인원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근처에서 감지된 인간형 생명체는 1명뿐입니다.]
쿠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적자들이 괴물에게 습격이라도 받아 혼자 살아남은 모양입니다. 마물의 숲이니까요.”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달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혼자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실력자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자세한 건 서로 인사라도 하면서 확인해 보자고.”
김검천은 쿠퍼를 이끌고 함선 밖을 나섰다.
세이야도 같이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먼 길을 온 만큼 리에와 같이 쉬고 있으라고 했다.
혹시라도 필요하면 그때 가서 부른다고 했다.
미리내가 상대의 행방을 보고했다.
[잠시 후 100미터 앞에서 오른쪽입니다.]
“생각보다도 가까이 있는걸.”
[이 속도라면 마나보다는 오러로 신체를 강화한 수준의 상대로 예상됩니다.]
미리내의 안내에 따라 길을 가다 보니 기사 한 명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장착하고 있는 붉은 마갑에는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이 새겨져 있었다.
얼굴에 부상이라도 입어서인지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상태였다.
김검천은 우선 주변에 있는 머리만 한 돌멩이를 집어 붉은 갑옷의 기사에게 던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맞는 즉시 사망할만한 위력이었다.
- 쉬이익.
돌멩이가 날아드는 소리가 매서웠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붉은 갑옷의 기사는 하나만 남은 눈을 번뜩이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돌멩이는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버렸다.
외눈의 붉은 갑옷 기사가 소리쳤다.
“인사치고는 거칠군!”
김검천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원래 이런 곳에서의 인사는 위험한 게 매력이니까.”
그 뒤를 이어 쿠퍼가 숨을 헐떡이며 쫓아왔다.
“헉헉, 김검천님. 너무 빨리 움직이시는 것 아닙니까? 저번보다도 더 빨라지신 것 같은데요.”
“내가 빨라진 게 아니라 네가 느려진 게 아니야? 그동안 계속 함선 내에서만 있었으니까.”
쿠퍼가 금속 망치를 2개나 들고 뛰었다지만 김검천의 파워드슈츠도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평소와 다르게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금속 망치를 꺼내며 쿠퍼가 숨을 골랐다.
“앞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는데요. 아니? 저 사람은?”
외눈의 붉은 갑옷 기사가 이를 드러내었다.
마물의 숲에 사는 자가 자신을 알고 있다니.
“이 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지?”
거기에 답변한 건 김검천이 아니었다.
쿠퍼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대답했다.
“제국의 마스터 나이트 중 한 명, 킬만! 제국의 마스터 나이트가 왜 이런 곳까지?”
“마스터 나이트가 마물의 숲까지 온 게 이상한 건가? 그 반대겠지. 제국의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 어디 있겠나. 살아남는 건 다른 이야기겠지만. 같이 온 일행들은 다 죽었거든.”
“너 설마 동료들이 괴물들에게 당하는 걸 보고만 있던 거냐?”
쿠퍼의 물음에 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중에 실력이 없어 탈락한 자들에 대해 묻는 게 이상했으니까.
“아아, 확실히 마물의 숲이라는 게 헛소문은 아니더군. 그런데 그게 네가 무슨 상관이라는 거냐? 오히려 상대해야 할 적이 줄었으니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국 기사라는 자가 그런 소리나 내뱉고 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생김새와는 다르게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는 녀석이군. 넌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그러면 보통은 고통 없이 죽여준다고 하지 않냐?”
“본인이 보통은 아니라서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 나이트의 실력이 진짜라는 건 알고 있었다.
쿠퍼가 상대의 도발에 반응하지 못하자 김검천이 대신 나섰다.
“킬만이라고 했나. 네 말대로 그쪽이 어디를 가든지 알 바는 아니지.”
“그렇지? 뭔가 좀 아는 사람이군.”
“그보다 마물의 숲이 이렇게나 넓은데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고 싶군.”
“한번 맞춰보지 그러나? 그러면 제대로 설명해줄지도 모르지.”
“쉬운 일이군. 왕관의 상급 마석에다가 추적 마법 같은 거라도 걸어둔 모양이겠지.”
킬만이 한쪽 눈을 들어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하나만 있는 눈이라도 흔들리는 눈동자만으로 놀랐다는 걸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건가? 대단하군.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고 싶을 정도야.”
“직접 확인한 거야. 네가 우리를 찾아서 주변을 헤매던 모습을 보았거든.”
“추적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반대로 미행 당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미행한 게 아니라 함선의 탐색 기능으로 주변의 이상 징후를 파악한 것이었지만.
킬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김검천에게는 나쁠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자유지만 확실한 건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능력이 있다는 거지.”
“과연. 치료사 놈이 너희들을 내버려 두라고 한 게 약간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군.”
“치료사라면 혹시 테우펠 공작과 연관이 있는 그 녀석을 말하는 거냐?”
이번에는 킬만의 얼굴에도 놀라는 표정이 확연히 드러났다.
“네 놈.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냐? 치료사에 대한 건 세뇌를 당한 국왕도 몰랐을 텐데.”
김검천이 내심 웃었다.
킬만이 강할지는 몰라도 그의 머리는 지니고 있는 무력을 못 따라주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순순히 대답해 주고 있다니.
물론 킬만도 나름대로 생각은 있겠지만 지금은 진실을 듣는 게 먼저였으니 좋은 기회였다.
김검천은 조금 더 치료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미끼로 내밀기로 했다.
“이 모든 건 치료사에게 직접 들어 알게 된 거지. 테우펠 공작과 있던 것도 말이야.”
안 그래도 킬만은 치료사에 대해서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마스터 나이트인 자신을 제쳐두고 이 나라에 대한 일을 맡게 된 게 치료사인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 일을 진행하던 건 치료사였다.
그렇기에 요청을 받고 일에 끼어든 킬만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킬만의 생각은 달랐다.
마스터 나이트는 제국이 아니라 이 대륙의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 존재였다.
어둠 속에 숨어 더러운 일이나 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다.
특히 공식적으로는 제국에서 별다른 지위도 없는 치료사에 협조하는 건 더욱 그랬다.
제국 황제의 명령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치료사가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고 착각한 킬만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치료사가 본인에게 너희들로부터 손을 떼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었나. 숨길 게 따로 있지.”
“그가 우리를 손대지 말라고 할 만한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흥, 그거야 너희들과 접촉하면 자신이 비밀을 누설한 걸 알아챌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이 마스터 나이트인 킬만이 치료사의 말 따위를 들을 것 같으냐?”
세뇌된 국왕을 구하는 데 관여한 김검천은 킬만의 말까지 듣자 대충 상황이 이해되었다.
국왕을 세뇌한 테우펠 재상의 뒤에 있던 건 제국이라는 곳 같았다.
같은 제국 소속이라도 그들끼리 파벌이나 감정 등의 이유로 대립하는 모양새였고.
그래서 킬만도 치료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는 중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목이라도 선물로 들고 갈 생각인가 보군.”
“아아, 일을 망친 치료사가 그걸 보면 무슨 얼굴을 할지 기대가 되거든.”
“나 같으면 일을 망친 뒤에는 모습을 나타낼 생각은 안 할 텐데.”
킬만이 피식 웃었다.
자신도 책임질 위치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는 킬만이 아니라 치료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질 일이 없으니 알아서 움직이면 그만이거든.”
“말을 들어보니 치료사가 주도하는 일 같은데 네가 제멋대로 행동해도 되는가?”
“그러니까 더욱 일을 망쳐야겠지! 별것도 아닌 주제에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여기저기 나대는 꼴이라니.”
킬만의 말에는 치료사에 대한 질투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김검천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알기로는 마스터 나이트라면 국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국왕과 테이룬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보였다.
그런데 킬만은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해 안달 난 모습으로 보였다.
왕국과 제국의 차이인지 제국의 황제가 특출나서 그런건지는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쿠퍼가 양손의 금속 망치를 맞부딪히며 소리쳤다.
- 깡.
“그래서 그놈의 황제가 시키더냐? 우리를 죽이라고? 네 욕심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거겠지!”
킬만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저런 하찮은 놈이 자신을 놀리는 것도 모자라 황제 폐하까지 무시하다니.
화가 난 킬만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 부웅.
금속 망치가 바람을 가르며 킬만에게 날아들었다.
쿠퍼가 즐겨 쓰는 금속 망치 투척술이었다.
그 뒤를 따라 쿠퍼가 금속 망치를 두 손에 쥔 채 킬만에게 달려들었다.
황제의 이야기를 꺼낸 건 킬만의 집중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도발이었다.
“마스터 나이트라도 이걸 맞으면 멀쩡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때릴 수 있다면 말이지!”
킬만의 검이 뽑히며 오러의 푸른빛을 발했다.
순식간에 발동시켰기에 완전한 오러 소드는 아니었지만 금속 망치를 벨 정도는 되었다.
오러 소드는 금속 망치의 머리 부분을 잘라갔다.
- 카카각.
“아니?”
오러로 베었는데도 도중에 멈춰 검이 끼이는 바람에 움직이기 힘들게 되었다.
아무리 오러 소드가 완벽하지 않고 두꺼운 금속 부분을 베었다고 해도 예상외의 일이었다.
쿠퍼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남은 금속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오러를 상대하려고 제작한 경험을 이용, 비즈릴로 아다만임을 금속 망치에 붙였다.
무엇이든 자르는 오러라지만 3대 금속을 이용한 저 두께를 단번에 자를 수 없는 것이다.
킬만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스러지려는 순간이었다.
킬만의 검에서 다시 푸른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쿠퍼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흠!”
쿠퍼가 급히 금속 망치로 가슴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 같아서는 물러서지 않고 금속 망치로 킬만의 머리를 그대로 내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본능은 공격했다가는 그대로 쪼개져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쿠퍼가 약세를 보이지 않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고통스럽게 죽여준다며? 고작 이런 상처라니 제국의 마스터 나이트는 거짓말쟁이야.”
“호오,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번에는 확실히 두 조각으로 만들어 주마!”
킬만의 경고에도 쿠퍼는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금속 망치를 움켜쥐었다.
이번에야말로 킬만의 머리통을 박살 내줄 생각이었다.
김검천이 그런 쿠퍼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여기서부터는 나에게 맡겨라. 쿠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