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선으로 귀환해서 이세계 최강-94화 (94/250)

94화

혼자서 영광의 홀을 걷고 있던 귀족은 제국 변경백의 아들이었다.

변경백은 국경을 지키는 고위 귀족.

보통 귀족은 계승 귀족이라 불리며 작위는 자식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런 계승 귀족의 경우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결국 그 작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황제였다.

어디까지나 변경백은 황제의 신하인 것이다.

그렇기에 변경백은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기 위해 황제를 알현하러 황성에 온 것이었다.

변경백의 아들은 황성에 처음 왔기에 주변을 구경하다 그만 변경백과 헤어진 상태였고.

그래서 혼자 영광의 홀을 헤매는 중인 것이다.

변경의 영지에서는 변경백이 법이었고 그의 아들은 규칙이었다.

황제가 위에 있다고 하나 직접 어떤 존재인지 겪어 보지 못한 변경백의 아들이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황성이라고 해서 없던 조심성이 갑자기 생겨날 리 없었다.

그런 변경백의 아들이 영광의 홀에서 겨우 만난 사람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젠장, 여기는 왜 이렇게 길 찾기가 힘들어? 아버지도 놓쳐버리고 말았잖아. 거기. 너.”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30세는 넘지 않을 것처럼 생긴 금발의 청년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불렀소?”

변경백의 아들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변경백의 영지에서 저런 식으로 자신을 대했다면 당장 벌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잘생긴 상대였기에 마음에 더욱 안 들기도 했고.

그래도 황성 안이라고 변경백의 아들은 생전 처음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말이 짧군. 변경의 영지였다면 당장 널 잡아 꿇린 다음 목을 베었을 것이었다.”

“목은 그렇다 치고 그보다 부른 용건이 뭐요?”

건방진 대답에 변경백의 아들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목을 치고 싶었다.

실제로 변경의 영지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다닌 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에게 급한 건 청년의 목숨이 아니라 목적지까지의 길이었다.

변경백의 아들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이 몸으로 말할 거 같으면 변경백의 아들이다. 그것도 오늘은 변경백의 작위를 물려받으려고 황성에 왔으니 변경백이나 다름없는 몸이지.”

“오, 그거 참 대단하시군요. 그런 대단하신 분이 왜 부르셨는지요?”

“길을 물어보려고 해서다. 어디가 황제가 있는 곳이냐?”

“황제 폐하라고 부르시는 게 좋을 거 같소만.”

“흥, 뭐라고 부르든 어딘가 처박혀 있을 황제가 알 게 뭐야. 길이나 빨리 말해.”

청년이 손가락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 앞에서 뭔가가 일렁거리는 듯했다.

“저쪽으로 쭉 가시다가 붉은 비단 카펫이 나오면 따라가면 되오. 하지만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것 같군.”

청년이 간단한 길 설명과 함께 길을 떠나려고 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답변에 변경백의 아들이 검을 뽑아 청년의 목에 들여댔다.

이런 곳에서 검을 뽑아 든 것은 그 나름대로 생각은 있었다.

이곳은 황성이었기에 방문하는 자들은 자신의 품격에 맞는 옷차림을 하고 있어야 했다.

상대의 간편한 옷차림을 보니 귀족은 절대 아니었고 심부름이나 하는 시종 같아 보였다.

그런 자가 변경백의 아들인 자신에게 고개나 허리도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대응하다니.

시종 하나둘 정도는 변경백의 아들인 자신이 처리해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지금껏 변경백의 아들은 그렇게 살아오기도 했고.

청년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뭐 하는 짓인지? 이곳은 황제 폐하가 있는 곳입니다.”

“말했듯이 이 몸은 황제 같은 건 별 신경 안 써. 세습되는 지위만 인정해주면 볼 일도 없는 인간이고. 그보다 너는 뭘 하는 놈이기에 본인 앞에서 건방지게 굴지?”

“건방진 구석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냥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닌가 싶군.”

“네 이놈. 목에 검이 닿아있는데도 여전히 그런 태도냐?”

이런 상황에서도 담담한 반응에 변경백의 아들은 그대로 검을 그어버릴까 생각했다.

변경의 영지에서 망나니로 이름을 날리던 그였으니까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아들아.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멀리서 변경백의 말소리가 들렸다.

변경백의 아들이 청년을 내버려 둔 채 변경백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이쪽입니다. 잠시 길을 잃었습니다.”

잠시 후 변경백이 다가오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하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거기서 혼자 검을 빼 들고 뭐 하는 짓이냐?”

“혼자요? 여기 시종 녀석이… 응?”

청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에 검을 대고 있었는데도 사라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변경백의 아들은 뭔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어라? 분명 여기에 시종 한 녀석이 있었는데.”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둬라. 네가 길을 잃은 덕에 약속 시간에 늦겠다. 어서 가자!”

“예. 아버지.”

변경백과 변경백의 아들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변경백과 그 아들의 뒤에 나타나더니 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변경백이 오기로 했었지. 그러면 이 몸도 슬슬 가봐야겠어.”

알현의 방.

영광의 홀을 지나 제국의 황제가 앉은 옥좌가 있는 방의 이름이었다.

알현의 방까지는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이 새겨진 제국 근위 기사들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의 신분을 확인 후 통과시켜주었다.

청년이 말했던 것처럼 알현의 방까지는 붉은 비단 카펫이 연결되어 있었다.

붉은 비단 카펫을 밟던 변경백의 아들은 어디선가 많이 맡던 냄새 같았다.

어디서 맡은 냄새인지 잠시 고민하던 그에게 변경백이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모든 행동을 조심해라. 알겠냐?”

알현의 방에 들어서자 상급 마석이 박혀있는 왕관을 쓴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의자 옆에 서 있던 그의 뒤쪽에는 단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의자 하나가 또 놓여 있었다.

그 의자 양옆에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 2명이 하얀 꽃을 들고 서 있었다.

전성기를 살짝 지난 육체였지만 여전히 탄탄한 육체의 중년 남자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그런 육체를 가지려면 그만큼 단련을 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이상한 느낌을 들게 했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변경백의 아들은 변경백의 화난 얼굴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중년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변경백.”

“죄송합니다.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전하.”

“바빠서 그런지 아무 연락이나 만남도 없었으니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그쪽은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이번에 변경백의 자리를 넘겨주려고 데려왔습니다.”

“흐음. 별일 없으면 작위의 이양 정도는 문제없겠지. 사람의 입만 조심한다면.”

“설마 이런 자리에서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할 리 있겠습니까.”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변경백의 아들은 대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 전 변경백이 전하라고 부른 것도 그랬고.

“저, 황제 폐하. 무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하시는 대화가 무슨 뜻입니까?”

중년의 남자와 변경백 모두 그 말에 멈칫했다.

중년 남자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변경백은 반대로 파랗게 질려갔다.

변경백이 급히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놈!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말대로 여기서 말을 내키는 대로 하면 안 되지.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면 어쩌겠는가.”

변경백의 말에 이어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경백의 아들은 난처한 상황에서 탈출할 기회라도 잡은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아까 전 영광의 홀에서 보았던 청년이 서 있었다.

시종으로 생각된 청년은 망설임 없이 알현의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변경백의 아들이 팔을 내밀어 막으려고 들었다.

“건방지게 어디에 함부로 들어서느냐?”

-철썩.

아들의 뺨을 갈긴 건 변경백이었다.

변경백의 아들이 뺨을 가리며 물러섰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얼굴이 부어올랐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함부로 나서느냐!”

여태까지 한 번도 변경백에게 맞은 적이 없는 변경백의 아들이 입을 열려다가 주춤했다.

변경백의 얼굴색은 이제 파랗게 질린 걸 넘어서 새까맣게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변경백의 아들이 자신이 맞은 건 잊어버린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내 잘못이 크다. 네 녀석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아니 좀 더 제대로 알려줘야 했던 것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중년 남자를 지나 단상 위의 있는 의자에 다가간 청년은 그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러자 중년 남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음. 잠시 기분 전환을 하러 영광의 홀을 거닐다 오니 변경백과의 약속이 생각나더군.”

단상 위의 의자야말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옥좌였던 것이다.

변경백의 아들이 중년 남자와 황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황제 폐하? 이쪽에 계신 분은 왕관까지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건 짐이 머리에 무거운 걸 올려두고 다니는 걸 싫어해서다. 그리고 저 아이는 짐의 뒤를 이을 황태자인 만큼 왕관 정도는 미리 써보아도 허락했으니 상관없다.”

“하지만 왕관이라는 건 곧 황제를 나타내는 권위 그 자체 아닌지요?”

“권위는 물건 따위가 아니다. 그러니 왕관은 장식에 불과하지. 짐이 곧 제국이니까.”

변경백의 아들이 중년의 황태자와 청년으로 보이는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황제는 황태자라는 중년 남자의 아들뻘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신이 나갈 듯한 변경백 아들의 반응에 가벼운 한숨을 쉬며 황태자가 말했다.

“저 옥좌에 앉아 계시는 저분이야말로 이 제국의 황제이시며 본인의 10대조 할아버지시다.”

황태자에게 확인까지 받은 변경백의 아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저지른 무례도 그렇고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황제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라서였다.

황제는 그런 변경백의 아들은 신경 쓰지 않고 변경백에게 물었다.

“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뭐였지?”

“황제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저에게 죄를 물어주시고 제발 아들의 목숨만큼은!”

- 쿵.

변경백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애원했다.

그가 변경백이 된지도 거의 30년이 지났다.

선대 변경백을 따라 황성에 왔을 때 저 황제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하필이면 그날 황제가 마음에 안 드는 신하들의 목을 자르며 즐기던 때였던 것이다.

막 성인이 된 변경백은 황제의 명으로 그걸 눈앞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 했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때와 같이 얼굴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30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말이다.

황제는 인간이라는 탈을 쓴 괴물인 것이 분명했다.

황제의 손가락이 옥좌의 팔걸이를 두들겼다.

이제 곧 그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겠다는 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