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선으로 귀환해서 이세계 최강-95화 (95/250)

95화

“짐이 물은 건 네가 여기에 온 이유다. 네 아들 목숨에 대한 애원을 듣자고 한 게 아니야.”

감정의 기복이 없는 황제의 말이었지만 변경백은 그게 더 두려웠다.

첫 대면부터 사람들의 목을 자르며 피를 갈구하던 황제도 저런 모습이었다.

인형을 망가트리듯 사람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게 바로 저 황제인 것이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은총을 받아 제 아들을 새로운 변경백으로 임명하고자 왔습니다.”

“항상 하던 일이군. 그런 거라면 허락하마. 이제부터 네 아들은 변경백이다.”

“헛, 그렇다면!”

생각하지도 못하게 일이 잘 풀린 변경백은 고개를 높이 들었다.

아들이 저지른 건 황제에 대한 불경이기에 변경백의 작위를 박탈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벌도 내리지 않은 채 아들을 변경백으로 임명하다니.

변경백은 감사와 존경의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그런 변경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가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서 노력한 건 알고 있다. 그러니 네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 몸은 황제 폐하를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빌고 싶었던 소원이 그것이었다니 어리석긴 했지만. 좀 더 나은 걸 빌었으면 좋았을 것이야.”

“황제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변경백의 의문은 곧 풀렸다.

황제 옆에 장식처럼 서 있던 붉은 갑옷 기사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에 말이다.

변경백은 차라리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눈이 안 보였으면 했다.

기사가 들고 있던 하얀 꽃이 아들의 가슴에 꽂히자 피를 흡수해 붉은 꽃이 되었으니까.

변경백의 아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즉사했다.

애초에 황제는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른 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아들을 변경백으로 임명해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변경백으로 임명하긴 했지. 불행한 사고로 죽었으니 이제 네가 다시 변경백이 되었지만.”

흘러내린 나머지 피는 바닥에 깔린 붉은 비단 카펫에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변경백의 아들이 맡은 냄새는 피 냄새였던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변경백의 눈이 풀리고 입이 벌어졌다.

황태자는 고개를 돌렸지만 황제는 담담하게 입을 열뿐이었다.

“이 정도로 정신을 놓다니 한심하군. 데리고 나가라.”

알현의 방 밖에서 대기 중인 근위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 기계적으로 변경백과 변경백의 아들을 끌고 나갔다.

황제가 붉은 갑옷의 기사에게 말했다.

“방금 그건 적엽비화摘葉飛花라는 수법이던가? 언젠가 꽃이 아니라 잎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모습도 보고 싶군. 과연 다른 대륙의 기술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니까.”

붉은 갑옷의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때 검은 갑옷의 기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황제의 앞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나타난 자의 정체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니까.

“치료사인가?”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김검천에게 쫓겨났던 치료사가 제국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타난 자가 치료사라는 걸 확인한 황제는 끌려나가는 변경백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변경백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항조차 보이지 않았다.

피가 묻은 붉은 비단 카펫은 바로 귀가 뾰족한 이종족의 시종이 바로 교체했다.

인간 제국의 황궁에 엘프 같은 이종족 시종이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입을 막아야 할 문제가 벌어지면 인간보다도 더 처리하기 쉽다는 이유였다.

변경백이 퇴장하는 모습에 치료사가 황제를 보며 말을 걸었다.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다니. 변경백이 정신을 차리면 이를 갈고 복수를 꿈꾸겠군요.”

“저 변경백이 말인가. 과연 그럴까 의문이군.”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도 변경백은 황제 폐하를 거역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짐을 접한 지 시간이 너무 지났으니까. 사람의 감정과 마음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닳아서 없어지게 마련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지요. 그게 황제 폐하에 대한 공포심이든 아니면 아들을 위한 복수심이든 간에 말이지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떤 행동이든 그저 짐의 즐거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신하의 반란을 오히려 권장하는 듯한 말이었다.

이번에는 황제의 눈길이 황태자를 향했다.

황태자는 아무런 의욕이 느껴지지 않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아이를 교육하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너는 아직도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게냐? 오늘 너의 일과는 이미 끝났다.”

“소손은 황태자인 만큼 더욱 많은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료사의 일도 그렇고요.”

“황태자라서 그렇다고?”

“그렇습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네가 황태자라면 짐은 황제다. 그러니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야.”

여전히 담담한 황제의 어조였다.

인간이 아니라 감정 없는 인형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황태자는 더욱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저건 자신의 10대조 할아버지로서 부탁한 게 아니라 황제로서 내린 명령이었으니까.

황태자가 할 수 있던 최대한의 반항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황제가 치료사에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라고 하는 녀석이 저렇게 소심하다니. 언젠가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몸인데.”

“황제가 될 수 없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겠지요. 황제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제법 오래되었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더군.”

“그렇다면 그동안의 황태자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제가 자신의 입을 옷소매로 가렸다.

입이 가려지자 안 그래도 알기 힘든 황제의 표정을 더욱 읽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사고나 병, 아니면 나이가 들어 죽어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아닌가.”

“황제 폐하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계시지만요. 300년간 황태자들이 다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군.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짐이 죽지 않아서 불만이라는 건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게 황태자 전하가 저렇게 된 이유라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말을 하던 치료사가 황제와의 거리를 점차 줄여나갔다.

열 걸음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호위의 붉은 갑옷 기사가 치료사에게 경고했다.

“물러가라. 더 이상 다가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네 목을 치겠다.”

“이런. 제가 황제 폐하를 암습이라도 할 것 같습니까?”

“그건 이 몸이 알 바가 아니다. 그저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뿐.”

붉은 갑옷 기사가 살짝 허리를 숙여 몸의 중심을 이동시킨 채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한 걸음만 더 옮긴다면 바로 치료사의 목을 치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치료사가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 호위 기사가 너무 압박하는 것 같은데 개입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건 계약에 없는 내용이라서 말이야. 그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 물러서는 게 좋아.”

“황제 폐하의 말을 안 따르는 기사라고요? 그는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까?”

“우연히 계약을 맺고 호위 기사로 삼았을 뿐이다. 너도 비슷한 처지니 알 것이다.”

“일종의 용병입니까. 황제 폐하의 호위로 삼을 정도라면 용병왕의 실력 정도는 되겠군요.”

“네가 알아야 할 일은 그런 일에 관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왕국 일에 대해서나 말해보도록.”

치료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패했다는 보고는 예전에 올렸을 터였다.

이제 와서 굳이 그걸 다시 묻는 이유는 뻔했다.

황제에게 있어서는 마스터 나이트를 다루는 것보다 치료사 자신이 더 신경 쓰일 테니까.

치료사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긴 하지만 복종할 의무는 없었다.

치료사에게 있어 가장 먼저 따라야 하는 건 황제보다 초월 존재의 말이었으니까.

“왕국 일에 대해서 뭔가 속인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자네는 짐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지만 또한 초월교에 속해 있는 몸이니까. 하나 묻지. 짐과 교황, 어느 쪽의 명령이 먼저인가?”

“초월교의 교황 성하는 아직 없습니다만. 그래서 교황을 대리하는 추기경단이 있고요.”

“그래서 물은 건데 대답을 회피하는군. 대답하기 싫다면 왕국 일에 대해서나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해보도록.”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테이룬 경과 그 동료들에 의해 일이 실패했다고 보고드렸습니다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현재 왕국의 상황을 보면 국왕의 세뇌도 애초에 불완전했던 것 같더군.”

황제의 눈동자가 세로로 가늘어졌다.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고 세뇌에 대한 건 전적으로 치료사의 문제였으니까.

테우펠 공작이 죽었더라도 다른 귀족을 조종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치료사가 제대로 국왕만 처리했다면 말이다.

뭘 말해도 황제의 마음에 들 답변이 없던 치료사는 그저 한 마디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모든 것은 초월 존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툭툭툭.

황제가 의자 팔걸이를 두들기는 소리가 커졌다.

“초월교에 내려오는 성스러운 법문인가. 짐이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야. 거기다 짐의 충성스러운 기사들 중 한 명인 킬만의 연락이 끊어졌는데 그것도 이유를 듣고 싶군.”

“그건 저도 모릅니다. 마스터 나이트인 킬만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저에게 없으니까요.”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모르는 걸 답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

“흐음, 보고 들은 것과 차이가 없군. 이만 돌아가도 좋다.”

그렇게 돌아서는 치료사를 향해 황제가 깜빡했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치료사.”

“예. 황제 폐하.”

“얼마 안 있어 짐이 태어난 300주년을 기념할 것이야. 그때 자네가 있어 주었으면 하는군.”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의 일인데 제가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치료사가 영광의 홀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황제가 그제야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다시 드러난 황제의 입가는 일그러져있었다.

잠시 눈을 돌리는 사이에 황제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치료사에게도 따로 사람을 붙여라.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을 거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종족에 대한 일은?”

“진행 중입니다.”

“왕국과의 전쟁이 무산되었다고 해도 모든 계획이 끝난 건 아니지. 그건 계획의 일부일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황제가 알현의 방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축제는 다들 즐거울 것이야. 누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후후후, 하하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