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잠시 후 마을 광장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다.
- 쾅!
“으악! 이게 뭐야?”
“석상! 석상이 박살 났어!”
“하필이면 이쪽 부위가 날아갔다고! 이래가지고는 어디다 쓰지도 못하겠는데?”
김검천과 쿠퍼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다가 워스덤을 바라보았다.
들리는 소리로 보아 인명 피해는 없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는가.
사고를 친 워스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할 말은 했다.
“크흠. 이게 다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조그만 희생일 뿐이지.”
“조그만 희생 몇 번만 더 일어나면 마을이 터져나가겠는데요?”
김검천은 쿠퍼가 워스덤을 친근하게 대하지 않았던 이유를 하나 알 것 같았다.
사람은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곁에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워스덤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잘 보았겠지? 이게 마석의 반발력을 이용해 만들어낸 위력이지.”
“예전부터 연구하시던 결과가 잘 나오신 모양이네요.”
“여행을 하면서 이것저것 연구한 성과지. 던전 같은 것에 처박혀 연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가끔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좋은 결과가 나오거든.”
“우리가 여기 온 이유와도 비슷하네요.”
“이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머릿속에 박혔을 테니 여기에 대해 더 알려주도록 하지!”
워스덤은 그런 몸으로 무슨 힘이 났는지 쿠퍼를 한쪽 구석으로 이끌고 갔다.
그들을 따라가지 않은 김검천에게 미리내가 물었다.
[들을만한 정보인데 안 따라가시는 겁니까?]
“굳이 나까지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그런 건 나중에 쿠퍼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내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니잖아?”
[하긴 김검천 함장님이 뭐든지 하실 필요는 없지요. 저희한테 시키면 되니까요.]
두 사람을 놔둔 채 김검천은 폭발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 궁금해져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도착하자 석상의 머리는 어디 가고 몸통만 남아있는 게 보였다.
드워프가 망치를 들고 석상을 내려치려는데 엘프가 막아서고 있는 중이기도 했고.
신기한 광경에 김검천이 보고 있자니 데탈이 달려와 사정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김검천님. 저 드워프 좀 말려주십시오. 석상의 얼굴이 날아가니까 갑자기 자기 작품을 망쳤다고 아예 박살 내려고 하지 뭡니까?”
김검천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갔다.
드워프라는 종족은 자신이 만든 작품이나 물건에 대해서 까다롭다고 들었다.
머리가 날아간 석상은 쓸 때도 없었으니 아예 박살 내 재활용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단호히 입을 열었다.
“데탈.”
“예. 말씀만 하시지요.”
“석상의 머리가 날아갔는데 어디다 쓰려고 그러나? 차라리 드워프가 마음대로 하게 놔둬.”
“하지만 저건 김검천님을 위한 석상이었는데요.”
“그러면 더욱 없애야겠지. 내 목이 날아간 걸 여기다 전시해 두자니 나와 싸우자는 의미냐.”
데탈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김검천의 말대로 저걸 저대로 놔두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저 엘프는 왜 드워프의 행동을 막아서고 있는 거지?”
“석상을 부숴서 없애려는데 드워프의 못난 작품은 많은 사람이 봐야 한다며 막아서던데요.”
“엘프와 드워프 사이가 나쁘다더니 별 걸 가지고 다투는군. 아무튼 석상은 파기하도록.”
데탈이 이야기를 전하러 간 후 워스덤과의 일이 끝났는지 쿠퍼가 돌아왔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 김검천이 물었다.
“워스덤에게 배운 지식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도 있는 건가?”
“그보다는 마석의 반발력을 위해 필요한 소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급 마석도 이미 우리 손에 있지 않은가.”
“마석 쪽이 아니라 아까 실험을 위해 마법 재료를 수통에 넣었지 않습니까? 그 재료를 구해야 한답니다.”
“구하기 힘든 재료인 모양이군. 구할 방법은?”
“그게…. 드워프에게서 구할 수 있긴 한데 그건 그들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김검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워스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구하기 힘들 재료라면 이미 가지고 있는 워스덤에게 얻어내고 싶군. 그는 어디에 있는 건지?”
“떠났습니다. 거기다 가진 재료는 우리에게 보여줄 때 다 소모되었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귀중한 재료인지는 몰라도 말도 못 붙일 정도는 아니겠지. 데탈!”
김검천이 호출하자 데탈이 하던 일을 놔두고 달려왔다.
엘프와 드워프 사이에 끼어서 고생 중이었는데 마침 김검천이 부른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저기 있는 드워프하고 지금 이야기 가능한가?”
“김검천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다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주의하셔야 합니다.”
“혹시 드워프는 사람이 가까이 가면 물기라도 하는가?”
“하하하,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드워프가 사람을 물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무는 대신 들고 다니는 금속 해머로 사람의 머리를 박살 내니까요. 그쪽을 선호하거든요. 손맛이 느껴진다나?”
“…그 종족 참 성격 한번 화끈하군.”
데탈은 자기 머리 대신 드워프의 해머가 달리는 건 원하지 않았다.
데탈은 대화가 들릴까 봐 슬쩍 드워프의 눈치도 살피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은 입 대신 손을 쓰는 걸 선호하는 성격입니다.”
“말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냥 해머를 휘두른다는 말이군.”
“그게 저 종족의 특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엘프와는 다르게요.”
“엘프는 손을 쓰는 대신 대화를 좋아하는가.”
“저쪽은 몸을 움직이는 대신 입을 놀리는 게 좋은 모양이니까요.”
“말만 들으면 평화주의자처럼 들리는걸.”
“엘프의 대화를 듣다가는 원하는 시간 내에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문제지만요.”
“얼마나 오래 걸리길래?”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시간이 걸립니다. 한때는 인사만 하는데 하루가 다 갔다나요? 요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요. 수명이 긴 종족들은 그래서 문제라고요.”
“뭐, 내가 볼일이 있는 건 드워프니까 상관없겠지. 일단 소개를 부탁하지.”
데탈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화가 난 드워프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 같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김검천의 말이 있었기에 데탈은 드워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봐. 드워프.”
“인간. 이 몸에게는 샤칸이라는 우리 부족에서 물려받은 이름이 있다. 제대로 불러라.”
“그래. 샤칸. 아무래도 좋은데 저분께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샤칸이 김검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데탈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이가 나쁜 엘프와 다퉈서 그런지 샤칸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저 인간이 뭐 어떻다는 거냐?”
“저분은 김검천 대공 저하시다. 이 왕국에서 국왕 전하 다음으로 높으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왕세자가 아니라? 아무튼 인간의 지위가 우리 드워프에게 무슨 상관이더냐?”
“네가 드워프니까 이렇게나마 미리 말하는 거다. 저분은 대공 저하일 뿐만 아니라 본인이 존경하는 분이기도 해. 그러니 무례를 저지르지 말라는 거야.”
“그건 이 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인간!”
샤칸이 소리를 지르며 금속 해머를 높이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엘프 때문에 짜증 난 상태였는데 데탈마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물론 샤칸이 금속 해머를 들어 올린 건 실제로 내려치려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샤칸은 잠시 위협을 한 다음 내려놓을 작정이었다.
“큭.”
옆에서 엘프가 웃음을 터트리지만 않았다면.
샤칸의 귀에는 그게 비웃음으로 들렸다.
엘프의 목소리에 열을 받은 샤칸은 조건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금속 해머를 내려쳤다.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 샤칸은 눈앞에 있는 데탈이 엘프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수십 년 이상을 다퉈온 엘프는 이 정도의 공격에 당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하나 문제가 있다면 데탈은 엘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헉!”
“위험해!”
“젠장!”
주변 사람들과 샤칸의 고함 소리를 들은 데탈이었다.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데탈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용병이라지만 자신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지는 걸 볼 정도로 대담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샤칸의 금속 해머는 데탈의 머리를 박살 내지 못했다.
- 콰쾅!
주시하고 있던 김검천이 금속 해머의 머리 부분을 숄더 캐넌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리는 샤칸에게 김검천이 다가섰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샤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았지만 무리하게 고집을 부렸다.
“흥, 인간. 잠깐 실수를 했을 뿐이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 아닌가.”
“그렇군.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지. 다만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실수가 아니겠지.”
“인간 따위가 뭐라고…. 컥!”
김검천은 한 손으로 샤칸의 얼굴을 잡고서 들어 올렸다.
단순해 보였지만 아이언클로라고도 불리는 기술이기도 했다.
아이언클로에 당한 샤칸은 지면에서 발이 뜨면서 버둥거렸다.
샤칸이 상대적으로 짧은 팔로 얼굴을 쥔 손을 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파워드슈츠에 의해 강화된 악력은 샤칸의 양손보다 강했으니까.
그 상태로 김검천이 샤칸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좋아하지만 가능하면 김검천이라는 이름을 불러줬으면 하는데.”
“크흑. 인간을 인간으로 부른 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냐?”
“너도 드워프가 아닌 샤칸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왜 너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너희들 따위에게 샤칸이라는 이름을 불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드워프라고 종족 명으로 불리는 게 좋은 건가?”
“이름을 부르라고 했던 건 인간들이 우리에게 붙인 호칭이 드워프이기 때문이야.”
“드워프라고 불리고 싶지 않아 자신의 이름을 밝힌 거군. 그렇게 인간이 싫은가?”
“인간은 믿을 수 없으니까. 약한 주제에 비열하기 짝이 없고 이익이 된다면 뭐든 하지!”
보통은 머리를 붙잡히면 으깨지는 지독한 고통 때문이라도 용서를 구하게 된다.
이런 고통에도 이렇게 버티는 걸 보니 샤칸의 고집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꽤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은 상태이던가.
하긴 프리 같은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데탈이 김검천을 말렸다.
“김검천님. 저를 위해 나서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 정도에서 그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샤칸이 해를 입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다른 드워프들이 복수라도 하러 나서기라도 하는가.”
“자신들이 이해가 안 가면 끝을 볼 때까지 덤비는 부분은 있긴 합니다.”
“지금처럼 말이지?”
데탈이 김검천의 손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샤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샤칸이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 인간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한다면 이종족들은 이유 없이 사냥당하기도 했다.
특히 인기 있는 이종족은 드워프와 엘프였다.
그나마 샤칸이 부족을 떠나 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개중 강한 편에 속해서였다.
드워프들은 인간에 비해 숫자가 적은 만큼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전투력이 강한 편이었다.
일반 드워프들도 타고난 육체의 힘으로 하급 기사에 맞먹을 정도였으니까.
샤칸은 그런 드워프 중에서도 강한 편으로 상급 기사 정도는 되었다.
다만 그런 샤칸도 상대를 잘못 만난 셈이었다.
김검천은 상급 기사였던 근위 기사도 가지고 놀 정도니 반항할 상대를 잘 못 만난 것이다.
잠시 후 김검천은 제압했던 샤칸을 그냥 놔주었다.
땅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찍은 샤칸이 엉덩이보다 더 아픈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편으로는 옆에 굴러다니던 망가진 금속 해머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김검천이 경고했다.
“그냥 놔주었을 때 가만히 있는 게 좋아. 난 내게 덤비는 녀석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것 마음에 드는데? 네가 싫어한다니 더 해야겠군!”
샤칸은 김검천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금속 해머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김검천이 그 전에 금속 해머를 밟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걸 본 엘프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끼어들었다.
“엘프가 드워프와 같이 거론된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군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어찌 우리와 동급이라는 겁니까?”
“루시엘! 이 귀쟁이가! 아까 옆에서 도발하는 것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러냐? 용서하지 않을 테다!”
샤칸은 꿈쩍도 안 하는 금속 해머를 내버려 두고 루시엘이라고 불린 엘프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엘이 가볍게 뛰어서 옆에 있는 집 위로 올라갔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그 짧은 다리로 여기까지 뛸 수나 있겠습니까?”
“이 자식이?”
김검천이 나무집을 박살 낼 기세로 달려가는 샤칸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샤칸이 마구 팔다리를 휘저었다.
“놔! 놓으라고! 일단 저 귀쟁이놈을 박살 내야 해!”
“그걸 말릴 생각은 없다. 다만 이쪽의 일부터 먼저 해결했으면 하는데.”
“놓으란 말이다. 인간!”
김검천이 샤칸의 몸을 돌려 눈을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보였던 샤칸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검천의 시선과 마주치자 이상할 정도로 한기가 들어서였다.
잠시 눈을 마주치던 김검천이 샤칸을 내려놓았다.
샤칸은 아까 전보다는 얌전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검천이 그런 샤칸에게 말했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건 그렇다 치고 반말은 그만두지?”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용어가 서툰 게 뭐가 잘못인가? 이종족인 이 몸이 말이다.”
그런 샤칸의 불만은 김검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구만 해도 자기가 태어난 나라 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몇 마디 하는 게 아닌 원주민 정도의 수준으로 말하는 건 특히 그랬고.
그렇게 따지면 샤칸은 능력 있는 아인 아닌가.
드워프어 외에도 공용어까지 하는 2개 언어 구사자였으니까.
“그러면 드워프어로 말하던가.”
“정말인가?”
“물론이다.”
샤칸이 그 말을 듣자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이지만 호의가 담긴 시선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워프어를 아는 인간이 흔한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김검천이 드워프어를 아는 건 아니었다.
언어 번역기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드워프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한 샤칸이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만약 내게 물어보면 나는 드워프. 의외로 드워프어를 읊어라 잘합니다.”
김검천의 언어 번역기가 오랜만에 활약했다.
김검천도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