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김검천은 긴장하고 있는 루시엘에게 단호히 말했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그…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지금 해치우거나 나중에 처리하거나 똑같다. 어차피 할 거면 빨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루시엘은 떨리는 손으로 눈앞에 있는 붉은 덩어리를 포크로 찍어 올렸다.
냄새만 맡아도 코를 찌르는 듯한 기분에 눈물마저 저절로 나왔다.
붉은 덩어리를 겨우 먹어치운 루시엘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역시 맵군요. 그러니까 이것의 이름이…”
김검천이 물컵을 넘겨주며 알려주었다.
“아아, 이건 떡볶이라는 거다. 지구에서 인기 있는 분식들 중 하나지.”
겨우 살아난 루시엘이 옆에 있는 야채 순대를 입안에 넣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떡볶이보다 오히려 이게 마음에 듭니다. 매운 건 저에게 너무 자극적이군요.”
원래 매운 건 맛이 아니라 혀의 통점을 자극해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옆에서 샤칸이 분식을 열심히 먹으면서 말했다.
“모르는 소리를! 야채가 들어간 담백한 순대보다는 떡볶이같이 자극적인 음식이 최고지!”
김검천이 샤칸의 키만큼이나 높이 올라간 접시를 보며 말했다.
“너한테는 기름진 고기 순대가 취향이겠군. 그것보다 음식은 마음에 든 것 같은데.”
“물론이다! 인간의 음식이 이렇게 맛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런 맛이라니!”
루시엘과 샤칸이 함선 안에서 밥을 먹게 된 이유가 된 발단은 별거 아니었다.
목숨만큼 중요한 수염이 잘려나간 샤칸이 불쌍해서 밥 한 끼라도 먹이려고 데려온 것이다.
여기까지 먼 길을 왔으니 고생한 만큼 입이라도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맛있는 밥을 먹던 샤칸이 쿠퍼가 고생하는 걸 보자 도움을 준 게 계기가 되었다.
샤칸의 도움이 없었다면 파워드슈츠의 강화에 오리하르콘을 적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쿠퍼가 오리하르콘을 활용하기에는 샤칸보다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건 네가 나에게 협조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네 덕분에 성공했으니까.”
“오리하르콘 같은 특이한 금속이나 광물을 다루는 데 이 몸만 한 자가 또 어디 있겠나?”
샤칸의 자랑을 듣던 김검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이제 힘을 쓸 시간이었다.
김검천이 쿠퍼에게 눈짓을 했다.
피곤해 보였지만 쿠퍼는 밝게 대답했다.
“준비는 이미 끝났으니 파워드슈츠만 새로 장착하시면 될 겁니다.”
“수고 많았다. 쿠퍼. 여기서부터는 나에게 맡겨라. 그리고 샤칸.”
김검천은 차단문으로 이동하기 전에 상자 하나를 가지고 샤칸에게 다가갔다.
샤칸이 김검천이 내민 상자를 바라보며 눈을 멀뚱거렸다.
“이건 뭐냐?”
“수염을 자른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여태까지 네가 노력해준 대가이기도 하지.”
“필요 없다. 대가는 여기에 있으며 먹고 마신 걸로도 충분했다.”
“마음에 들었다니 기분 좋지만 네 목숨을 약간의 음식으로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냥 받아주었으면 하는군. 그럼.”
서로 볼일이 끝난 상태인 만큼 샤칸과 루시엘도 그냥 자기 마을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김검천과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샤칸이 상자에 손을 대었다.
루시엘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지켜보았지만 김검천이란 인간은 믿을만한 것 같습니다. 볼일이 다 끝났는데도 이렇게 작별 선물까지 챙겨주다니. 우리를 도구로만 생각하는 인간들과 다르군요.”
“어이, 귀쟁이. 인간에게 먹이로 길들여지기라도 한 건가?”
“그것도 그에게 호의를 가진 이유가 되기는 하겠군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잘 알 겁니다.”
“하지만 김검천이 마음에 드는 것과 수염의 원한은 다른 이야기지. 그렇게 이별한 수염의 원한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샤칸의 눈앞에 자신의 수염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심지어 괴물과 죽을 뻔한 전투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던 수염이었다.
그런데 김검천의 손에 의해 허무하게 작별을 해버린 것이다.
루시엘이 매웠던 분식의 마무리로 쿨피스와 요구르트를 홀짝이며 대꾸했다.
“맛있는 요르구트를 앞에 두고도 드워프 다리가 짧은 만큼이나 마음도 좁은 건 어쩔 수 없나 보군요.”
“우리는 다리가 짧은 게 아니야! 이거야말로 대지 친화적인 육체라는 거지!”
“그러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고개를 들지도 말고 두 발로 서서 다니지도 말아 주시겠습니까. 드워프는 땅이나 기시지요.”
“이 자식이? 크흠.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쁠 거 같지 않군. 네 발의 드워프라니.”
“아니,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그냥 선물이나 확인하고 떠나시던가요.”
“그럴까? 선물은 죄가 없지.”
샤칸이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 있는 건 은색의 윤기가 나는 수염이었다.
그것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며 보송보송한 데다 좋은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고.
샴푸 후 컨디셔너와 영양제까지 발렸다는 건 몰랐지만 정성이 깃든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한눈에 자신의 것을 알아본 샤칸이 떨리는 손으로 은색 수염을 집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 마이 프레셔스. 내…. 소중한 보물이!”
“그게 뭡니까?”
“눈이 있는데 보고도 몰라? 이 몸의 수염이잖아!”
“당신의 수염은 황금색이었습니다만.”
“그건 오리하르콘이 붙어 있었으니까 금빛이었지. 원래는 이렇게 은색이었다고.”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습니다. 수염이 든 상자 안에 뭔가 적힌 종이가 더 들어있군요.”
“어디 볼까!”
샤칸이 적힌 내용을 읽더니 들고 있던 수염을 턱에 가져다 대었다.
루시엘이 깜짝 놀랐다.
깨끗하게 밀려 나간 턱에 가져다 댄 수염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잘려나갔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말이다.
“잘린 수염이 흔적도 없이 턱에 붙다니 이게 무슨…!”
“자신의 세계에서 가발 착용하는 기술을 응용했다고 하더군. 인간, 아니 김검천, 아니다. 앞으로는 김검천님이라고 불러야겠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샤칸이 버둥거리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루시엘이 물었다.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김검천님에게 가서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지.”
샤칸이 의자에서 뛰어내리자 루시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그도 엘프 부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샤칸과 같이 행동해야 했다.
조금 이동하자 문 너머로 김검천의 모습이 보였다.
샤칸이 그 문을 통과하려는데 벽에서 나온 보안 카메라가 나와 가로막았다.
[경고. 미인증 인원. 통과 불가. 통과 불가.]
나갈 때는 자유라지만 들어올 때는 아니었다.
샤칸이 주먹을 들어 자신을 가로막는 보안 카메라를 때려 부수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보안 카메라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드워프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멋진 장치 아닌가.
“엇,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이 늘씬하고 예술적인 곡선의 금속은!”
보안 카메라에 정신이 팔린 샤칸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루시엘이었다.
저기에 있는 김검천에게 감사하러 간다는 건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이 뭐가 좋다는 건지 엘프인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래서 드워프란.”
둘은 인증을 받지 못해 지나가지 못했지만 들어갔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었다.
김검천은 만일을 대비해 어차피 주위 사람들을 물릴 생각이었으니까.
“이번처럼 오리하르콘을 이용한 시도는 처음이니 만약을 대비해 조금 거리를 둬야겠다.”
“그래도 저는 김검천님의 옆에서 지켜볼 겁니다.”
“종류가 다른 마석의 반발을 이용하는 만큼 실패하면 폭발할 수도 있다고.”
김검천의 말에 사람들은 급히 문 옆이나 쌓아 올린 물건 뒤로 자리를 옮겼다.
해야 할 때와 아닐 때를 구별할 줄 아는 자세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꼬리를 흔들며 자신을 보고 있는 댕댕이 정도였다.
김검천이 댕댕이를 집어 피해있는 세이야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정말로 폭발하면 여기에 피해있는 정도로 무사하지는 않을 텐데.”
“김검천님에게 방해가 안 되려고 움직인 거지 목숨이 아까워서 피한 게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김검천님이 잘못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요.”
세이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검천이 세이야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그러게 말이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내가 실패해서는 안 되겠지.”
그러고 보니 운이 없다면 실패하는 순간 엔진실까지 폭발해서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었다.
김검천이 파워드슈츠의 최종 점검을 마치고 엔진실의 차단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김검천이 미리내를 호출했다.
“대충 주변이 정리된 것 같으니 해볼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그런 시간마저 저에게는 행복하니 상관없습니다.]
“고마운 말이네. 그런데 말이야. 혹시 엔진실도 여태까지 보아온 곳처럼 망가졌다면?”
[설사 그렇다고 해도 김검천 함장님이라면 어떻게든 나아가기 위한 길을 찾아내실 겁니다.]
“날 태어나게 해주신 분은 부모님들이지만 날 알아주는 건 미리내구나. 좋아, 시작하자.”
[증폭 배열 개시.]
오리하르콘으로 도금된 상급과 중급 마석이 각자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석을 도금한 이유는 마석 간 접촉저항을 낮춰 에너지 손실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로 본질이 다른 에너지가 부딪혀 폭발적인 위력을 내기 위한 사전 준비기도 했고.
- 파지직. 파칙.
김검천의 파워드슈츠 왼쪽 부분에서 번개처럼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오른쪽 부위에서 그 에너지를 흡수한 후 다시 왼쪽으로 전환시켜 증폭시켰다.
파워드슈츠가 빛의 기둥이라도 된 듯 백열하며 열기를 뿜어냈다.
가끔 제어 못 한 에너지가 주변의 물건에 부딪히자 바로 재로 변할 정도의 고온이었다.
김검천이 진작 피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피해있는 장소에서 머리만 내민 채로 숨을 죽여 가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김검천 함장님. 교류 마석 에너지가 한계에 달했으니 언제든 신호만 보내시면 됩니다.]
김검천이 달아오른 파워드슈츠를 이끌고 엔진실 차단문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지금!”
[마석 충돌 개시. 증폭.]
- 펑!
그와 동시에 파워드슈츠 등 부분이 폭발하며 장갑이 깨져나갔다.
장갑의 파편이 함선의 벽에 박혀 들어갈 정도였으니 사람이 맞으면 즉사였을 것이다.
“크합!”
기합 소리와 함께 엔진실의 차단문이 단번에 열려나갔다.
세이야가 기뻐하며 일어서려는데 쿠퍼가 손짓으로 말렸다.
엔진실을 막고 있는 차단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아직 끝난 게 아닌 것이다.
[엔진실 1차 차단문 개방. 한계 폭발 에너지 종료까지 앞으로 30초.]
“그 정도면 충분해!
증폭된 힘으로 돌진한 김검천은 마지막 남은 차단문을 잡고 전력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 파칙. 퍼펑!
파워드슈츠의 여기저기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김검천 함장님. 파워드슈츠의 내구도가 한계입니다. 사용 중인 에너지를 낮춰야 합니다.]
“그러면 난 반대로 에너지를 높이는 시도를 하겠다!”
[그러면 파워드슈츠가 몇 초 만에 망가질 겁니다.]
“어차피 부서질 물건이라면 차라리 모험을 하는 게 나아!”
[알겠습니다. 조언은 제가 하지만 결정은 김검천 함장님의 몫이니까요. 5,4,…,1. 부스터.]
“으아아!”
김검천의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섰다.
한계 이상의 에너지를 감당해야 할 파워드슈츠는 초단위가 지날 때마다 박살 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한계에 달한 건 차단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 키이잉.
“열렸다!”
김검천이 가능한 만큼 차단문을 열고 몸을 날렸다.
- 탕!
밀린 반작용으로 차단문이 다시 급히 닫혔다.
그 바람에 파워드슈츠의 다리 부분의 장갑이 문에 끼여 버렸지만 김검천은 기쁘기만 했다.
도구는 망가졌지만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하하! 드디어 함선의 엔진실이 열렸다!”
[축하드립니다. 김검천 함장님.]
“그러게 말이야. 이제 함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가. 그랬으면 좋겠군.”
김검천은 긴급 회피 모드를 사용해 파워드슈츠를 벗었다.
맨몸으로 혼자 남겨진 건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지만 엔진만 가동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엔진실은 어두웠기에 김검천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엔진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김검천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