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병을 구박줄 때도 가만히 있던 경비 기사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마차를 향해 뛰어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쿠퍼가 슬그머니 마부석에 올려져 있던 금속 해머를 손에 쥐었다.
수틀리면 일단 경비 기사의 머리 부분에는 금속 해머가 대신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쿠퍼는 그런 기사의 부름을 모른 척 마차의 속도를 높여 이 자리를 뜰 것인지 고민도 했다.
그런 쿠퍼의 망설임은 김검천의 말 한마디에 사라졌다.
“멈춰라.”
“멈추라고 하셔도 저자가 무슨 일로 부르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바에는…”
“상관없다. 멈춰. 금속 해머는 최악의 상황에 최선의 대화 수단으로 사용해도 된다.”
김검천의 말에 따라 마차를 멈추자 경비 기사가 쿠퍼에게 다가왔다.
쿠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런가 싶어 금속 해머를 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생각과는 다르게 경비 기사는 쿠퍼를 지나쳐 마차에 탄 김검천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실은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어서 실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김검천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귀족의 모습으로 경비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함선의 함장이자 왕국의 대공이기도 한만큼 이 모습이 그에게 어울렸다.
경비 기사는 김검천의 시선을 피해 샤칸과 루시엘에게 눈을 돌렸다.
“실은 저 두 이종족 때문입니다.”
“내 노예인 드워프와 엘프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예. 저 둘에게 노예용 마법 목걸이가 걸려 있기는 하나 아직 작동하지 않고 있더군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달려온 겁니다.”
“호오. 제국 기사는 타국의 귀족도 걱정해주는 건가?”
“높으신 분들은 어딜 가도 높으신 분 아니겠습니까?”
“제법 귀를 즐겁게 만들 줄 아는군. 알겠다. 그러면 이만 가봐도 된다.”
김검천의 말에도 경비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지?”
“기왕 이렇게 이야기 드렸으니 기사인 제가 옆에서 인증이 끝날 때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노예 상인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저런 기본적인 인증절차도 그냥 넘어가다니요.”
경비 기사는 김검천에게 잘 보일 목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민폐였지만.
김검천이 경비 기사를 볼 때와 다른 표정으로 루시엘과 샤칸을 돌아보았다.
눈만 끔뻑이며 멍하니 있는 샤칸과 달리 루시엘은 망설임 없이 김검천에게 다가섰다.
소동을 원하지 않아 노예 역할을 자청했으니 끝까지 자기 소임을 다할 생각이었다.
“주인님. 어서 인증을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뭔가 미흡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시엘은 김검천의 손을 자신의 목걸이를 향해 이끌었다.
노예라는 루시엘이 오히려 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루시엘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 순간 김검천은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을 보니 피가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다.
루시엘이 마나의 힘으로 김검천의 손가락을 벤 것이었다.
루시엘의 뜻을 무시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라 김검천은 목걸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목걸이는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샤칸은 루시엘이 했으니 자신도 못 할 것 없다는 듯 경쟁하는 것처럼 노예 인증을 마쳤다.
지켜보던 경비 기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법 목걸이를 활성화 안 하신 이유를 알겠군요. 목걸이로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순종적인 노예라니 부럽습니다.”
경비 기사가 루시엘에게 손을 뻗었다.
- 탁.
루시엘이 경비 기사의 손을 쳐냈다.
경비 기사가 놀란 눈으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 같은 인간이 만질만한 몸이 아닙니다.”
“맞아. 맞아. 꺼져라. 제국 놈아!”
루시엘에 이어 샤칸마저 동의하고 나서자 경비 기사가 이를 갈았다.
“이 노예에 불과한 놈들이 어딜 감히?”
김검천이 그런 경비 기사에게 차갑게 말했다.
“뭐하는 짓인가.”
“보셨듯이 노예 주제에 기사인 저에게 대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 그러니까 준귀족인 기사에게 평민보다도 못한 노예가 대들었습니다만…”
“저들이 노예인 건 맞다. 하지만 너도 보았듯이 저 녀석들은 다른 녀석들과 달라. 내 노예인 것이다.”
“그래도 고작해야 노예들이지 않습니까?”
“1만 골드. 그게 이들의 몸값이지. 네가 이 녀석들에게 상처라도 내면 얼마나 보상할 수 있을까? 네 손을 잘라도 해결 못 할걸.”
경비 기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펴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한 달 월급으로 받는 돈이 5골드였다.
성질대로 행동했다가는 손이 아니라 인생의 절반을 팔아도 배상할 수 없었다.
경비 기사가 주춤하는데 손바닥 위로 골드가 떨어져 내렸다.
언뜻 세어 보아도 이번 달 월급은 넘을 듯했다.
고개를 든 경비 기사를 향해 골드를 뿌린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모자란가?”
“에? 그게…”
당황한 기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손바닥에 몇 개월 치 월급에 해당하는 골드가 쌓여갔다.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돈에 기사가 오히려 겁을 먹고 외쳤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런 큰돈을 주실 이유가 없어서 놀란 겁니다.”
“너에게는 큰돈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푼돈에 불과해. 나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하사하는 것이야. 아니면 나를 잡고 돈을 더 내놓으라고 시비라도 걸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긴 1만 골드나 되는 노예를 2명이나 부리는 높으신 분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일 것이다.
경비 기사는 뜻하지 않은 행운에 급히 인사를 한 후 관문으로 돌아갔다.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비싼 몸이었습니까?”
“비싸다니?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물론 너희들을 돈으로 구입할 수 있다면 말이지.”
샤칸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다 쳐도 저 제국 놈에게 아깝게 골드를 뿌릴 이유가 있었나? 힘이든 계급이로든 찍어 눌러도 될 것 같던데.”
“나 혼자였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다르지 않나? 기사가 노예라고 생각되는 너희들에게 모욕을 당한 셈이니 혹시 모를 뒤끝을 없애기 위해서지.”
의외로 샤칸이 김검천의 말에 뭔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녀석의 불만을 돈으로 무마한 건가.”
“그 정도 돈이라면 노예에게 몇 마디 들은 정도는 바로 잊어버릴 가치가 있을 테니까.”
“아하, 모욕이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골드를 투자한 거군!”
“그런 셈이지. 만약 그걸로 만족 못 한다면 더 많은 골드를 주면 그만이고.”
“과연. 그런데 어디서 그런 골드가 나온 거지?”
“왕국 수도에 다녀왔더니 알아서 돈이 증식하더군.”
방금 건 세이야가 국고를 털어서 가져온 것을 반환하고 남은 걸 김검천에게 넘겨준 것이다.
김검천도 준다는 걸 사양할 필요는 없어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유용하게 사용한 거였다.
뒤에서 벌어지는 약간의 소란을 무시한 채 마차는 영지 안으로 진입했다.
김검천이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길을 가다 보니 제법 넓은 장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이 있던 것이다.
“자자, 음식은 많이 있으니까 다들 순서대로 받아가세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음식 자체를 무료 배급하는 모습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배급하는 자들이 음식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에 비해 받는 자들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보기에는 돼지나 먹을만한 음식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먹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배가 고파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뭔가에 홀려서 먹는 느낌이었다.
“쿠퍼. 저건 뭐지?”
“글쎄요. 저도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쿠퍼가 광장에서 떨어져서 받아온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을 잡고 물어보았다.
“실례하오. 지금 저기에서 음식을 나눠주는 건 뭐 때문입니까?”
그는 쿠퍼를 훑어보더니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등 뒤로 숨겼다.
“뭐… 뭐냐? 이건 줄 수 없어! 먹고 싶으면 저기나 가서 달라고 해!”
“하? 먹다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건 이쪽에서 거절이다! 사람을 뭐로 보고?”
쿠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료 음식이라고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남이 먹던 음식을 뺏어 먹을 사람으로 보이다니.
쿠퍼는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건에 대해서 살짝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쿠퍼의 모습을 살피더니 남은 음식을 얼른 다 먹어치웠다.
그런 후에야 대화할 생각이 났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네요. 이 음식은 중독성 있는 맛이라서 방해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런 음식이라도 계속 먹고 싶어지다니 별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음식을 뺏어 먹으려는 사람들도 나와서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 먹는 거라고요. 저기를 좀 보세요.”
쿠퍼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싸우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음식이 떨어졌다.
그러자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른 사람이 음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땅에 떨어졌으니 당연히 음식은 흙먼지로 엉망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열심히 씹었다.
마치 세상에서 다시는 구할 수 없는 맛있고 희귀한 요리라도 접한 듯이.
쿠퍼가 고개를 저었다.
“거참. 음식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저런 모습이라니. 아니면 배가 그렇게나 고픈 건가.”
“저기서 나눠준 음식을 먹어보면 이해갈 겁니다. 심지어 부자나 귀족들도 먹으러 옵니다.”
“그렇게 맛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여기 식량 사정이 그렇게나 안 좋습니까?”
김검천 밑에서 일하기 전에는 줄곧 마물의 숲 안에서 살아온 쿠퍼였다.
그러니 근래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둘 다일 거예요. 요즘은 더욱 식량을 얻기가 힘들어졌거든요. 들어오는 식량의 양은 줄고 가격은 높아졌지요. 심지어 식수원이 오염되어 못 마시는 것도 있고요.”
“제국마저도 그런 상황이라니. 그런데도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대단한데요.”
“초월교니까 가능한 일일 겁니다. 듣자 하니 제국 황실에서도 지원해준다고는 하는데 그건 모를 일이네요. 소문으로는 마법사들의 모임인 마탑에서도 도움을 준다더군요.”
정보를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한 쿠퍼가 주머니에서 실버를 하나 꺼내 들어 넘겨주었다.
“잘 들었소. 이건 이야기를 들려준 사례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이거면 오랜만에 고기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겠네요.”
그는 배식하는 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접시도 바닥에 놔둔 채 급히 자리를 떠났다.
쿠퍼가 혀를 찼다.
“거참. 왕국도 아니라 제국의 신민마저 먹을 것에 굶주리다니. 하긴 가난은 황제 폐하도 구제 못 한다고 하니까. 그건 그렇고 이걸 놔두고 갔네. 그런데 무슨 맛이기에 그렇게 중독성이 강하다는 거지?”
쿠퍼가 호기심에 접시에 조금 남은 소스에 손가락을 찍어 입에 넣어 보았다.
“윽. 이게 음식? 역겹잖아.”
그래도 확실히 중독성은 있는 맛이었다.
쿠퍼는 다시 한번 소스를 핥아 먹었다.
손가락 다음에는 손바닥으로.
그걸로도 모자라 저도 모르게 접시에 혀를 가져가려는 순간이었다.
김검천이 쿠퍼를 불렀다.
“쿠퍼. 배고프면 어디서 밥이라도 먹고 갈까?”
“아, 아닙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쿠퍼가 아쉬운 눈으로 빈 접시와 무료 배급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무료 배급소에서 더 먹고 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으니까.
배는 그렇게 고픈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무료 배급소의 음식이 먹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검천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일 수밖에.
영지를 가로질러 가다 보니 성벽 너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만 지나가면 샤칸의 부족까지 가는 길에 더 이상 제국과 엮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윽, 크흑!”
드워프 한 명이 누군가로부터 맞고 있는 중이었다.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드워프의 주인이나 높으신 분인 모양이었다.
대낮에 도로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는데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주변에 마갑을 착용한 기사들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샤칸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루시엘이 말렸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조용히 지나갈 때입니다. 우리의 목적을 떠올리세요. 샤칸.”
“그… 그렇지. 노예용 목걸이까지 차고 지나가려고 하던 참인데 저것도 참지 못하면…”
채찍으로 드워프를 후려갈기던 사람이 소리쳤다.
“으하하! 이놈의 드워프야! 맛이 어떠냐?”
“으아악!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유 따위가 필요한가? 너희 같은 것들은 죽어서 사라져야 해!
갑자기 샤칸이 자리에서 일어서다니 마차를 박차고 나섰다.
“젠장! 동족이 억울하게 당하는 꼴을 지켜보라고?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
충동적인 행동이었기에 무기도 없이 뛰쳐나온 샤칸은 두 주먹을 추켜올렸다.
그리고는 채찍을 들고 있는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웬 놈이냐?”
“암살자냐?”
“백작님을 지켜라!”
기사들이 샤칸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호위하던 기사들은 누구라도 가까이 오면 베어버릴 듯한 기세가 넘쳤다.
드워프를 때리는 사람은 제국 변경을 지키는 책임자인 백작, 변경백이었다.
변경백은 이곳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샤칸은 제대로 사고를 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