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여기 호위 기사들도 변경백을 위해 영지 안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 기사들이었다.
상급을 바라보는 중급 기사들은 물론 상급 기사마저 끼어있었다.
이 정도면 왕국에서 왕의 옆을 지키는 근위 기사단과 비슷한 급인 것이다.
드워프가 사람보다 강하다고 해도 보통은 하급 기사 수준.
호위 기사들은 그렇게 긴장한 모습은 아니었다.
거기다 돌진해오는 드워프는 무기도 없는 맨몸이었고.
샤칸이 갑자기 튀어나와 달려들었어도 호위 기사들은 여유가 있었다.
돌진하던 샤칸에게 맞아 주변으로 튕겨 나가기 전까지는.
“컥!”
“헉! 보통 드워프가 아니다!”
“맞아! 미친 드워프야!”
기사들이 샤칸을 가로막고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드워프의 키가 원래 작은 데다 샤칸은 몸까지 숙인 상태였으니 더욱 맞추기가 힘들었지만.
샤칸은 낮은 자세를 이용해 공격해 오는 기사의 다리를 잡은 채로 밀어붙였다.
기사는 넘어지며 변경백을 둘러싼 호위 기사들의 방어막을 흩트렸다.
같은 편이 장애물이 된 셈이라 기사들은 검을 든 채로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뭐지? 이 드워프는?”
“조심해라! 적어도 중급 기사 이상의 실력자다!”
“어쩌면 상급 기사의 실력인지도 몰라!”
샤칸은 멈추지 않고 채찍을 갈기던 변경백을 향해 돌진해나갔다.
멧돼지처럼 돌격하는 그에게 보이는 건 직선상에 있는 기사들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옆에서 내려찍는 상급 기사의 공격은 눈치채지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커헉!”
샤칸이 검 자루에 맞아 땅바닥에 쓰러졌다.
호위 기사 대장이기도 한 상급 기사가 그대로 샤칸의 등을 밟아 짓누른 채로 외쳤다.
“다들 뭐하나? 붙잡아!”
“예!”
그제야 호위 기사들이 샤칸의 팔다리를 구속했다.
제압한 게 확실해지자 마음을 놓았는지 그제야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드워프가 왜 변경백님을 노렸지?”
“목의 목걸이를 보니 노예인 게 분명한데.”
“노예가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하나?”
“죽고 싶으면 뭘 못할까.”
“노예는 그렇다 치고 그 주인은?”
“설마 주인이 노예에게 명령을 내린 건 아닐까? 어이.”
호위 기사들 중 일부가 샤칸이 튀어나온 김검천의 마차를 향해갔다.
변경백은 후려치던 드워프는 내버려 두고 샤칸을 향해 다가왔다.
변경백이 어딘가 공허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놈이냐? 암살을 시도한 것이.”
“그렇습니다. 각하.”
변경백은 일반 백작보다 높게 봐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기사는 각하라는 존칭을 붙인 것이다.
상급 기사가 밟고 있던 발에 힘을 주며 샤칸에게 물었다.
“이 천한 드워프 노예야. 뭣 때문에 각하를 노린 것이냐?”
“노예? 그리고 누가 인간 따위를 노리겠느냐! 같은 드워프를 때리고 있으니 화가 나서 덤벼든 것이지. 너희 같으면 동족이 맞고 있는데 안 그러겠냐?”
상급 기사가 뭐라고 하려는데 변경백이 손을 저었다.
기사를 저지한 변경백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군. 인간이라도 모두 같은 건 아니다. 그러면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무슨 소리냐?”
“신분과 계급이 있는 이 사회에서 같은 인간이라도 평등한 존재일 리가 없다는 거다. 그러는 너도 노예일텐데 대들기나 하다니.”
“노예는 누가 노예냐!”
- 촤악!
말로 대답하는 대신 변경백은 손에 들린 채찍으로 샤칸을 후려갈겼다.
눈을 부릅뜬 샤칸이 이를 다물고 비명을 참았다.
변경백 또한 험한 영지에서 성장했으니 웬만한 기사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힘껏 때렸으니 샤칸의 등은 맞은 곳의 상처가 벌어지고 살이 찢겨 나갔다.
“네 목에 목걸이만 봐도 노예 아닌가? 이렇게 채찍이 잘 감기는 걸 보니 노예의 재질도 충분하고.”
“큭큭큭. 으하하하!”
샤칸이 별안간 웃었다.
변경백은 샤칸이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해서 기분이 나빴다.
변경백이 일단 채찍을 휘두르고 보았다.
“으하하…컥!”
“맞아야 웃음을 그치나? 노예답군. 너는 뭐가 그렇게 웃기지?”
“크크, 노예의 재질이라면 네가 더 훌륭한 것 같아서 말이야.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노예를 때린다지만 너 자신도 때리고 있는 냄새가!”
엘프보다는 못하지만 드워프도 어느 정도 사람이 말하는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었다.
특히 이렇게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더욱 자세히 읽기 쉬웠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채찍을 쥔 변경백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부릅떠졌다.
- 촤악!
“커헉! 크크크, 그것도 때린다고 휘두른 건가?”
“노예라서 그런지 맞는 것에는 익숙한가 보군. 노예의 잘못은 주인의 탓이기도 하니 그에게 죄를 묻도록 하지.”
변경백이 김검천이 탄 마차를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머리 옆으로 뭔가 지나쳐 갔다.
그건 마차로 향하던 호위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호위 기사들의 책임자인 상급 기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차 주위에 쓰러져 있는 호위 기사들을 보니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상급 기사인 그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조용하고 빠르게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변경백의 호위에 정신이 팔렸다지만 눈치도 못 챈 사이에 이렇게 되다니.
마차 옆에 서있던 쿠퍼가 피에 물든 금속 해머를 쓰러진 기사 마갑에 문질렀다.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묻겠다는 건지. 능력이나 되고 나서 입을 열라고.”
김검천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변경백을 향했다.
흠칫한 변경백은 자신이 겁을 집어먹었던 게 부끄러운지 위협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아까 날 찾지 않았나? 네가 후려친 드워프의 주인인 셈이다.”
“흠, 노예 대신에 얻어맞으려고 나온 건가?”
“불쌍한 샤칸은 내버려 두고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거다. 화풀이는 그만두고.”
“화풀이라고?”
“누군가에게 맞았는데 복수할 능력은 없으니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중 아닌가? 그걸 화풀이라고 하지.”
제압당한 샤칸이 그 와중에도 김검천의 말에 투덜거렸다.
괜한 심통에 하지도 않은 몇 마디를 덧붙이면서.
“누가 힘없는 데다가 가엾고 딱한 자라는 거냐.”
김검천은 드워프나 엘프처럼 사람의 마음을 직접 읽는 능력은 없었다.
다만 변경백이 취하는 행동에 대해 경험에서 우러난 짐작마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상급자부터 동료, 부하까지 위로부터 아래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접해본 김검천인 것이다.
변경백처럼 행동하는 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에게만 공격적인 성향이 있는 것이다.
- 으드득.
김검천이 정곡을 찔렀으니까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변경백이 이를 갈았다.
“네놈, 방금 뭐라고 했지?”
“귀가 달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 말이 들리지 않으면 일상 생활하기 힘들어.”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그것보다 자신 있으면 다시 한번 말해봐라. 뭐라고 했나?”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하지 마라. 원인을 제공한 사람끼리 해결하라는 거다.”
“그래서 넌 암살의 당사자인 이 노예 하나만으로 용서해달라는 거냐?”
김검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걸 보니 변경백에 대해 짐작한 게 맞는 것 같았다.
하긴 이곳에서는 변경백 멋대로 행동한다 해도 누가 혼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네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라는 것이지.”
“햐! 네 놈도 죽은 자신의 아들을 이종족 놈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았다면 이렇게 안 할 거 같으냐? 이종족 노예 놈들은 채찍질만으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야!”
변경백은 근위 기사들이 문밖에 내려놓은 아들이 떠올랐다.
죽은 아들을 쓰레기처럼 이종족 하인들이 끌고 가는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김검천이 딱 잘라 대답했다.
“물론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너처럼 화를 다스리지는 않을 거다. 나 같으면 아들을 죽인 자를 직접 찾아가서 복수했을 테니까.”
“크흐흐, 말은 잘하는군. 만약 상대가 이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 폐하라도 말이냐?”
“상대를 가리는 게 복수인가? 나라면 대상이 황제가 아니라 초월 존재라도 할 거다.”
변경백은 김검천의 말에 흠칫했다.
김검천의 말대로 그의 아들을 죽인 건 황제였지 드워프나 엘프같은 이종족이 아니었다.
복수심이라는 명분 아래에 노예를 향한 채찍은 쉽게 휘둘러졌다.
정작 복수의 대상인 황제에게 칼자루를 거꾸로 들 용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변경백이 채찍을 다른 손으로 옮기더니 다른 손으로 김검천을 향해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그에 따른 반응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었으니까.
변경백의 행동에 김검천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만두는 게 좋을걸.”
“입만 산 게 아니라 네가 정말 그런 자라면 눈앞의 이것부터나 막아봐라!”
일그러진 표정의 변경백은 발로 짓밟고 있던 샤칸의 목을 힘껏 내려쳤다.
김검천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이정도 거리가 떨어진 상태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타탕!”
- 쨍깡!
총성과 동시에 변경백이 들고 있던 칼이 샤칸에게 꽂혔다.
정작 칼에 박힌 듯한 샤칸은 눈을 굴리고 있는 것만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김검천이 쏜 총탄에 맞은 칼날이 검 자루만 남고 박살 난 것이다.
이상하게도 칼날에는 부러진 자국 말고도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부분도 생겨나 있었다.
김검천이 만들어 낸 자국은 분명 아니었다.
변경백이 급히 샤칸으로부터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건 도대체 뭐지?”
“암건의 총알이 명중한 거다.”
“암건? 총알? 에잇!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도 거기에는 공감해주지. 너만 처리하면 되니까.”
변경백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새 김검천이 자신의 눈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호위 기사들이 그제야 앞을 막아섰지만 김검천에게 어디 한군데씩 박살 나기 바빴다.
변경백은 부서진 칼을 던져 버리고 대신 채찍을 휘둘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변경백이 휘두른 채찍은 김검천의 팔에 휘감기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변경백은 채찍을 손목에 감아 끌어당겼다.
“쓸모없는 호위 같으니라고! 이 몸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니 뭘 하는 것이냐!”
“그러게. 충고하는데 좀 더 능력 있는 사람을 곁에 두라고. 제국의 높으신 분답게 말이야.”
“누구 놀리는 거냐!”
“그걸 이제 알았나? 앞으로 사람 말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라고.”
김검천이 팔을 들어 감긴 채찍을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변경백이 급히 채찍을 벗어던졌다.
주인을 잃은 채찍은 김검천이 도중에 낚아채어 변경백을 향해 휘둘렀다.
“네가 여태까지 휘두른 채찍, 조금만 맛보거라!”
- 철썩!
아직 자세를 잡지 못한 변경백의 등 뒤로 채찍이 작렬했다.
“으아악! 커헉…”
처음 겪는 채찍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변경백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채찍으로 흥한 자, 채찍으로 망하는 법이야. 비명은 반성의 대답이라고 받아들여 주지.”
김검천은 채찍으로 변경백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사이 호위 기사들은 포위망을 형성하긴 했지만 변경백이 잡혀있어 손을 못 쓰고 있었다.
변경백이 등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에 흐릿해진 눈으로 물었다.
“이 몸을 데리고 이제 뭘 할 작정이냐?”
“작별인사를 해야지. 언제까지고 여기에 머물 생각은 없거든.”
말이 끝나자 김검천은 호위 기사들을 향해 변경백을 던져버렸다.
바닥에 엎드리며 호위 기사들이 소리쳤다.
“모두 피해!”
“막아야지! 뭘 피해!”
호위 책임자인 기사 단장이 호위 기사들을 향해 악을 썼다.
“멍청한 놈들아! 전부 다 피하면 각하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호위 기사들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친 기사 단장을 바라보았다.
맨 앞에 서 있다가 정작 가장 먼저 몸을 피한 건 그였으니까.
변경백은 그대로 주변에 있는 건물의 벽을 뚫고 처박혔다.
변경백이 몸으로 건물을 부순 사건은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걸 김검천이 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