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호위 기사들이 모두 얼어붙은 틈을 타 김검천은 샤칸에게 다가갔다.
변경백과 부딪힌 건물이 부실하게 지어진 것을 증명이라도 한 듯 그대로 붕괴해버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호위 기사들은 김검천을 놔두고 건물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각하! 무사하십니까?”
자신들의 주군이자 영지 최고 권력자인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상 상황에 호위 기사들이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호위 기사들은 건물에 모두 달려들어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김검천을 견제하는 호위 기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기사 단장이 그런 부하들을 보며 짜증을 냈다.
“너희들은 뭐하나! 지금 상황이 거기서 가만히 지켜볼 정도로 한가하냐?”
“단장님. 여기 있는 반역자 녀석들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하가 건물 밑에 깔려있는 게 안 보이냐? 저들은 나중에 처리해도 되니 어서 돕기나 해!”
분노한 기사 단장의 명령에 나머지 호위 기사들도 급히 변경백이 깔린 곳으로 이동했다.
원인을 제공한 두들겨 맞던 드워프는 어느새 몸을 피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샤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드워프는 그런 모양이었다.
김검천은 여전히 지면과 붙어 있는 샤칸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걸었다.
“이제 일어서는 게 좋을 것 같군. 밟히는 게 취향이 아니라면. 그게 대지와 친해지기 위한 의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큿,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움직이기 힘들 뿐이라고.”
“그러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김검천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샤칸을 옆구리에 끼었다.
“뭐하는 짓거리냐?”
“너무 고마워하지 말라고. 괜히 부끄럽잖아.”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내려놓으라는 거야. 아기 취급하지 말라고!”
“빨리 떠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니까 이해해줘. 쿠퍼, 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 쿠퍼가 마차의 마부석에 올라탔다.
사람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마차지만 속도를 더 내려면 마부 석에 사람이 있는 게 나았다.
김검천은 샤칸을 마차 안에 집어 던진 후 자신도 승차했다.
그리고는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루시엘에게 말했다.
“방금 변경백의 칼날이 부러진 것, 너와 관계있는 일이겠지?”
“그건 김검천님이 손을 쓰신 게 아니었습니까? 암건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암건으로는 금속에 그런 구멍이 뚫릴 정도의 파괴력이 안 나와. 부러질 수는 있어도.”
“그 정도로 제가 했다는 걸 맞추시다니 대단하시군요.”
“네가 원거리 무기인 활을 쓰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 화살 대신 마나라도 사용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셨군요. 마나 외에 정령의 힘도 빌렸으니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마부석에 있던 쿠퍼가 갑자기 소리쳤다.
“김검천님! 기사들이 저희 뒤를 쫓고 있습니다! 앞에는 관문이 보이고요!”
도시를 나가기 위해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관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했다.
김검천이 점차 가까워지는 관문을 보며 대답했다.
“이제야 변경백을 구해냈나? 나중에 올 때도 여기를 들려야 하는데 귀찮게 되었군.”
“오히려 잘되었군! 그냥 가기 아쉽던 참이니 놈들과 결판을 내고 오마!”
귀찮음의 원인 제공자인 샤칸이 마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려고 들었다.
루시엘이 그런 샤칸을 붙잡았다.
“기다리십시오. 샤칸.”
“말리지 마라! 루시엘!”
“잊으셨습니까? 우리는 제국과 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당신 부족에게 가는 길이라는 걸요. 당신이 그러면 저희들도 같이 싸워야 합니다.”
“쳇, 그냥 가면 되잖아! 너도 있으니 가는 길 안내 정도는 문제도 아니니까!”
“거기 도착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지요. 드워프와 약간 친분이 있어도 엘프인 제가 인간들을 데려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어떻게 되는데?”
“당신을 버려두고 왔다고 하면 일단 제 머리부터 망치로 부수려고 들 테지요.”
“크흠. 그거야 우리 부족이 드워프 중에서도 좀 화끈한 성격이긴 하지. 알았다고!”
샤칸이 슬쩍 문고리를 놓고 물러섰다.
마차 안의 작은 소동이 끝나자 쿠퍼가 김검천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제 곧 저쪽 관문에서 검문을 하려 들 텐데요.”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어. 이렇게 된 이상 관문을 돌파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쿠퍼가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 못 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런 마차를 보며 성벽 위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경비병이 성문 책임자인 기사에게 물었다.
“혹시 위에서 급한 일로 누구를 통과시키라는 명령이라도 내려왔습니까?”
“공문도 없었고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
“저쪽에서 마차 하나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중인데 관문 앞에 멈출만한 속도가 아닙니다.”
“영지 안에서 사고라도 치고 도주하는 마차인가?”
“윗선에서 일이 생겨 급하게 전령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급한 전령이면 말을 타고 움직이겠지, 마차를 쓰겠냐? 여행 가냐고. 여하튼 정해진 규칙이 있으니 일단 문을 닫도록 성문 쪽에 신호를 보내.”
때마침 영지 쪽에서 붉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자 책임자인 기사가 얼굴을 굳혔다.
붉은 연기는 비상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무래도 저 마차는 좋은 일로 다가오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성문을 내려!”
“외부의 철문도 내리도록 할까요?”
“아무래도 좋으니 일단 닫을 수 있는 것부터 닫아! 그것만 해도 저런 마차로는 못 지나가잖아!”
“알겠습니다. 저게 무슨 공성 병기라도 탑재하고 있을 리 없으니까요. 성문을 닫아라!”
경비병의 신호가 전달되자 나무로 된 육중한 성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나무 소재라지만 방어 마법이 걸려 있어 성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방어력을 가졌다.
- 키끼긱.
성문이 닫히는 걸 본 쿠퍼가 다급하게 외쳤다.
“김검천님. 현재 마차의 속도로는 성문이 닫히기 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검천이 마차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지붕으로 올라섰다.
마차로 운반 중인 짐의 무게도 제법 나갔으니 쿠퍼의 말대로 이대로는 무리였다.
“통과할 수 없다면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지. 미리내. 숄더 캐논 모드로.”
[숄더 캐논 모드 이행.]
- 위이잉.
한쪽 어깨 위로 파워드슈츠의 장갑이 변형되며 2개 포신을 가진 포탑이 나타났다.
작지만 강한 숄더 캐논이었다.
김검천의 행동에 슬쩍 불안감이 든 쿠퍼가 물었다.
“혹시나 싶지만 그걸로 성문을 날려버리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좀…”
“그렇군. 나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어.”
“하하, 제 생각이 과했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성문을 날리는 건 아닐테니까요.”
“성문이 아니라 성벽 채로 날리면 지나가기가 더 편할 테지? 미사일을 준비….”
쿠퍼가 기겁을 했다.
전쟁터도 아닌데 성문도 아니고 성벽을 날려버리겠다니.
“헉!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생각해 보니 그냥 성문만 박살 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차가 지나치기에는 좁지 않을까? 민폐라고 생각해서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 예전부터 성벽보다 성문을 부수고 싶었습니다!”
“네가 그쪽이 더 좋다면 나도 못 들어줄 건 없지. 포격 개시. 연속 발사로.”
[목표 성문. 연속 발사 개시.]
미사일만큼은 아니더라도 암건보다는 뛰어난 파괴력을 지닌 포탑이 기동을 시작했다.
마차 위로 올라온 김검천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본 경비병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사님.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요? 이 거리에서도 마차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기사가 코웃음을 쳤다.
“흥!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변경의 성문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무래도 뭔가로 공격이라도 할 거 같은데요. 공격 마법 양피지라도 쓸 작정일까요.”
“걱정 마라. 이 성문으로 말할 거 같으면 나무 재질에 불과해 보이지만 몇 겹의 방어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성문이 뚫리지 않는다는 걸 월급을 걸고 내기해도 좋…”
- 콰쾅!
기사의 말소리를 무시하며 숄더 캐논의 발사음이 들렸다.
기사와 경비병들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했다.
포탄이 적중하기 전 성문으로부터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 퍼펑!
숄더 캐논의 포탄은 푸른빛에 막혀 그대로 폭발했다.
성문에 걸려 있는 방어마법이 발동해 포탄을 막아낸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폭발의 위력에 잠시 얼어붙었던 기사가 웃는 얼굴로 경비병을 향해 말했다.
“보… 보았나? 성문의 방어마법 위력을! 그런데 저건 처음 보는데. 마법 맞나?”
기사를 향해 경비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기사님.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푸른 빛의 세기가 줄어든 거 같은데요.”
“설마 방금 공격으로 성문의 방어마법이 약화되었다는 건가! 고작 일격에 그럴 리가?”
성문으로부터 다시 한번 푸른빛이 번뜩이며 두 번째 포탄이 폭발했다.
동시에 성문으로 뿜어지던 푸른빛도 꺼져버렸다.
“성문의…. 보호막이 사라졌어?”
기사의 흐릿해진 시야 속으로 닫혀가던 성문이 폭발하는 게 보였다.
김검천이 쏜 숄더 캐논의 포탄은 아직 한 발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쿠왕!
폭발과 동시에 성문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경비병들이 장난감처럼 튕겨 나갔다.
“으아악!”
“사람 살려!”
“괜찮아! 기사님 월급은 이제 우리 거다!”
경비 책임자인 기사가 비명 속에 섞인 이상한 소리를 무시하며 외쳤다.
“모두 무사한가?”
“기사님. 당했으면 대답을 못 하는데요?”
“너 이 자식, 생각보다는 똑똑한데.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저… 저기를 보십시오!”
기사가 경비병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다 흠칫했다.
자신의 마나 소드로도 생채기 같은 흠집만 나던 성문에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성문이 저런 꼴이 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달려오던 마차가 기사의 옆을 지나쳤다.
마부석 위에 있던 쿠퍼가 신나서 소리쳤다.
“하하! 우리 김검천님이 하시는 일인데 말이 안 될 리가 없지! 잘 있어라!”
영지로부터 김검천을 뒤쫓아 오던 기사들도 구멍 난 성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나를 끌어모아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도 시간제한이 있었다.
단거리라면 몰라도 영지 밖으로까지 마차를 쫓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기사 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깨어나시면 백작 각하에게 뭐라고 이야기 드려야 하나?”
***
김검천 일행들이 성문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야 변경백은 겨우 정신이 들었다.
“큭, 몸에 아픔이 느껴지는 걸 보니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군.”
변경백이 정신을 차리자 호위 기사단장이 분개한 어조로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은 뺀 채로.
“무사하셨군요! 각하는 놈들의 습격에 의해 무너진 건물에 깔려버렸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저희들의 목숨 건 활약에 도주했습니다.”
“도주라고? 그러면 놈들이 도망가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
“아닙니다. 기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성문을 박살 내고 빠져나갔다고 하더군요.”
“뭐라? 방어 마법이 걸린 성문을 부수고? 크흐흐, 으하하하하하!”
“각하. 괜찮으십니까?”
호위 기사들은 변경백이 걱정스러웠다.
김검천에게 처맞고 기절했다 일어난 변경백이 이런 보고를 들으며 크게 웃었다.
지금 그의 정신이 멀쩡한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변경백은 정신이 맑아진 걸 느끼고 있었지만.
황제를 만나 그 일을 겪은 뒤부터는 그의 정신은 썩어서 곪아가고 있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고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던 자신이었다.
그런 변경백이었지만 방금 전 김검천과의 일 이후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변경백은 드디어 제대로 된 복수의 대상을 향해 마음에 칼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잠시 후 성문이 박살 난 모습을 본 변경백은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복수를 위한 계획을 실천할 준비가 된 것이다.
성문을 쳐다보는 변경백을 향해 호위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놈들을 쫓아갈까요?”
“아니다. 왕국 쪽에서 온 자들이라면 나중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지. 이후에 저자들을 보면 데려오기나 하도록.”
“알겠습니다.”
변경백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사들이 몰래 이를 가는 걸 보면 결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