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김검천이 쿠퍼와 샤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샤칸은 록웜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제국 기사들을 때려잡도록 해.”
“하지만 저런 걸 내 버려두라고요?”
“저것보다는 위기에 빠진 동족을 구하는 게 먼저 아닐까? 가까운 곳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샤칸이 냉정하게 주변을 살펴보니 김검천의 말 대로였다.
다른 곳은 몰라도 상급 기사를 상대하고 있는 드워프들은 도망치는데 급한 모습이었다.
일반 드워프의 무력은 하급 기사 정도였으니 그런 실력자를 막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드워프의 상급 기사격인 망치들은 샤칸을 제외하고 글래셔에게 다 당한 상황이었으니까.
샤칸은 록웜이 아닌 제국 기사들을 향해서 무기를 고쳐 쥐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할 때가 아니었어. 동족들을 먼저 구해야지!”
“쿠퍼, 너도 샤칸을 도와 드워프들을 도와줘. 너희 두 명이면 드워프들도 한숨 돌릴 거야.”
“맡겨만 주십시오. 저도 친숙한 느낌의 드워프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상급 기사 두 명분의 무력이 추가 투입된다면 김검천이 드워프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때 동굴 한쪽을 응시한 김검천이 말을 바꾸었다.
“아니, 이로써 3명인가.”
- 슈슉.
막 드워프 한 명의 머리를 향해 베어나가던 마나 플레임 소드가 튕겨 나갔다.
상급 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동굴 한쪽에서 루시엘이 제국 기사들을 향해 활시위를 튕겨 방해하는 중인 것이었다.
루시엘이 빈 활시위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드워프들은 끔찍하지만 제국 녀석들은 더욱 끔찍하니 도와줍니다. 그러면 다음 갑니다.”
당긴 활시위로 마나가 모여들더니 푸르게 빛나는 화살이 생성되었다.
루시엘은 정령의 힘을 사용해 마나를 화살 형태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게 루시엘이 화살 통에 화살을 별로 넣고 다니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힘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활시위를 당기기만 해도 반영구적으로 화살을 쓸 수 있었으니까.
물론 물리적인 화살도 특별한 순간 용도에 따라 쓰기도 했다.
샤칸도 루시엘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귀쟁이 녀석도 도와주는데 이 샤칸님이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쿠퍼, 너도 같이 하자!”
“물론이지! 이 몸에게 맡겨주라고!”
쿠퍼와 샤칸이 전투에 뛰어들자 드워프들이 점차 제국 기사들을 밀어붙였다.
드워프들의 일이 일단 처리된 듯하자 김검천은 록웜을 향해 몸을 돌렸다.
록웜은 단단한 껍질의 일부가 파괴되어 둥그런 상처로부터 녹색 피가 흐르고 있었다.
록웜이 김검천을 덮치려 할 때마다 루시엘이 견제 공격을 퍼부은 자국이었다.
김검천은 덕분에 안심하고 샤칸과 쿠퍼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고.
“록웜의 덩치가 덩치인 만큼 충격은 줬어도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러면 미사일로 날려버릴까요?]
“나 혼자 있으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다 날려버릴 수는 없겠지. 동굴이 무너지기 전에 다 죽겠다. 그러면 나도 일단 관통형 암건부터 시작해 볼까.”
[암건 발동 완료.]
김검천이 록웜을 향해 암건을 발사했다.
- 드르르륵.
바늘형 모양의 탄환이 록웜을 사정없이 덮쳤다.
대부분의 총탄이 피부에서부터 튕겨 나가는 걸 보니 확실히 바위처럼 단단한 모양이었다.
얼마 안 되는 총알이 록웜에게 박히기는 했지만 간지러운 수준에 불과한 모양이었고.
루시엘의 화살 위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팔만 돌린 김검천이 드워프를 덮치는 제국 기사를 향해 암건을 쏘아보았다.
- 타타탕!
“으악!”
제국 기사가 뜬금없이 날아온 총알에 기겁하며 피하다가 드워프의 곡괭이에 찍혔다.
드워프가 제국 기사를 걷어차 곡괭이를 뽑으며 김검천에게 말했다.
“덕분에 살았소!”
“이게 다 살자고 하는 일이지.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위로부터 떨어지라고 대신 전해줘. 내 근처에 있으면 록웜과의 싸움에 말려들 수 있으니까.”
“맡겨만 주시오! 어이! 이 난쟁이들아! 저쪽 구석으로 이동해 뭉쳐 싸우자고!”
드워프 한 명이 제국 기사를 박살 내면서 대꾸했다.
“난쟁이라니? 네 놈보다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나 더 크다고!”
“난 그 차이만큼이나 수염이 더 긴데?”
“젠장! 알았다고! 수염 좀 길다고 잘난 척은!”
드워프 사이에서는 키가 큰 것보다 수염 긴 게 더 잘나가는 모양이었다.
김검천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이 쿠퍼와 샤칸의 도움을 받아 방어진을 만들었다.
드워프들이 한쪽에서 방어에 열중하자 덕분에 죽어나는 건 제국 기사들이었다.
구석에 모인 드워프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중앙 부분을 지나가야 했다.
김검천은 그곳에 있는 제국 기사들을 향해 록웜의 공격을 유도했던 것이다.
록웜에게는 암건에 의한 피해가 없다고 했지만 도발 효과는 탁월한 편이었다.
“쿼어어엉!”
다시 록웜이 머리로 보이는 부분을 채찍처럼 돌리더니 김검천을 향해 휘둘렀다.
아무래도 수직적으로 내려치는 것보다 수평적인 공격이 공격 범위가 훨씬 넓어지니까.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괴물치고는 꽤 쓸 만한 공격 방법이었다.
그 공격 범위 안에 제국 기사들이 들어있다는 걸 빼면 칭찬이라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크아악!”
“이 록웜이 미쳤나?”
“누가 저 괴물을 말려봐! 그래! 그쪽은 상급 기사잖아!”
“저걸 말릴 정도 수준이면 이 몸이 상급 기사 노릇이나 하고 있겠냐? 마스터 나이트겠지!”
“어라, 그건 그러네. 으악!”
인생 최후의 대화를 나눈 제국 기사 수십 명이 인형을 무릎으로 찍은 것처럼 납작해졌다.
그 모습은 벽 한구석에 피해있던 드워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정도였다.
김검천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저절로 생각이 드는 드워프들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저렇게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건 드워프들일 수도 있었으니까.
“우와. 저 김검천이라는 사람이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누가 아니래. 지금 생각하면 저자를 공격하자고 선동하던 녀석을 때려주고 싶네.”
“나중에 마을에 돌아가면 그놈 좀 혼 좀 내주자고.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들었어.”
드워프들은 돌아간다면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결국 제국 기사들 중 살아남은 건 상급 기사를 포함해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그들이 운이 좋은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샤칸과 쿠퍼, 그리고 다른 드워프들이 여전히 무기를 든 채로 그들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피로 시작한 일은 피로 끝나야 하는 법인 것이다.
다만 그들마저 잡으려면 록웜에 대한 일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록웜이 김검천을 처리 못 하자 공격 패턴을 바꿔 갑자기 지면을 파고 든 것이다.
그걸 본 상급 기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제길! 모두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록웜의 제어가 일시적으로 풀린 상태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무기를 들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차라리 무기를 맞고 죽던가! 저런 흉측한 괴물에게 삼켜져 밥이 되기 싫으면!”
“록웜은 글래셔님이 제어하는 괴물이지 않습니까? 약간만 신경 쓰시면 될 텐데요?”
“지금 드워프 치프와 싸우신다고 이쪽까지 신경 쓰지 못하잖아! 이 멍청한 놈아!”
쟈칸과 글래셔가 싸우는 장소에는 수증기가 뿌옇게 서려 있었다.
쟈칸의 뜨거운 불꽃과 글래셔의 차가운 오러가 그런 현상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덕분에 둘의 싸움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당사자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쟈칸과 글래셔도 주변 다른 사람들의 싸움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 드드드득!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라 록웜이 지하에서 이동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아마도 록웜은 눈이 나쁜 만큼 다른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었다.
김검천이 문득 든 생각이 있어 아까처럼 샤칸에게 음성 모드로 말을 전했다.
[샤칸, 제국 기사들의 행동을 보니 너희들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가능한 말도 하지 말고. 드워프들에게도 움직이지 말도록 손으로 신호를 보내.]
일단 김검천의 말에 따라 드워프들에게 수신호를 보낸 샤칸이었다.
드워프들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김검천은 쿠퍼와 루시엘에게도 음성 모드로 말을 전해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꼼짝도 않고 대치하던 상황을 못 이긴 제국 기사 한 명이 투덜거렸다.
“이거 무슨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눈을 부라린 상급 기사가 소리치는 대신 이상할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나? 안 했나? 전시 상황에서는 즉결처분도 가능하다는 걸 명심해라.”
김검천은 상급 기사의 모습을 보자 록웜을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저렇게 조용히 말하는 건 분명 소리에도 반응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아까 상대한 록웜을 보았을 때는 분명 귀가 없었다.
김검천도 입만 벙긋거리며 미리내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고 보니 소리라는 건 공기라는 매질이 진동해서 전파되는 것이었지?'
[그렇다면 록웜이라는 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진동을 감지해 공격해 오는 것이겠군요.]
'그러면 이렇게 움직여보도록 하지.'
김검천이 반중력 장치를 기동시킨 채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반중력 장치로 지면에 살짝 떠 움직이고 있으니 걷는 진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김검천이 이동하는데 제국 기사가 다시 투덜거렸다.
“아무 일도 없는 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그렇지요. 보아하니 록웜 때문에 그러시는 거 같은데 움직이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물론이지. 록웜은 눈이 나쁘지만 민감하거든. 걷는 움직임에도 반응할 정도라고.”
“그냥 걸어도 예민하게 반응한다는데 록웜은 저런 건 왜 내버려 둡니까?”
기사가 가리킨 곳에는 김검천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급 기사가 그런 김검천을 비웃었다.
“후, 저 녀석. 죽으려고 작정했군. 이게 곧 록웜이 저놈을 덮칠 거다.”
“저렇게 다가오는 적을 공격 안 한다면요?”
“그럴 리가. 걷는 것 자체가 지하에 있는 록웜에게 먹잇감이라는 걸 알려주는 증거라고.”
그 말을 하는 상급 기사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깔려있었다.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김검천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다가오고 있어서였다.
꼼짝도 못 한 채로 공격을 받는다면 김검천에게 당하든 록웜에게 당하든 결과는 똑같았다.
물론 김검천에게 반격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지만 상급 기사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제국 기사들의 동요가 점차 심해져 갔다.
상급 기사의 말과는 다르게 몸을 숨긴 록웜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김검천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만 가서 이제 곧 검을 휘두르면 공격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상급 기사에게 질문한 기사가 초조함에 검을 뽑으며 튀어 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적어도 검이라도 뽑고 죽겠다!”
“이 몸도!”
“본인도!”
한 명이 뛰쳐나가자 안 그래도 불안해하던 다른 기사들도 군중 의식에 휩쓸려 움직였다.
상급 기사만이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제지할 따름이었다.
“안 돼! 멈춰!”
“상급 기사님이나 멈추시지요!”
상급 기사의 말 한마디에 멈출 거였다면 애초에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쾌하게 달려가는 제국 기사들의 발걸음에는 약간의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건 그들의 발밑에 대기 중이던 록웜도 마찬가지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