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 갔기에 김검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일찍 죽고 싶은 모양이로군. 한 녀석만 빼고는.”
김검천은 힘껏 발을 굴러 일부러 록웜을 유인해낼 진동을 만들어냈다.
제국 기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조의를 먼저 표한 것이었다.
발을 구른 충격을 이용해 떠오른 김검천이 하늘을 날아 달려오던 기사의 머리를 밟았다.
“우와악…? 어라, 안 아픈데? 설마 마법이라도 써서 날아오른 건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번에 뼈가 부러질 거 같은 김검천의 발이 자신의 머리를 밟고 지나쳤는데 멀쩡해서였다.
샤칸 옆으로 착지한 김검천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방금 강하게 발 구른 걸로 록웜이 노리는 곳은 정해졌을 테니까.
“마법이 아니라 반중력장치로 중력을 거스르고 고압축 공기를 사용해 공중을 이동한 거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록웜에게 들키지 않게 진동 없이 움직였다는 말이지만 여전히 알아들은 표정은 아닌걸. 그냥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향해 떨어지기나 하라고.”
김검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쉴 새 없이 떨리던 지면의 진동이 멎었다.
상급 기사는 자신이 경고했던 것도 무시한 채 소리쳤다.
“피해! 록웜이 튀어나온다!”
“이미 늦었어.”
김검천의 말대로 제국 기사들은 피할 틈도 없었다.
딛고 있던 지면이 무너져 내렸기에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기사들은 록웜의 입속으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 전에도 들어갔던 록웜의 입속이라지만 전혀 상황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록웜 입가 근처에 있던 제국 기사들은 손을 뻗어 입가 부근이라도 잡을 수 있긴 했다.
금방 록웜의 뱃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 나을 거라고 바로 후회했지만.
록웜이 흙과 돌로 가득한 지하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 생체무기와 접촉한 것이다.
“으악! 손이 록웜의 이빨에!”
“크아악! 뭐지? 손이 녹는다고!”
“젠장! 잡으려고 해도 제대로 잡을만한 곳이 없잖아!”
살아있다는 건 고통 그 자체였다.
커다란 바위도 자갈 수준의 돌조각으로 으깨버리는 이빨.
뱃속에 집어넣은 돌조각을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용해액.
마갑을 착용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이빨과 용해액을 버티는 건 무리였다.
마갑마저 구멍을 내는 이빨과 녹여버리는 용해액이 상대였으니까.
매달려 있던 제국 기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살아남기 위한 탈출로를 발견했다.
떨어지지 않게 노력 중인 다른 기사들의 몸 위로 이동한다면 고통 없는 탈출이 가능했다.
“기사단 선임인 이 몸이 살아야겠지!”
“그건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이쪽이야!”
“가장 실력이 높은 쪽이 살아남아야 하는 법이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서로의 몸에 올라타려고 다투었다.
누구도 구멍 밖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잡으면서.
뿌린 대로 거두는 것처럼 제국 기사들은 사이좋게 모두 록웜의 입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적에게는 용서가 없는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만 먼저 올라가도록 협력했다면 모두 탈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위급한 상황이면 모든 생명체들은 생존 본능으로 인해 자신만을 위해 행동할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 세이야와 쿠퍼는 저러지 않을 테니까. 제국은 높으신 분들부터 그런 사고관인 것 같으니 환경에 영향을 받는 점도 있을 거고.”
예전부터 느껴 온 것이지만 이세계는 서로 웃으며 살아가기에는 힘든 환경인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김검천은 일단 록웜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록웜을 이대로 방치해두면 다음 차례는 쿠퍼나 드워프들이 될 테니까.
록웜은 제국 기사들을 삼키고 나서도 아직 먹잇감을 노리는지 입을 벌린 채로 있었다.
미사일을 먹여주기에는 최고의 상황이었다.
“너무 배터지게 먹으면 건강에 나쁘다는 걸 입증해주도록 하지. 미사일 상태는?”
[계측 완료. 록웜의 입속에 미사일을 발사하면 동굴이 무너질 가능성은 15% 이하입니다.]
“생각보다는 높네. 하긴 위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니까. 그러면 발사 준비를…”
[그 외에도 작은 문제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뭐지?”
[록웜의 약점 부위를 찾기 위해 탐색하던 중 내부로부터 생명체 반응이 발견되었습니다.]
“록웜이 뱃속에 새끼라도 기르는 건가?”
[아닙니다. 생명체의 뱃속이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반응으로 보아 드워프인 것 같습니다.]
“드워프가 왜? 그렇군. 이 녀석들 오기 전 다른 드워프들이 있는 장소에도 다녀왔었지.”
김검천은 쟈칸이 습격한 제국 기사를 포로로 끌고 온 모습을 떠올렸다.
제국 기사들은 귀찮게 끌고 다니는 대신 드워프들을 록웜의 뱃속에 남겨둔 모양이었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유용한 수단인 괴물이었다.
[망설임이 보이십니다. 그냥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시지요.]
“안 돼. 너에게 위임하면 그냥 미사일을 쏠 거 같아 보이는걸.”
[이게 김검천님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요. 필요하면 다 죽이면 됩니다.]
무서운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 든든하긴 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김검천에게 등을 돌려도 미리내만큼은 그의 편일 테니까.
그래도 그렇게는 할 수 없었던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미리내. 넌 저런 괴물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만 위험 확률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확률은 신경 쓰지 마. 사실 난 예전부터 한 번쯤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 보고 싶었거든.”
[그게 죽기 전 꼭 해보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인가 뭔가 하는 겁니까?]
“절벽에서 떨어져 공중을 나는 익스트림 스포츠보다는 즐기는 것보다는 나아 보이잖아.”
[말려도 하시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게 내 매력이라고. 그러면 우리 한번 즐겨보도록 하지!”
김검천이 망설임 없이 록웜의 뱃속으로 뛰어들었다.
록웜은 김검천이 뛰어들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었다.
반중력장치를 이용해 천천히 하강했으니까.
록웜의 뱃속은 보기보다도 더욱 깊었다.
겉부분과 달리 의외로 축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돌과 같은 피부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지만.
미리내가 물었다.
[살펴보기 힘들면 불이라도 켤까요? 현재 장비라면 100만 촉광 이상 밝힐 수 있습니다.]
“과거 배를 안내하던 등대도 90만 촉광 정도라던데 그 정도 빛이면 드워프들 시력 다 나갈걸. 불 대신 야간 모드을 실행해.”
[야간 모드 기동.]
파워드슈츠의 가슴 부근에서 적외선의 붉은빛이 번쩍였다.
붉은빛은 고리 모양으로 위로 타고 올라가더니 김검천의 머리 부근에서 사라졌다.
적외선 모드라서 한정된 색만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게 더 나아 보였다.
한때 제국 기사들이라고 불렸던 잔해들 때문이라도.
- 드드득.
김검천이 머리 위를 보니 그나마 들어오던 빛줄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먹이가 떨어지지 않자 록웜이 이빨을 닫고 다시 지하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빨리 찾아야겠군. 근처에 생명 반응은?”
[록웜의 안이라서 그런지 정확한 위치 확인도 안 됩니다.]
“아까 전과 비슷한 상황인가. 별수 없군. 직접 찾아야 하나?”
- 치이익.
그때 뭔가 떨어지는 듯싶더니 김검천의 어깨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록웜의 내벽으로부터 생성된 용해액이 파워드슈츠에 떨어진 것이다.
“…빨리 찾지 않으면 걸쭉한 푸딩이 돼 버린 드워프들을 만나게 되겠어.”
[달지 않은 푸딩 종류입니까.]
“그런 건 먹는 게 아니거든?”
일자형의 겉모습과 같이 록웜의 뱃속은 그나마 복잡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아남은 드워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선가 주은 마갑이나 검같은 장비들로 용해액을 방어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제국 기사들의 유품일 테지.
드워프들은 김검천이 다가서자 우선 무기부터 휘두르려고 했다.
김검천과 달리 그들은 어둠 속에서 상대의 얼굴을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 탁.
“잠깐. 나 김검천이요.”
김검천에 의해 무기가 잡힌 드워프가 동작을 멈추었다.
이름도 그렇고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였다.
“김검천? 그게 누구더라? “
옆에 있던 드워프들이 다 죽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다리가 짧아서 슬픈 녀석이 머리까지 둔해서야. 샤칸이 데려온 인간들 중 한 명이잖아.”
“넌 얼마나 길다고. 아, 부족장님이 댁으로 데려갔던?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말이 길어지면 록웜의 뒤로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 나가고 봅시다.”
드워프들이 화들짝 놀랐다.
록웜 뱃속에서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배설물이 된다니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다들 들었지? 똥 되기 싫으면 닥치고 나가자고.”
“…록웜 뱃속에서 녹기 전인 것도 서러운데 너에게 더러운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냐?”
“그보다 어떻게 나가지? 록웜이 입을 닫기 시작한 건 둘째치고 올라가는 것도 문제인데.”
드워프들이 고개를 들어 수십 미터는 될 듯한 천정을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몸 상태일 때 잡을 곳이 많은 벽이라도 올라갈 수 있을지 의문인 높이였다.
하물며 돌도 녹이는 용해액이 흘러내리고 있는 록웜의 내벽을 올라야 한다니.
김검천도 잠시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곳의 모든 드워프를 록웜이 입을 닫기 전에 옮겨야 했으니까.
김검천은 한 가지 방도가 생각났다.
“나한테 안기시오.”
김검천이 팔을 벌렸다.
드워프들은 김검천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개중에는 별난 드워프도 있기 마련이었다.
한 명이 나서더니 팔다리를 벌려 김검천에게 안겼다.
하필이면 얼굴 부위로.
“이렇게 말인가?”
“움직이기 쉽게 얼굴에 달라붙지 말고 몸을 잡으라는 거요.”
김검천은 드워프와 함께 반중력장치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금 파워드슈츠의 출력이라면 드워프 한 명 정도의 무게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록웜의 입 밖으로 나서자 김검천은 공기를 분사해 쿠퍼와 샤칸 옆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김검천이 나올 때까지도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김검천은 다람쥐마냥 달라붙어 있는 드워프를 떼어 내서 옆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샤칸, 쿠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이동용 원반을 줘. 나중에 돌려주도록 하지.”
김검천은 샤칸과 쿠퍼가 돌려준 이동용 원반을 가지고 다시 록웜 속으로 들어섰다.
이미 탈출한 동족을 본 드워프들이 먹이를 본 아기 새마냥 달려들었다.
“안아줘요!”
“이쪽 먼저 안아줘!”
수염 난 드워프들이 아기처럼 칭얼거리다니.
뭔가 무서운 광경이기에 김검천은 대답 대신 드워프 한 명을 짐짝처럼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가져온 이동용 원반은 다른 드워프들에게 넘겼다.
“엥?”
“이게 이동하기에는 더 편하니 처음부터 이럴걸. 아, 방금 넘겨준 원반도 공중에 뜨는 기능이 있으니 각자 알아서 나가면 될 거요.”
김검천이 어렵지 않게 원반 사용법을 가르쳐주자 드워프들이 서로 하려고 나섰다.
“우와! 이렇게 신기한 물건이?”
“원반이 난다요.”
“아무리 봐도 마석이 안 들어간 것 같은데.”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신기한 걸 보자 일단 달라붙고 보는 드워프들이라니.
그냥 놔두면 끝이 안 날 거 같아 김검천은 드워프들에게 잘 먹힐 만한 미끼를 던졌다.
“빨리 나가는 드워프부터 이것보다도 더 귀한 걸 구경하게 해줄 거요. 선착순이요.”
이보다 더 대단한 것을 접하는데 하필 선착순이라니.
드워프들은 입을 다물고 록웜의 뱃속으로부터 전력을 다해 탈출하기 시작했다.
모든 드워프가 탈출하자 김검천도 반중력 장치로 천천히 공중에 떠올랐다.
빠져나와 확인하니 입을 거의 닫은 록웜은 다시 지하로 몸을 숨기려는 중이었다.
충분히 미사일의 위력을 줄일 수 있는 위치였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미리내.”
[유도형 미사일. 목표 테이룬. 조준 완료. ]
“발사.”
[발사합니다.]
- 슈우욱. 쿠와왕!
록웜이 들어간 구멍으로부터 불꽃 기둥이 치솟았다.
주변으로 유독한 가스도 같이 뿜어져 나왔고.
단순히 미사일만 폭발한 게 아니라 지하 밑에 흐르던 용암마저 같이 분출한 모양이었다.
김검천은 간단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실드.”
- 치이익.
김검천은 실드를 발동해 폭발 충격을 가능한 흘리기로 했다.
실드로 구멍을 아예 막으면 오히려 더 큰 반동이 일어날 테니 취한 행동이었다.
뿜어져 나오던 용암은 여기저기로 흘러내리다 곧 검은 암석으로 식어 내렸다.
다행히 대부분의 폭발 충격은 록웜이 흡수했는지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시야를 가린 연기가 더 짙어져 한 치 앞도 안 보일 지경이 된 것만 빼고는.
김검천은 록웜이 죽었나 확인을 하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드워프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쿠퍼와 샤칸의 기합 소리마저 들리는 중인 것 같았다.
쟈칸의 이름이 계속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발생한 듯했다.
“혹시 쟈칸이 글래셔에게 진 건가?”
그렇다면 김검천도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쓸 여유는 없었다.
김검천은 록웜은 내버려 두고 드워프들이 있는 쪽으로 급히 이동했다.
마스터 나이트급 무력을 지닌 쟈칸이 당했다면 쿠퍼와 샤칸이라도 상대하기 무리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