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렇게 김검천의 한마디에 혼란에 빠지게 된 드워프들이었다.
쟈칸은 자신의 수염을 슬쩍 손으로 가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흠흠. 그러고 보니 들어준다고 했지 그걸 해준다고는 안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어떤 드워프 마을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갑자기 드는군요.”
원래 아예 안 해주는 것보다 해주었다가 아니라며 뺏어가는 게 더 기분 나쁜 법이다.
쟈칸은 자기 수염이 잘리는 것과 마을이 사라지는 것, 어느 게 중요한지 심각히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본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제가 드워프 수염을 어디다 가져다 쓰겠습니까? 오리하르콘은 몰라도요.”
“그건 그것 나름대로 기분 나쁜데? 드워프 수염은 세계 제일이라고!”
샤칸의 말에 옆에 있던 루시엘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기분 나쁜 건 드워프들의 수염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위해서라도 수염을 미시지요.”
“흥, 너희들은 애초에 수염 자체가 안 나니 그게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털 복숭이.”
“이 귀쟁이가?”
“둘 다 그만.”
김검천이 루시엘과 샤칸을 말렸다.
사실 김검천은 오리하르콘만 얻으면 수염을 잘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얻지 못하면 수염이 필요하다는 말이니 드워프들은 꼭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쟈칸. 이 마을에는 수염에서 오리하르콘을 채취하는 장비가 따로 있지요?”
“으음. 그렇지.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서는 그게 없으면 곤란하니까.”
“그러면 그걸로 오리하르콘을 수염에서 채취해 왔으면 합니다.”
“당장 필요한 건가? 그게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장비거든. 요즘 마석도 구하기 힘들어서 사용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나야 상관없지만요. 다들 수염이 필요 없는 드워프가 되고 싶다는 데 강요는 곤란하지요.”
“얘들아! 뭐하냐? 다들 장비 들어라!”
방금 전만 해도 병상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던 쟈칸부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의 고통보다는 미래의 수염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쟈칸의 집 앞에서 병문안이라는 핑계로 배틀 머신을 구경하러 온 드워프들이었다.
김검천과 쟈칸의 대화를 듣게 된 드워프들이 앞을 다투어 자리를 떠났다.
“어서 가서 오리하르콘을 털자! 김검천님이 수염을 털기 전에!”
“쉿! 그 이름을 말하면 안 돼! 수염이 잘려나갈 거라고!”
“수염을 잘릴 바에는 차라리 목이 잘리는 편이 나아!”
“난 수염 잘려도 좋으니까 더 배틀 머신인가 하는 거 더 만지고 싶은데.”
“일단 갔다 오면 수염도 건질 수 있고 만질 수도 있으니 그게 더 이익이잖아?”
“이 자식, 천잰데?”
샤칸도 거기에 끼어있었으니 드워프들은 수염 잘리는 게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었다.
잠시 후 쟈칸이 돌아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다들 순서대로 오리하르콘을 뽑아내고 있으니 안심하고 쉬고 있어 주시게나.”
“뭐, 적정량의 오리하르콘이 안 나오면 수염이라도 들고 가면 되겠지요.”
“…혹시 모르니 이 마을에서 내킬 때까지 쉬다 가는 게 어떻겠나?”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쟈칸은 모든 드워프들에게 어떻게든 할당량을 채우게 만들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마도 오리하르콘이 안 나오는 드워프들은 동굴에 다시 채광하러 들어가야 할 터였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래도 수염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본의 아니게 김검천이 드워프들을 광산에서 강제 노동시키게 생긴 셈이었다.
김검천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샤칸도 볼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김검천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샤칸, 넌 왜 거기에 간 거지?”
“그거야 수염에 붙은 오리하르콘이 있으면 떼어 내려고 간 것 아닌가.”
“아니, 말릴 틈도 없이 나가서 말을 못 했는데 넌 이미 나에게 그동안 모은 오리하르콘을 전부 넘겨주었잖아.”
“그거 혹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냐?”
“그래. 네가 여기서 며칠 모은다고 해서 오리하르콘을 얼마나 모으겠냐.”
“하지만 네가 이 수염도 포함이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말하려고 했었다고 했잖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라고.”
샤칸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좌절했다.
“크흑. 오리하르콘 채취하는 장비도 제법 수염에 무리가 가니까 사용하기 싫었다고!”
루시엘이 찻잔을 든 채로 그런 샤칸에게 다가섰다.
뭔가 그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샤칸.”
“루시엘.”
뜨거운 시선이 오가던 루시엘은 그대로 샤칸의 허리 위에 앉으며 가져온 차를 홀짝였다.
차가 아직 뜨거웠다.
샤칸이 침묵을 지키다 그 자세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대지 친화적인 자세로 있기에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해 주려고 앉은 것뿐입니다. 그것보다도 샤칸. 당신은 여러모로 짧아서인지 앉기가 불편하군요. 반성하세요.”
“반성할 쪽은 너겠지! 애초에 드워프는 의자가 아니야!”
샤칸이 벌떡 일어나며 루시엘을 집어 던졌다.
루시엘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으며 떨어지는 찻잔을 잡으면서 말했다.
“샤칸.”
“뭐냐, 이제 와서 사과할 작정이냐?”
“그게 아니라 의자는 움직이면 안 된다는 상식을 당신이 모르나 해서 싶어서요.”
“상식이 없는 건 이 몸을 의자 취급하는 너겠지!”
루시엘과 샤칸이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김검천이 나섰다.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무기를 날릴 것처럼 보였으니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원래 그런 사이였으니 한결같은 모습이긴 했다.
김검천이 샤칸에게 말했다.
“의자든 아니든 무슨 상관일까. 그보다 여기는 남의 집이니까 둘 다 얌전히 굴어. 누가 자기 집에서 난동 피우면 안 좋아할 거잖아.”
“크흠. 김검천님 말이니까 이번만 봐주도록 하지! 이 귀쟁이야!”
“너무 감사해서 말이 잘 나올 정도군요. 김검천님이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이 따르겠다는 겁니까? 이른바 명예스러운 양보군요.”
“말 다 했냐? 억, 잠깐. 쟈칸! 왜 절 때리는 겁니까?”
루시엘에게 달려들려던 샤칸이 쟈칸에게 항의했다.
쟈칸이 샤칸의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다.
쟈칸이 혀를 찼다.
“에잉, 일족의 망치라는 녀석이 남들 앞에서 엘프와 토닥거리기나 하고 있으니 그렇지.”
“망치가 이러는 게 어때서요. 루시엘이 저에게 이러는 건 괜찮고요? 어라?”
샤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어느새 루시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김검천의 옆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쟈칸이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프를 드워프와 함께 묶지 마라. 저 종족은 저들 나름대로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니까. 그것보다 시끄러운 드워프 놈들이 다 사라진 지금 대화를 하기 좋아진 것 같군.”
“우리도 드워프잖아요.”
“말대꾸할래? 시끄러운 드워프들 중에서 둘만 남았으니 그래도 이야기할 만하다는 거다.”
김검천이 쟈칸에게 말을 건네었다.
“제국에 관한 이야기인가 보군요.”
“어떻게 알았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안 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대화거리로 남은 건 제국에 관한 것 밖에 없으니까요. 오리하르콘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고.”
쟈칸이 감탄의 눈으로 김검천을 보더니 샤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샤칸은 집 밖에 있는 배틀 머신에 눈길을 주는 중이었다.
쟈칸도 역시 저절로 배틀 머신에 눈이 가는 걸 억지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크흠. 샤칸. 너도 좀 보고 배워라.”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이 몸의 뒤를 이어 부족장이 되어야 할 네가 배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느 놈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냐!”
사람들이 쟈칸의 발언에 깜짝 놀랐다.
김검천이 먼저 말했다.
“드워프가 원하는 지도자는 샤칸 같은 타입인 건가.”
쿠퍼가 말했다.
“샤칸이 부족장이라니. 어이, 믿고 있었다고?”
루시엘이 말했다.
“망치라는 직위를 가진 것도 신기한데 부족장의 후계자라니. 이곳 드워프 일족의 행운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샤칸이 투덜거렸다.
“루시엘!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불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마을의 드워프들을 위해서 초월 존재께 기도드릴 따름입니다.”
쟈칸이 루시엘에게 동의했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제국 기사들이 이곳을 빠져나간 이상 대비책부터 세워야 한다고.”
김검천이 쟈칸에게 물었다.
“록웜이 날뛸 때 제국 기사들은 글래셔를 제외하고 다 죽었던 게 아니었나 보군요.”
“그렇소. 구출한 드워프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 외곽 쪽에 이미 납치되었던 드워프들을 위한 제국 기사들이 따로 있었다더군.”
“그렇다더라도 주력은 동굴 속에서 전멸했을 텐데요. 그쪽에 상급 기사라도 남아있던 겁니까?”
쟈칸이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 제국 기사들이 문제가 아니라 상처 입은 록웜이 갑자기 나타나 날뛰더군. 힘은 많이 빠진 것 같았지만 드워프들의 포위망을 와해시키기에는 충분했거든.”
“역시 내가 록웜에 대한 확인 사살을 했어야 했는데.”
“아닐세.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맙기 짝이 없으니. 아무튼 그렇게 날뛰던 록웜이 힘이 다했는지 느닷없이 쓰러져 겨우 상황이 종료되었지.”
김검천은 글래셔의 최후 때 근처에 떨어진 혈석의 파편을 본 기억이 났다.
혈석이 박살나자 그제야 날뛰던 록웜도 힘이 다해 죽은 모양이었다.
“글래셔가 가진 혈석의 힘이 남아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래도 놈들에게 납치된 드워프들을 아무런 피해 없이 구해낸 건 다행이지. 다만 제국 기사들이 도주했으니 여기는 완전히 제국의 표적이 된 셈이야.”
“위치가 파악된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거군요.”
“사천왕이 죽어버렸으니까. 아, 자네 탓이 아니라 마스터 나이트 중에서도 실력자가 죽었으니 제국이 우리 부족을 그냥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걸세.”
“남은 길은 도망가거나 싸우거나 택하는 수밖에 없는 거군요.”
“밖의 드워프들이나 본인은 싸우고 싶지. 하지만 부족장으로서 일족을 생각한다면 도망쳐야 할거 같다네.”
그 말을 하는 쟈칸의 얼굴은 수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많은 드워프들을 이끄는 그가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짐이 무거웠다.
그래서 샤칸이 빨리 성장하기를 기원하는 중인 것이고.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냥 혹시 모를 행운을 기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국을 움직이는 건 사람이지요. 드워프들을 원하는 건 제국 황제니 결국 그가 이 사태의 원인이겠지요?”
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갑자기 황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 황제가 없어지면 제국이 드워프를 노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김검천은 이미 제국 마스터 나이트인 킬만을 처리한 전적이 있었다.
그래도 혼자 나선 킬만에 대해서는 마물의 숲에서의 일인 만큼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글래셔의 일만큼은 도주한 제국 기사들에 의해서라도 언젠가 알려질 것이었다.
제국 사천왕 중 한 명인 글래셔까지 없애버렸으니 제국과의 좋은 관계는 그른 셈이었다.
그러니 제국 황제에 대한 일도 김검천과 무관한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헉! 제국 황제를 죽이겠다는 거요?”
“서로의 의견이 부딪히고 양보가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김검천의 대비책은 다른 이들의 예상을 초월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사고가 마비된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김검천이 말한 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 자체를 지워버리겠다는 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