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쟈칸이 조심스럽게 김검천에게 물었다.
“제국의 황제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요?”
“글래셔라는 자가 황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대충 알 거 같더군요.”
“더욱 자세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소. 드워프라도 이런 나이까지 부족장을 하고 있으면 싫어도 그런 정보가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니까.”
“정보가 많아서 나쁠 것 없겠지요. 말해보시지요.”
“우선 글래셔라는 자와 싸워 알겠지만 제국에는 그런 실력자가 적어도 3명이 더 있소.”
“사천왕이라고 했으니까요. 마스터 나이트는 더 있다고 들었고요.”
“거기다 수 천에 달하는 기사들과 수만이 넘는 군대를 손가락 하나로 부리는 사람이 바로 황제란 말이요.”
[김검천 함장님은 못해도 마스터 나이트급 수준의 부하 10만 명을 거느리는 셈이었지만요.]
쟈칸이 늘어놓는 말에 한 마디하는 미리내였다.
함선이 추락하기 전에도 함장 대리였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반 병사들도 파워드슈츠를 장착하면 마스터 나이트급 정도 전투력은 나왔으니까.
“확실히 현재 전력으로는 가볍게 처리하기에 힘든 상대 같긴 하군요.”
김검천에게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어 보이자 쟈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권력자가 아니라는 거요. 그런데도 홀로 황제를 상대하겠다는 거요?”
“계획도 없이 황제에게 무작정 돌진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요. 그런데 드워프들은 제국에서 장난감 인형 취급이던데 그렇게 참고만 있겠다는 말입니까?”
노예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둘러 말하긴 했지만 쟈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김검천이 아픈 구석을 송곳으로 후벼팠으니까.
이곳 부족 안에서만 해도 제국과 싸우자는 드워프들이 많았다.
가끔은 혼자 몸으로도 제국에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고.
하지만 쟈칸은 불꽃 망치이자 이 부족의 지도자였다.
마을 드워프들을 놔두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드워프 치프인 자신이 황제를 잡겠다고 나서는 순간 드워프 일족이 절멸당할 지도 몰랐다.
쟈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몸도 황제란 작자의 머리를 망치로 으깨버리고 싶지. 다만 짊어진 게 너무 많아.”
김검천도 망설이는 쟈칸이 아예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취한 행동의 결과가 자신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김검천도 한때는 10만명을 움직이는 위치에 있었지 않은가.
다만 지금은 몇 사람만 돌보면 되었기에 적어도 쟈칸보다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고.
“그러니 내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어째서? 자네 한 사람 정도라면 우리가 손을 쓰면 정보를 은폐할 수 있을 걸세.”
“맞고 그냥 넘어갈 정도로 성격이 좋지는 않거든요. 먼저 가만히 있는 날 건드린 건 황제니까요.”
사람들이 모두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김검천이 강하다는 건 글래셔를 상대한 것만 봐도 모두가 인정할 정도였다.
그래도 무슨 수로 황제를 처리하겠다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몸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쿠퍼의 경우에는 김검천이 하려 든다면 제국 황제라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김검천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된 일을 모두 해결해 오지 않았는가.
설령 상대가 황제라고 할지라도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물론 쟈칸은 쿠퍼와 달리 김검천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다른 결론을 도출해냈다.
“후회할지도 모르오.”
“당하면서 후회할 바에는 일단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아, 김검천님의 나머지 일행들은 세이야, 그리고 리에라고 들었는데 필요하다면 우리 드워프 일족이 그들을 위한 피신처를 마련해 주겠소.”
“그들에 대한 걱정이라면 안 해도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요.”
함선 미르가 없었다면 김검천도 외부의 위협에 대해 조심스럽게 대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선이 있었기에 뒤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미리내가 김검천에게 가장 간단한 방법을 권유했다.
[보유 중인 핵미사일을 제국에 발사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안전장치만 해제하면 됩니다만.]
“언제는 규범에 따라 자제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저는 인공지능이지 규범을 지켜야 할 인간은 아니니까요.]
“대신 내 명령에는 따라야겠지. 그건 다른 방법이 없을 때를 대비해 비상수단이라고.”
[하긴 함선 미르에서 제국 수도까지는 사정거리가 조금 모자라 보입니다.]
“밥 먹고 산책가자는 듯이 가볍게 말할만한 게 아니거든?”
다른 사람은 몰랐겠지만 지금 제국 수도가 김검천에 의해 구원받았다.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는 해두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준비하더라도 발사만큼은 주의해야 해. 이곳 문명 레벨에는 과한 힘이거든.”
[그러면 만약의 일을 대비해 저도 안전장치를 걸어둘까요?]
“그래. 나도 사람이니까 혹시 실수를 할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뭔가 아쉬운 듯한 미리내였지만 김검천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을 테니 넘어가기로 했다.
미리내와 대화를 듣던 쟈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관점으로는 김검천은 혼잣말을 하고 있던 것이다.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기라도 한 거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그러지 않았소?”
“잠깐 미리내와 이야기하던 중이지요.”
“미리내라면?”
방금 전 미리내와의 개인 모드로 대화했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김검천의 허락을 받아 쿠퍼가 쟈칸에게 미리내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런 정도까지는 알아도 관계없었다.
전술형 핵융합 미사일 같은 한 발로도 대량 살상이 가능한 무기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런 건 남들의 의견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할만한 무기가 아닌 것이다.
물론 쿠퍼나 세이야의 생각을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사용한다고 해도 먼저 상황과 정보를 살핀 후 김검천이 결단을 내릴 일이었다.
이들에게는 마스터 나이트급의 사병용 파워드슈츠만 해도 놀랄 정도의 힘 아닌가.
그렇기에 김검천은 핵미사일은 말하지 않고 대신 생각해둔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우선 수도에 소수 정예로 잠입해 황제를 처치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지요. 나와 내 일행들이 강하니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제국의 상징이자 정점인 황제를 죽이자는 말이었지만 이제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쟈칸만 해도 황제를 죽이는 게 겁나는 게 아니라 동족에게 피해가 올까 봐 그런 거였으니.
거기다 한때 제국 기사였던 쿠퍼가 가장 앞장서서 김검천의 말에 동의했다.
마치 현재 황제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국 수도에 잠입할 때에는 저도 돕게 해주십시오. 왕국에서 못 도와드린 몫까지요.”
쟈칸이 쿠퍼에게 물었다.
“왕국에서 자네 일행들이 무슨 일이 했길래 그러는 건가?”
“자신이 왕이 되려던 귀족 녀석을 혼 내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김검천님이 대공의 작위를 받으셨지요.”
“그건 인간들의 작위 중에서도 황제나 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작위 중 하나 아닌가?”
쟈칸이 놀란 표정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김검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놀라운 사실이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김검천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어쩌다 보니 받게 된 거지요.”
“드워프라고 해도 대공이라는 작위가 얼마나 높은지 정도는 안다네. 거기, 샤칸.”
쟈칸이 샤칸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샤칸은 뭔가 자신이 잘못했나 싶어서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혼내려는 게 아니었기에 쟈칸은 샤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응? 왜 그렇게 움찔거리느냐? 잘했다고 어깨를 친 게 혹시 아팠냐?”
“그건 아니지만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했다고요?”
“네가 인간 세상으로 뛰쳐나가더니 이렇게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 몰랐거든.”
“아니, 제가 사고만 치는 드워프인 줄 아셨습니까?”
“네 가슴에 손을 얹고 먼저 생각해봐라. 안 그런가.”
샤칸이 루시엘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으려고 하자 쟈칸은 일단 한 대 때리고 보았다.
그러고 나서 쟈칸이 진지한 얼굴로 김검천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 계획대로 할 건가? 제국 수도는 다른 왕국 사람들과 이종족을 배척하는 자들이 많으니 검문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쿠퍼가 가슴을 치며 입을 열었다.
“저는 한때 제국 기사였습니다. 그렇기에 제국 수도에 침입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 같은 이야기니 제국 기사였던 사실을 밝히는 쿠퍼였다.
김검천과 세이야도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쟈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 기사였기에 그렇게 자신하던 거였나? 하나만 물어보지. 제국 기사에서 물러난 지 적어도 5년은 지나지 않았나?”
쿠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 기사였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은퇴한 기간까지 짐작했으니까.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만약 최근에 제국 기사를 그만두었다면 그런 소리는 못 했을 테니까. 현재 제국 수도는 등록된 사람들만이 거주할 수 있고 출입도 그에 준하는 검문을 거쳐야 해.”
쿠퍼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대비해 전투 준비 태세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떠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쿠퍼는 몰랐지만 김검천은 세이야의 왕국과 제국이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는 걸 떠올렸다.
이미 그때부터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물었다.
“그 정도로 검문이 철저하면 기본적인 물류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원래 수도에 살던 제국인들을 대상으로 상인이나 용병길드 같은 곳을 이용한다고 들었소.”
“길드라는 곳을 이용해 위장 신분으로 침투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것보다 괜찮겠소?”
김검천이 대공이라는 말을 들으니 쟈칸의 말투가 좀 더 정중하게 변했다.
드워프라도 외부의 정보를 접할 일이 많다 보니 타 종족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모양이었다.
“뭐가 말이지요?”
“한 나라의 대공으로서 제국 황제를 처리하겠다고 나선 거 말이요. 제국과 왕국의 외교 문제로 번질 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소?”
“대공이라 대놓고 행동할 생각은 없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국왕과 테이룬, 그리고 대귀족들 중 일부 정도만 대공이라는 걸 아니까요.”
“호오, 그러고 보니 귀족도 아닌데 바로 대공이 되었다고 했지요.”
“그러니 일부러 대공이라고 밝히지만 않는다면 딱히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김검천 일행이 변경백의 영토에서 난동을 피울 때도 대공이라는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다.
대공인 게 알려졌다면 경비병이 쿠퍼가 제국 기사였다는 정도에는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공이라는 신분은 드러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내가 관계된 문제로 난 모를까 세이야의 왕국까지 공격받으면 곤란하니까요. 나에 대한 건 알려져도 상관없습니다만.”
지켜보던 세이야의 표정은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듯했지만.
쟈칸이 감탄한 표정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과연. 여러 개의 진실 속에 하나의 거짓말을 숨긴다면 사실처럼 들리는 방법이로군요. 현명하십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정말로 현명했다면 드워프의 일로 변경백을 박살 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테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자세한 사정은 샤칸에게 들어보시지요.”
쟈칸은 일단 샤칸을 양손으로 들며 탈탈 털었다.
“아, 또 왜요!”
“네가 무슨 잘못을 했으니 김검천님이 저런 말을 한 거겠지! 그래? 안 그래?”
“지나가는 길에 인간에게 같은 드워프가 맞고 있길래 못 참은 것도 죄입니까?”
자신이라도 날뛰었을 것 같기에 쟈칸이 잠시 손을 멈칫했다.
가만히 있던 루시엘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보았다.
“그건 죄가 아니지만 변경백을 두들겨 패고 영지를 탈주하게 된 게 샤칸 탓이긴 하지요.”
“샤칸, 이 바보 놈아! 그러면 제국 영지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하지 않느냐!”
“그건 가봐야 아는 일이지요!”
***
샤칸이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굳이 변경백의 영지로 돌아가 봐야 알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김검천 일행이 변경백의 영토로 진입한 순간 그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있을 거라는 것을.
그것도 손에 무기를 든 제국 기사들이 살기 어린 눈빛을 뿜어내면서 말이다.
“이 드워프는? 네 녀석들이구나! 변경백님을 공격하고 도주했던 녀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