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김검천과 쿠퍼, 루시엘이 동시에 샤칸을 바라보았다.
샤칸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데헷.”
루시엘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런 상황에서 귀여운 척하지 마십시오. 속이 이상합니다.”
“어차피 들킬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잖아?”
“그러면 뻔뻔하게 굴지나 말라는 겁니다.”
이런 마당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둘이었다.
이미 들킨 상황이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김검천이 먼저 마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당당한 김검천의 모습에 오히려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제국 기사들이 흠칫할 정도였다.
김검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도주했다는 말은 정정하도록. 귀찮아서 너희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그런 것도 귀찮아하는 녀석이 감히 백작 각하를 공격해?”
“내가 공격한 게 아니거든? 도주했다는 오해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손과 발을 놀려주도록 하지.”
김검천의 행동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 스스로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에잇! 바보 같은 놈들이!”
만약을 대비해 관문의 기사들의 지휘를 맡고 있던 부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부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저런 상대를 앞에 두고 망설임 없이 앞장서다니 과연 부기사단장의 자격이 있었다.
“과연 부기사단장이야.”
“우리는 못 하는 걸 태연하게 해버리지!”
“그 점을 존경한다고.”
“너!”
부기사단장이 갑자기 자기 뒤에 있던 기사단의 막내를 지목했다.
부기사단장의 용감한 모습에 감탄 중인 막내 기사가 바로 대답했다.
“예! 명령만 내리십시오!”
“그러면 네가 저자들의 목적이 뭔지 알아보도록 해라. 알겠나?”
“예? 부기사단장님이 하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이 몸은 지금부터 백작 각하에게 보고를 드리러 가야 하니 지금 저런 녀석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부기사단장은 그 말을 끝으로 급히 성문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이 자리의 누가 말릴 틈도 없는 빠른 동작이 과연 부기사단장다웠다.
무리한 명령을 수행하게 된 막내 기사가 울상을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주변의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야, 아까 성벽 위에서 마차를 발견하자마자 백작 각하께 전령을 보내지 않았냐?”
“부기사단장님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우리는 못하는 걸 태연하게 해버리잖아. 저래도 되는 거냐?”
“그러면 네가 막내를 대신해 저 녀석을 상대하려고?”
“그건 좀. 도주했다고 말하긴 했지만 성문도 단번에 날려버린 실력자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아무래도 부기사단장은 겁이 나서 도망친 거 같은데.”
“우리는 어쩌고?”
“어쩌긴. 우리 같은 일반 기사들은 여기서 죽어라 막다가 그래도 죽으라는 거겠지.”
“자기는 안전한 자리에서 숨어 있다가 나중에 생색이나 내겠다는 건가. 더러워서.”
갑자기 명령권자가 사라진 기사들은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을 지휘해야할 사람이 도주했으니 당장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김검천 말고도 마차에서 쿠퍼와 샤칸, 루시엘마저 모습을 나타냈다.
김검천도 상대하기 힘든 판국에 다른 조력자까지 늘어나다니.
김검천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기사들은 움찔거렸다.
그러다 보니 김검천과 마차 주변을 둘러싼 포위망이 제대로 형성될 리가 없었다.
김검천이 그 꼴을 보며 피식 웃었다.
“포위망을 그렇게 늘린 상태로 있으면 우리들이 도망가도 못 막아설 텐데?”
남아있던 기사들 중 한 사람이 그나마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것이 우리 기사단의 전투 규범인 것이지!”
“강적을 만나면 도망갈 준비부터 하라는 것이? 그것 참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규칙이로군.”
“제… 젠장! 무시하지 말라고! 에잇, 한꺼번에 덤비면 놈들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으아아!”
마치 비명처럼 들리는 기합을 지르며 기사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기겠다는 각오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런데 가장 앞장선 기사가 마나 소드를 김검천에게 적중시켰다.
- 깡.
마나 소드가 갑옷을 관통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나쁜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믿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검을 찔러 넣은 기사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느낌을 무시하며 환호했다.
“해…해냈다!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어!”
- 툭.
활짝 펴졌던 기사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김검천의 파워드슈츠에 쑤셔 넣었던 검날이 반 토막이 난 채로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믿고 싶다고 해도 눈으로 직접 본 것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기사가 급히 검을 버리고 도망치려는데 김검천이 그의 뒷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네 말대로 너희들은 정말 별 것 아닌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잡혀서 발버둥 치던 기사는 이 정도가 자신들의 실력이 아니라고 항의하고 싶었다.
물론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돌아온 김검천의 관심 어린 손짓은 다른 대답을 강요했지만.
- 퍽.
“으악!”
가슴 부분을 정통으로 맞은 기사가 공중을 날았다.
마갑의 무게와 합치면 100킬로도 넘는 금속으로 보호된 원거리 무기가 된 채로.
그런 것에 휩쓸린 기사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바닥을 뒹굴게 된 기사 3명이 꼼짝도 못 하는 걸 보니 어딘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주먹 한 방으로 3명을 때려잡은 셈이었다.
“다… 다리가!”
“크흑… 숨쉬기가 힘들어.”
“팔이 이상하게 휘어졌다고!”
김검천에게 당한 기사들이 알 리는 없었지만 뼈가 부러진 건 그나마 다행인 편이었다.
쿠퍼와 샤칸, 루시엘과 상대 중인 기사들은 더 심한 상황이었으니까.
망치가 무기인 쿠퍼와 샤칸에게 달려든 자들은 자신의 불운을 탓해야 했다.
애초에 망치 같은 둔기는 마갑 같은 방어구를 입어도 상대의 내부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런 둔기에 마나까지 서려 있으니 그 파괴력은 자기 몸으로 느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 뻑!
- 퍽!
“억! 이 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야!”
“크학! 둔기 때문에 힘이 빠진다…”
둔기에 두들겨 맞은 기사들은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아예 으스러진 걸로 보였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당분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 정도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상처인 것이다.
빈 활을 든 루시엘을 만만하게 보고 공격한 쪽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루시엘이 활시위를 튕길 때마다 몸 어딘가에 손가락만 한 화살 구멍만 뚫리고 있었으니까.
결국 나머지 기사들은 달려들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어떻게 하지?”
“싸움 중에 도망가면 즉결 처형이잖아. 어차피 죽는다고.”
“기사의 이름을 달고 도망가자는 말이 나오다니 이 겁쟁이들이… 으악!”
자신은 다른 동료와는 다르다는 듯 김검천에게 달려들던 기사가 지면에 고개를 박았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건 겁쟁이는 아니군. 바보이긴 하지만.”
그때 기사 한 명이 성문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봐! 부기사단장이 돌아오는데?”
“도망친 거 아니었나? 아, 지금 다른 기사들과 오는 중이야. 기사단장님도 같이 있다고!”
“기사단장님은 백작 각하의 호위 책임을 맡고 있을 텐데?”
“부기사단장 녀석, 도망가는 도중 백작 각하 일행과 만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거 아닐까?”
“그럼 그렇지. 보고는 무슨 보고. 그냥 도망가려다 들켜서 아닌 척하는 거겠지.”
기사들의 추측대로 도망친 걸 들키지 않으려고 급히 돌아온 부기사단장이었다.
도망친 것 치고는 무서운 기세로 그가 김검천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변경백과 기사단장이 바로 뒤에 있으니 잠깐만 김검천을 상대하며 시간만 끌 생각이었다.
“네 이놈! 감히 백작 각하의 기사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공격하기에 반격한 거지. 눈은 뒀다가 뭐하냐. 그냥 당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흥, 잠시 후면 그런 건방진 소리 같은 건 꿈도 못 꾸게 될 것이야.”
부기사단장이 뒤를 힐끔거리며 지원군과의 거리를 재보았다.
바로 뒤에서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기사단장이 말보다도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변경백이 자신의 호위 기사단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 확인이 끝난 부기사단장은 김검천을 향해 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린 채 달려들었다.
어차피 뒤에 달려오는 변경백이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이렇게 된 바에는 김검천을 공격하는 모습을 변경백과 기사단장에게 보이는 게 나았다.
물론 그것도 살아남아야 쓸모가 있는 법이다.
부기사단장은 이번 공격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부기사단장도 김검천의 손에서 살아남겠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끝마친 것이다.
“받아라!”
- 부우웅.
양손으로 잡은 검을 상단으로 치켜든 건 단 한 번에 모든 걸 담는다는 의미.
그의 검에서 마나 플레임 소드가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하는 행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실력만큼은 지위에 어울리는 상급 기사인 것이다.
“받고 하나 더 가주지.”
- 스윽.
김검천은 내려찍히는 마나 플레임 소드를 향해 광선검을 휘둘렸다.
가벼운 절삭음과 함께 마나 플레임 소드 채로 검이 두 조각나며 허공을 갈랐다.
부기사단장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 단 일검에 무기 채로 저지당하다니.
김검천은 그런 부기사단장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광선검을 휘둘렀다.
부기사단장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광선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마갑은 이미 형태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부기사단장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려다가 앞으로 꼬구라졌다.
“운이 좋다면 죽지는 않을 거다. 마갑만 벨 정도로만 거리를 조절했거든.”
“부기사단장이 저렇게 간단히 당하다니? 마나참!”
기합 소리와 함께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벨 수 있는 원거리 마나 공격이 날아들었다.
김검천은 귀찮다는 듯 광선검을 흔들었다.
날아들던 마나참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자신 있게 공격한 마나참이 실패한 기사단장이 김검천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그건 오러 소드? 설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나이트인 건가!”
그때였다.
기사단장의 뒤를 이어 도착한 변경백이 분노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다들 뭐하는 짓이냐?”
변경백이 외치자 남아있던 기사들이 좋든 싫든 죽을 각오를 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이곳에서 왕이나 다른 없는 변경백에게 찍히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변경백이 명령하면 죽는 시늉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이다.
상대가 괴물이든 괴물보다 더한 인간이든지 간에.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기사들이 김검천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데 변경백은 그 모습을 보자 오히려 화를 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도대체 누가 저들을 공격하라고 한 것이냐?”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기사단장이 변경백에게 변명하듯이 말했다.
“저번에 백작 각하께서 저들을 끌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본작이 언제 강제로 끌고 오라고 했었나! 나중에 보게 되면 데려오라고 했었지!”
김검천과 샤칸이라는 드워프는 변경백을 죽일 듯이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런 자들을 제압해서 끌고 오라는 말이 아니라니 변경백은 갑자기 노망이라도 든 걸까.
가슴 속에서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기사단장이 되물었다.
“백작 각하. 설마 싶지만 저들을 모셔오라는 말씀이었던 건 아니겠지요? 저들은 영지의 성문을 박살 냈으며 백작 각하를 공격한 큰 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자들 아닙니까?”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변경백의 입으로 향했다.
변경백의 의외의 행동에 김검천도 잠시 손을 멈출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