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말만 들어보면 자신은 백번을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저지른 것 같지 않은가.
변경백은 말이 안 통하는 기사단장이 답답한지 그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비켜라! 김검천이라는 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백작 작하? 위험합니다! 너희들! 뭘 멍하니 서 있느냐!”
기사단장이 다급히 주변 기사들에게 손짓을 해 변경백을 호위하도록 신호를 보냈다.
김검천에게 향하기 전 변경백은 부기사단장에게 먼저 다가섰다.
의식이 희미하던 부기사단장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변경백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백작 각하, 이런 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손수…”
변경백은 부기사단장의 말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떨어져 있는 검과 마갑을 살펴보았다.
강렬한 열기에 의해 베어진 자국이 확연히 보였다.
변경백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부기사단장. 저자와 겨룰 때 마나 플레임 소드를 썼나? 그런데도 이렇게 된 건지 말해라.”
“단 일격이었습니다. 저자의 일검에 이렇게 되었지요. 그보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너는 다른 자들이 알아서 할 거다.”
부기사단장을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변경백이 김검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난 상관없긴 하지. 하지만 다른 자들은 그걸 싫어하는 것 같은데?”
변경백이 주위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기사단장을 비롯해 다른 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칼을 들고 죽이니 살리니 하던 살벌한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변경백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단호히 명령을 내렸다.
“저들이 저지른 일이 있다지만 오늘 이후로 모두 잊어라. 다시 말하지만 저들은 적이 아니라 손님이다. 알아듣겠나?”
의문에 잠긴 다른 사람들을 대표라도 하듯이 기사단장이 나서서 변경백에게 물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위해를 끼친 자들을 그냥 넘어가라는 겁니까?”
어찌 보면 신하가 주군에게 대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기사들의 정점인 기사단장 정도 되는 위치라면 못할 정도의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변경백은 대답 대신 주먹으로 기사단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 퍽.
“백작 각하?”
기사단장은 멍한 눈으로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둘만 있는 자리도 아니고 다들 보는 앞에서 뺨을 후려 맞다니.
육체의 고통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잠시 혼이 나갈 정도로 치욕스러운 장면이었다.
기사단장의 마음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짜증 난 어투로 변경백이 말했다.
“네가 황제도 아닌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냐? 이곳의 지배자를 향해서?”
“…백작 각하의 신변이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네 할 일이나 해라. 귀찮게 하지 말고.”
뺨까지 맞은 기사단장은 더 이상 아무 대답 없이 허리를 숙이더니 물러났다.
변경백은 손짓으로 다른 기사를 부르며 부기사단장을 가리켰다.
“이거나 치료해주도록 해라. 누워있는 다른 기사들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들과 전투 중이라 당장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까 저들은 적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가 전투 중일 리 없지.”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변경백에게 시원하게 대답은 했지만 기사들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김검천 일행들을 향해 무방비 상태로 동료 기사들을 옮겨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그들 중 아무나 무기를 휘두르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변경백의 명령을 안 따르는 건 후환이 두려웠고.
기사들에게는 다행히도 전투가 다시 시작되지는 않았다.
김검천은 별 원한도 없는데 굳이 싸우지 않겠다는 상대를 잡고 늘어질 생각이 없었다.
대신 김검천은 앞에서 움찔거리며 지나가던 기사 한 명을 가리켰다.
“너.”
“히익! 왜… 왜 그러십니까?”
괜히 트집잡히고 싶지 않아 반말을 하려다 슬쩍 존칭을 쓰는 기사였다.
번개 같은 태세 전환의 태도에 김검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태에서 너희들 뒤통수는 치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부상자들을 데려가라고.”
“정말입니까?”
“나도 이유도 없이 싸우고 싶지는 않거든. 무엇보다 너희들 상대로 기습 공격 같은 걸 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내가 이기는데.”
기사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정면에서 맞붙은 상황에서도 박살 나던 건 기사들이 아니던가.
너무 대놓고 말해서인지 자존심이 상한 기사가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지금 우리 기사들을 모욕하는 거요?”
“사실을 말한 게 모욕이라면 그런 거겠지. 그리고 방금 전까지는 죽이려던 사이인데 말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말문이 막힌 기사에게 변경백이 다가와 소리쳤다.
“뭐하고 있는 건가? 부상자나 옮기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마침 잘되었다는 듯 기사가 급히 자리를 비키자 변경백이 김검천에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다면 잠시 둘만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원한다면 네 일행들도 들어도 좋다.”
“나야 상관없지만. 그보다 내가 겁나지 않는가? 이렇게 근처까지 오다니 누가 네 생명을 보존해준다는 말인가?”
김검천이 슬쩍 손을 뻗어 보였다.
거기서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변경백의 어깨에 닿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변경백은 주변의 기사들을 보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나만 솔직히 대답해 주겠나? 네가 죽이려고 든다면 이 몸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
“무리지. 내가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 자리에 누가 있다 해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군. 그러니 너와 거리를 벌리는 게 무슨 의미일까. 어차피 죽기 전 추태만 더 보일 테지.”
“첫인상과는 제법 다른 모습인데. 그러면 일단 저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까.”
“서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배려에 감사한다.”
변경백은 마차에 타기 전 지시를 내려 모든 기사들에게 물러서게 했다.
김검천과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기사단장이 변경백에게 쳐맞는 모습을 본 기사들은 별말 없이 물러났다.
무슨 의도로 변경백이 그러는지 몰라도 말려보았자 소용없다는 걸 보았으니까.
마차 주변에 남은 건 쿠퍼와 샤칸, 루시엘 뿐이었다.
김검천이 마차 문을 닫으며 변경백에게 물었다.
“그럼 먼저 말해보실까. 널 죽일 뻔한 일까지 넘어가면서 나와 대화하고 싶다는 이유를.”
“그건…”
변경백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급한 건 부탁한 변경백일 테니 김검천은 망설이지 않고 마차 문을 열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이야기 못 할 정도라면 그냥 돌아가시지. 시간 낭비다.”
“잠깐. 이제 와서 말 못 할 것도 없겠지. 황제와 관련된 이야기다.”
변경백이라는 작위를 받은 자가 황제 폐하도 아니라 황제라고 대놓고 말하다니.
뭔가 흥미로운 대화가 될 것 같았다.
마차 문을 다시 닫으며 김검천이 말했다.
“황제라고 대놓고 부르다니. 얼마 전 본 글래셔라는 녀석은 황제 폐하라며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던데 너는 좀 다른 모양이로군.”
“글래셔라면 설마 제국 사천왕? 그와 겨루기라도 했는가?”
“녀석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과연! 역시 사람을 잘 못 본 건 아니었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제국의 관문을 지킨다는 변경백이 제국 사천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다니.
아까 황제에 대한 발언도 그렇고 속내가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와 관련 있는 일인가?”
“그래. 이 몸에게는 황제가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니까 “
“나보고 대신 황제를 저주라도 해달라는 건 아닐 테고. 그쪽에는 재능이 없다.”
“그 자에게는 저주 같은 게 안 통해.”
“경험자의 말 같군.”
“오히려 저주를 건 주술사가 도리어 저주를 받아 죽더군. 그러니 직접 죽여주었으면 한다. 그 증오스러운 황제를!”
뭔가 김검천 자신에게 있어 형편이 좋은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어떻게 황제에게 접근해 처리할 건지 더 나은 방도를 찾던 중이지 않은가.
김검천은 변경백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죽여달라라. 내 기억이 맞다면 네 아들이 황제에게 죽었지. 그 때문인가?”
“크크크, 그런 셈이지.”
“네가 미쳐 날뛰던 이유는 알겠지만 그 일에 나를 선택한 이유는 아직 안 말했다.”
“이유라. 그건 네가 제국과 관련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국과 상관없다는 걸 어찌 확신한 건가.”
“이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었지? 그 순간 머릿속에서 이 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10분만 숨을 참고 있어 주었으면 하는데. 그런 네 취향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거든.”
변경백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말이 아니다. 이 몸은 백작이기는 하나 기사나 군대로 따지자면 제국에서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지.”
“아아, 변경에서 외적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힘을 길러야 하니까 그렇겠지.”
“그런 본인을 두들겨 패고 내친 김에 영지 성문까지 날려버리는 녀석들이라면? 제국이라는 이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이겠지.”
“그래서 제국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건가.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텐데.”
김검천의 지적에 변경백이 깜짝 놀랐다.
무력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대단했다.
변경백은 김검천이 황제만큼이나 두려운 대상이 아닌지 걱정이 들었지만 바로 떨쳐냈다.
지금의 변경백이 원하는 건 황제의 파멸이었다.
김검천이 그 놀라운 능력으로 다른 뭔가를 할 수 있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황제를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말이다.
“너희들에 대해 뒷조사를 따로 한 것도 눈치챘다는 건가?”
사실 김검천도 떠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효과는 좋았다.
뒤를 캔 것이 찔렀는지 자기 입으로 뭘 했나 털어놓는 중이었으니까.
“제국 황제를 죽이려고 드는데 지나가던 아무나 잡고 부탁할 리는 없을 테니까.”
“역시 무력만 강한 자가 아니었어. 제국인이 아닌데도 너 같은 자가 다 있다니 세상은 넓군.”
그렇다 해도 변경백이 김검천에 대해 알아낼 수 있던 건 그 정도가 끝이었다.
김검천이 제국과 연관이 없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또한 쿠퍼는 제국 기사였다지만 은퇴한 지 옛날이었다.
샤칸과 루시엘은 이종족이었으니 살필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네가 사람을 구하는 편이 더 낫지 않나?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에게 부탁할 바에는.”
“이미 시도했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지.”
“무엇을?”
“마스터 나이트급 이상의 제국민이라면 황제의 손길이 닿아있다는 것을. 이런 변경의 기사단장마저 그럴 정도니까. 이상할 정도야.”
변경백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아들만 죽지 않았다면 황제에 대해 이런 의문마저 품지 못했을 테니까.
제국민들은 어릴 적부터 황제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게 일상생활에 녹아 있었다.
“일종의 집단 교육 같은 건가. 확실히 제국인이 황제를 공격하는 건 힘들겠군.”
“아니, 교육 이상의 뭔가가 그들에게 있었다. 세뇌라는 단어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말을 하는 변경백은 본능적으로 황제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반응을 보였다.
마치 정신 금제라도 받은 듯이.
황제에 대한 복수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던 변경백이 입을 열었다.
“못난 놈이라지만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분노의 말조차 내뱉지 못했다. 황제는…괴물이다.”
확실히 황제에 대한 충성 교육 같은 걸로는 나오기 힘든 반응이었다.
변경백의 말에 따르면 마스터 나이트급 이상 실력자들은 더 황제에게 맹목적인 것 같았고.
제국 사천왕 중 한 명인 글래셔도 그토록 황제를 위하던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어쩌면 지금 변경백이 보이는 반응도 그런 선상에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의 변경백은 아들의 죽음과 김검천에 의한 충격으로 황제의 그늘로부터 벗어난 것이고.
어쩌면 그 틈 사이에 변경백만의 다른 개인적인 욕심이 파고든 건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황제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지 않은가.
잠시 후 겨우 마음을 안정시킨 변경백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야말로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한 최고의 요건을 갖춘 자인 것이다. 복수만 해준다면 뭐든지 해주도록 하마.”
자신의 간이라도 빼줄 듯이 김검천에게 매달리는 변경백이었다.
김검천이 변경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떤 것도 들어준다라. 변경백쯤 되면 그런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