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김검천이 관심을 보이자 변경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스스로도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상대 같지 않은데 이런 조건을 내걸다니.
확실히 감당할 수 없는 짓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변경백은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에 말을 바꾸지 않았다.
막연히 예상하는 것과 실제 일어날 일은 다를 수 있었으니까.
보통 사람은 자신이 잘 못 되는 것보다 잘 되는 미래를 꿈꾸는 법이었다.
그래야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황제만 죽일 수 있다면 뭐든 못 해줄까 싶은데.”
“하긴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니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래도 하나 실망스러운 일을 알려주도록 할까? 난 오러를 못 써.”
“그럴 리가? 부기사단장의 마나 플레임 소드로 강화된 검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러밖에 없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다만 오러 이상으로 강한 힘을 쓸 수 있을 뿐이야.”
“오러는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강한 힘이라고? 마법 무기나 마갑의 힘이라는 건가?”
“우리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줄 필요가 있는 관계던가?”
“끄응, 그래도 아쉽긴 하군.”
“아쉬울 것까지야. 무엇보다 난 황제를 죽인다고 승낙한 적이 없거든.”
변경백의 얼굴이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채 이상하게 변했다.
이미 할 말 못할 말 다 했는데 김검천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자도 아닌 만큼 이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끝을 봐야 할 거 같았다.
“잠깐!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발을 빼겠다는 건가? 이제 와서 겁이라도?”
변경백이 김검천을 도발했다.
무력이 안 되니 다른 방향으로 공략하는 것이었다.
물론 김검천에게 있어 그런 건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느낌에 불과했다.
“겁이 나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황제를 암살하겠다는 변경백이라. 삼족을 멸한다는 반역죄의 장본인이 여기 있군.”
“큿, 누가 제국인도 아닌 너의 그런 말을 믿겠는가?”
말을 그렇게 했지만 변경백의 목소리에서부터 두려움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
감정의 흔들림을 알아챈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잃을 것이 많은 자는 비장의 수를 끝까지 보이지 않아야 했다.
변경백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나머지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어떤 자들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을걸. 변경백의 지위라면 그걸 차지하기 위해 없는 죄도 만들어낼 자가 넘쳐 날 테니까.”
“…협박하는 건가?”
“내가 왜? 황제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서.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적어도 네가 적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로군. 가능하면 빨리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하지만.”
“왜지?”
“황제의 탄신기념일이 다가오고 있거든. 그날이 오기 전에는 수도에 가야 한다.”
“황제의 생일을 맞아 뭔가 하려는 모양이군.”
“그 이상은 황제를 처리하겠다면 알려주도록 하지. 너도 그랬으니까 억울할 건 없겠지.”
“하긴 거기까지 말해줄 의무는 없지. 너와의 연락은 어떻게?”
“다음번에 이곳에 온다면 네 이름을 대라. 그러면 바로 본인에게로 안내해 줄 거다.”
김검천은 마차 문을 열고 나섰다.
뒤이어 김검천과의 대화로 지친 변경백이 마차 밖을 나서자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기사단장이 앞장서서 변경백에게 다가섰다.
그는 마치 변경백에게 두들겨 맞은 일이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태도를 보였다.
속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백작 각하. 무사하십니까?”
“괜찮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가도록 하지.”
변경백은 마차에 올라 떠나는 김검천과 일행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황제를 상대하려면 저들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해. 어떤 걸 요구하더라도 들어줘야겠군. 결국 살아 남았을 때 이야기겠지만.”
변경백은 몇몇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떤 기사는 제국의 수도로 떠났다.
김검천이 협력할지는 모르나 시간이 없으니 복수를 위한 준비는 미리 진행해둬야 했다.
***
한편 마차 안에서 김검천은 일행들에게 변경백과의 대화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다.
쿠퍼가 먼저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를 죽인다고요? 마스터 나이트와 수많은 호위 기사, 거기다 군대의 벽에 둘러싸인 황제를 처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쿠퍼,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저희들을 변경백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는 속셈이 아닐까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군. 너희들의 생각은?”
김검천이 루시엘과 샤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통 엘프가 이성적으로, 드워프는 감성적인 의견을 내놓기 마련이었다.
루시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변경백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과 주변마저 태워버릴 증오의 불같았지요.”
샤칸이 뒤이어 말했다.
“황제를 죽이고 싶다는 건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그자를 해치우고 싶어했거든.”
김검천이 의견을 모아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변경백이 황제를 없애고 싶어 하는 것만큼은 진심인 것 같군. 그를 믿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쿠퍼가 물었다.
“그러면 변경백과는 따로 저희들만으로 황제를 상대하는 겁니까?”
“아니, 그건 황제를 상대하는 건 변경백의 의견에 따른다.”
“예?”
“황제에 대한 변경백의 증오는 진짜라고 했지?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를 죽이기 전까지는 전력을 다해 우리를 지원해 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왜 변경백에게 승낙하신다고 안 하신 겁니까?”
“급한 건 변경백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기왕 하는 것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잖아? 예를 들자면 함선에서 다음 구역을 개방해 영관급 파워드슈츠를 입고 나선다던가.”
현재 위관급 파워드슈츠만 해도 마스터 나이트를 능가하는 힘이었다.
그보다 더 강한 영관급 파워드슈츠를 얻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해결하기 쉬워질 것이었다.
“하긴 변경백을 제대로 믿기 힘든만큼 우리도 따로 준비를 제대로 해두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 셈이지. 그 준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거야.”
쿠퍼와 루시엘, 샤칸 모두 김검천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마침내 함선에 도착하자 김검천은 함선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도록 하지. 지금은 돌아왔으니 휴식부터 취해.”
김천과 쿠퍼가 오는 걸 알았는지 함선 내에서 기다리던 세이야와 리에가 달려 나왔다.
세이야가 인사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얼굴을 숨기는 게 수상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김검천님.”
세이야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리에가 김검천에게 안기며 활짝 웃었다.
“다녀오셨어요.”
김검천이 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다녀왔단다.”
리에는 김검천에게 떨어지자 쿠퍼에게 안겼다.
첫 번째가 아니라서 그런지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쿠퍼의 표정이 밝게 개었다.
“돌아오셨어요!”
“리에야, 그동안 잘 놀고 있었니? 별일 없고?”
“응! 세이야 오빠가 잘 놀아줬어. 댕댕이랑 댕댕이 아기랑도 같이 놀았어!”
“댕댕이 아기라고?”
리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쿠퍼가 고개를 돌려보니 뭔가 꾸물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누가 챙겨두었는지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7마리의 작은 코폴드였다.
새끼 코폴드들은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가끔 하품만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댕댕이는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었다.
김검천이 어이가 없는 듯이 말했다.
“저 녀석 가끔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하더니 어느새 나도 못 한 결혼까지 했나 보네. 그런데 세이야. 넌 왜 얼굴을 숨기고 있는 거냐.”
“그게 김검천님이 언제 오시는지 몰라서 리에와 놀아주다 보니 얼굴이 엉망이라서요.”
세이야가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은 누가 낙서라도 한 듯이 얼룩덜룩 물들어 있었다.
최근 리에가 그림에 관심이 생겨 벽이나 종이에 그리고 있었다.
그게 김검천이 잠시 함선을 비운 사이 세이야의 얼굴까지 도화지로 사용하는 중으로 보였다.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리에가 한 거냐? 색감으로 봐서는 화장품이라도 바른 거 같은데.”
“원래는 댕댕이한테 발라보더니 저한테도 바르더군요. 이상하지요?”
“괜찮다. 뭔가 용맹한 전사의 분장처럼 보이니까.”
“엇, 정말인가요?”
그제야 세이야는 자신 있게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면서 자리를 떠났다.
지켜보던 쿠퍼가 조용히 물었다.
“제가 보기에는 전사가 아니라 댕댕이 얼굴처럼 보이던데요. 아, 김검천님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까지야. 나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예?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세이야에게?”
김검천이 쿠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말했다.
“살아가는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따르는 법. 모르면 행복한데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하긴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지요. 깊으신 생각을 몰라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쿠퍼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나중에 세이야를 놀릴 소재 거리가 생긴 것이다.
김검천은 이어 휴식 중이던 두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쿠퍼, 샤칸. “
김검천의 말에 쿠퍼와 샤칸이 다가왔다.
“예. 김검천님. 부르셨습니까?”
“아, 김검천님! 뭐든지 말만 하라고!”
김검천은 두 사람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샤칸이 별생각 없는 얼굴로 김검천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김검천이 슬쩍 손을 밀치면서 물었다.
“뭐하는 짓거리냐.”
“엥? 손바닥을 내밀길래 손이라도 필요한가 싶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라고 세뇌라도 한 거냐? 그게 아니라 너희들에게 줄 게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김검천이 손바닥을 내민 건 특정 기계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수신호 같은 거였다.
지금 공중에 떠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수리용 구슬에 말이다.
샤칸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마나도 없는데 허공을 나는 금속 물건이라니 샤칸이 좋아할 만했다.
수리용 구슬이 손바닥 위에 착지하자 김검천이 그걸 내밀었다.
“둘은 여기에 드워프 마을에서 가져온 오리하르콘 합금을 입혀주면 해. 쿠퍼는 비슷한 걸 만들어 본 경험이 있고 샤칸은 기술이 있으니 둘이 협력하면 될 테지.”
쿠퍼와 샤칸이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암! 우리 둘이면 못 할 게 없지!”
***
샤칸이 합류해서 그런지 쿠퍼 또한 제 실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확실히 드워프인 샤칸의 재주는 대단했다.
몇 주 후 김검천은 합금을 입힌 수리용 구슬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김검천은 엔진실에 들어가자마자 주 엔진이자 코어인 초신성 반응로를 살펴보았다.
혹시 모를 문제에 대비해 함선에 있을 때는 매번 확인하게 돼버린 일이었다.
“미리내. 봉인된 코어의 상태는 어떻지?”
[제가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행이야. 저번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곤란하니까. 보조엔진에서 나온 에너지로 엔진들을 안정화 시키는 작업이 먹힌 모양이네.”
[저도 동의합니다. 이제 수리용 구슬만 투입하면 보조엔진의 상태는 점차 나아질 거고요.]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지. 정체되어 있는 건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김검천이 양손을 펼치자 쿠퍼와 샤칸이 고생해 도금한 수리용 구슬들이 떠올랐다.
수리용 구슬들은 열핵융합 동력로에 그 몸을 올려두더니 액체처럼 흐물거렸다.
몸을 반으로 갈라 물웅덩이처럼 변한 수리용 구슬이 동력로에 나 있는 틈새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계기판의 수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리내. 상황은?”
[동력로의 출력이 점차 상승 중인 걸 보아 수리가 진행 중인 걸 확인했습니다.]
“지금 출력은?”
[이제 안정적으로 5% 출력을 내는 중입니다. 무리하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거지요.]
“그 정도면 영관급 파워드슈츠가 있는 구역의 차단문에 전원을 넣을 수 있을까?”
[안 됩니다. 주엔진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멈춘다면 또 모를까요.]
“그건 곤란하지. 주엔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대신 엔진 출력이 5%에 달했기에 특정 범위 안이면 무선 에너지 공급이 가능해졌습니다.]
“그건 무인 장비처럼 파워드슈츠에도 따로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은 한정되어 있지만요.]
“좋은 생각이 있어. 우리는 파워드슈츠에 마석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잖아?”
[에너지를 써버려 비어있는 마석에 다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식으로 쓰시겠다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어쩌면 영관급 파워드슈츠가 있는 차단문은 바로 열 수 있을 거 같네.”
김검천이 어딘가 놔둔 상급 마석을 찾아 엔진실을 나서는데 쿠퍼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쿠퍼. 무슨 일이지?”
“하하, 리에의 말대로 여기 계셨군요. 리에가 이걸 김검천님에게 가져다 달라고 해서요.”
쿠퍼가 내민 건 상급 마석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모습을 보니 김검천이 함선을 떠났을 전에 비해 제법 충전된 상태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리에가 얼마나 열심히 충전한 것인지 보일 지경이었다.
“리에가 이걸?”
“예. 김검천님이 상급 마석을 필요로 하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속는 셈 치고 그 말에 따랐는데 필요한 게 맞았나 봅니다.”
“마침 필요하던 참이었네. 고맙다. 쿠퍼.”
“별말씀을요.”
“리에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줘.”
“예.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볼일이 끝난 쿠퍼가 떠나자 김검천이 상급 마석을 파워드슈츠에 장착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았을까? 마치 미래라도 보는 것 같아. 왕국 때도 그랬고.”
***
예상한 대로 영관급 파워드슈츠 구역의 차단문은 별 무리 없이 열 수 있었다.
엔진실을 열 때보다도 더 쉽게 차단문을 열 수 있던 것이었다.
김검천은 이제 역할을 다한 위관급 파워드슈츠를 탈착해 한쪽 벽에 조심스럽게 놔두었다.
들뜬 표정을 지은 김검천이 영관급 파워드슈츠가 보관된 구역의 차단문을 들어섰다.
“이제야 원래 내가 쓰던 파워드슈츠와 만나게 되는군.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