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뺨을 맞은 건 단순히 육체가 아픈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무슨 이유인지 변경백이 김검천이라는 녀석과 만난 후 자신을 멀리하는 듯했다.
기사단장은 변경백의 영지와 근처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기사였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으니 굴욕이라고 생각했고.
제국에는 기사단장 이상으로 강한 자들도 많다지만 아직 만나보지는 못다.
그렇기에 기사단장은 조만간 변경백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빼놓고 다른 외지인들을 끌어들일 정도니 변경백 옆에 있어 무얼 하겠는가.
그전에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료받고 싶었던 기사단장은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게 기사단장이 변경백 몰래 김검천을 습격하기로 계획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만감과 황제와 제국을 위한다는 믿음으로 정의의 사도처럼 나섰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기사단장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주군인 변경백의 손님을 야간에 암습하러 간다는 미친 짓을 한다는 말인가.
“저기입니다.”
기사단장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기사 한 명이 내성 한 구석에 위치한 별관을 가리켰다.
백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크기의 별관은 그 몇 배 넓이의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손님이 오면 주변을 신경 쓰지 말라고 떨어진 곳에 있는 별관이 숙소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밤중이라도 약간의 소음 정도는 무시해도 될만한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준비도 해온 상태였다.
“죽음과 같은 적막이여. 침묵하라.”
기사 한 명의 손에서 마법 양피지 하나가 찢겨나가며 침묵 마법이 발동했다.
이로써 별관에서 벌어지는 소음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었다.
마법 유효시간이 긴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유지될 테고.
김검천 일행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기사단장이 앞장서 모범을 보이려 들었다.
그가 사람들을 지나 앞으로 나서는데 기사들 중 한 명이 불안한 듯이 물었다.
“기사단장님. 혹시나 싶지만 정말 괜찮을까요?”
“백작 각하의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 놈들 때문입니다.”
“흥, 걱정하지 마라. 일단 손을 써두었지. 자신 없다면 놈들과 겨룰 생각도 안 했을 거다.”
“기사단장님의 실력은 알고 있지만 백작 각하를 공격할 때 정예인 호위 기사들을 순식간에 때려 잡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거기다 성문도 단번에 깨져나갔다고 들었거든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호위 기사들이 정예라고 해도 기습 공격에는 어쩔 수 없지.”
“북측의 성문이 박살 난 것도 소문입니까?”
“듣자 하니 성문의 방어 마법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이 몸도 성문정도는 부술 수 있지.”
제대로 마법이 발동했지만 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기사단장이었다.
기사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기사단장을 쳐다보았다.
과연 영지 내 최고 실력자답게 깔끔하게 의혹을 해소시켜주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사단장님.”
“우리 정도의 마나 소드라면 전력을 다해도 두꺼운 성문의 일부도 가르기 힘들 텐데.”
“기사단장님만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기사단장이 기사들의 시선을 받자 등을 세우며 가슴을 쭉 폈다.
기사들에게 주목받는 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기사단장은 그가 자신 있는 이유 중 하나를 말해주기로 했다.
“물론이다. 거기다 이 몸은 근래 깨달음이 있어 마나의 벽을 넘었다. 황제 폐하의 전령이 혈석이라는 걸 전해준 덕이지.”
“그 말씀은 설마?”
“그렇다. 며칠 전 마스터 나이트가 되었지. 마나의 극에 달해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것이야.”
“부럽습니다. 저희는 언제쯤이나 기사단장님 실력의 반이나 따라갈 수 있을까요.”
“너희도 하면 된다.”
“그렇군요! 피와 살이 되는 조언 감사드립니다!”
기사들로부터 존경을 뛰어넘어 기사단장을 우상화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기사단장은 그럴수록 턱은 치켜 올라갔고 허리가 활처럼 휘어져 갔다.
그때였다.
“서로의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 주는 거냐? 가만히 지켜 보고 있기도 힘드네.”
“하하하, 힘들… 다라는 말을 한 녀석은 도대체 누구냐?
“누구긴 누구겠냐. 너희들의 목표지. 여기까지 왔는데도 목소리 하나 기억하지 못하나?”
별관의 지붕 위에서 김검천이 천천히 일어섰다.
숙소 안에 있어야 할 김검천이 어느새 밖에 나와 있던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김검천을 보자 기사들이 당황했다.
기사단장이 팔을 내저어 기사들을 향해 침착하라는 수신호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눈치를 챈 거냐?”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 수십 명이 단체로 몰려와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있는데 눈치를 못챌 리가? 바보나 할 소리군.”
침묵 마법은 소리를 밖으로 못 빠져나가게 하는 것이지 소리 자체를 없애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기사단장과 기사들도 대화 자체를 못 할 테니까.
기사단장의 얼굴에 슬쩍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밤이 아니었다면 기사들 중 누군가 목격했을 것이다.
기사단장이 의혹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이 시간이라면 분명히 자고 있어야 할 텐데.”
“혹시 이걸 믿고 그런 생각을 했던 건가?”
김검천이 물병을 하나 들어서 흔들어 보였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물병이었지만 그것 본 기사단장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김검천이 기사들을 향해 물병을 집어 던졌다.
기사들이 황급히 날아드는 물병을 피했다.
김검천이 그렇게 세게 던진 건 아니었는지 물병에 직접 맞은 자는 없었다.
물병에서 흐른 물을 못 피한 기사는 몇 명 있었지만.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어?”
기사 한 명이 김검천에게 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물병에서 뿌려진 물을 못 피해 얼굴이 흠뻑 젖은 기사였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주… 죽었어?”
“아니, 숨은 쉬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닌 것 같아. 이건… 자고 있는데?”
“뭐? 이런 와중에 잔다고? 말도 안 되잖아.”
“당연히 그냥 잠이 들었을 리가 없지. 아까 물병에서 흐른 물에 뭔가 섞이기라도 한 모양이야.”
“설마 수면제인가? 이 정도로 효과가 빠르고 강력한 수면제라면 마법 물품일 텐데.”
“적에게 쓸 거라서 가지고 다닌 거라면 굳이 물에 섞어 던질 이유가 없을 텐데. 수면 마법 양피지도 있잖아.”
기사들의 의문에 대해서는 물병을 던진 김검천이 직접 대답해주었다.
“그거?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 숙소에 있던 거라고. 우리에게 어떻게든 먹이고 싶었나 보더군. 그래서 누가 그랬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기사들이 기사단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아까와 정반대의 감정을 담겨 있었다.
사람들의 혼란, 의혹, 그리고 경멸을 한 몸에 받은 기사단장은 검을 꺼내 들었다.
기사단장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곁에 있던 기사들이 급히 거리를 벌렸다.
기사단장이 그런 기사들은 놔둔채 검을 치켜들었다.
검에서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마나 플레임 소드가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넘실거리던 마나 플레임 소드가 사라져갔다.
그 자리에는 투명한 보석 같은 오러가 마나 대신 검의 표면을 덮고 있었다.
방금 전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오러를 본 건 처음이기에 기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오러?”
“마스터 나이트다!”
“진짜였어!”
오러를 뿜어낸 기사 단장이 김검천을 향해 자신 있게 외쳤다.
“어떠냐! 마나가 극한에 달해 얻어진 이 오러가 보이느냐?”
“오러를 쓰는 기사가 이런 일반 영지에도 있다니. 의외로 마스터 나이트라는 게 많은 건가?”
“그럴 리가 있겠나? 이 몸처럼 하늘이 내린 재능뿐만이 아니라 황제 폐하가 하사하신 혈석이 없었다면 오러를 얻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사단장을 쓰레기처럼 보던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기사단장의 행동이 비열했지만 마스터 나이트는 그들이 원하는 목표였으니까.
강한 것은 정의인 것이다.
“기사단장님은 역시 다르군. 저 정도면 수면제도 필요 없었을 텐데.”
“에이. 마스터 나이트가 뭐가 두려워서 저자들을 상대로 수면제 따위를 쓸까.”
“그래. 수면제를 넣었다는 건 상대가 안 되는 자들을 처리하기 귀찮을까 봐 그러신 걸 거야.”
정말 자신이 있었다면 혼자 행동하지 이렇게 단체로 몰려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들은 오러에 정신을 빼앗겨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검천이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변경백이 시킨 건 아닌 것 같네.”
“이런 용기가 백작에게 있을 것 같으냐? 오직 이 몸만이 너를 처단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지.”
“어디 그런가 볼까?”
김검천이 별관 지붕에서 뛰어 기사단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기사단장이 김검천을 향해 오러 소드를 뽑아 들었다.
“바보 같은 놈! 공중에서 피할 곳이 있을 리가! 단번에 두 조각으로 만들어주마!”
마나를 있는 대로 불어넣은 오러 소드가 김검천의 발밑부터 그대로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김검천이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듯이 수평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김검천은 공중에서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단장은 전력을 다해 휘둘렀는데 빗나간 오러 소드를 되돌리기에 늦은 것 같았다.
“어?”
- 빡.
기사단장이 몸을 몇 번 흔들거리더니 앞으로 자빠졌다.
지켜보던 기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오러를 뿜어내는 마스터 나이트가 단 일격에 제압당한 것이다.
김검천이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단장을 보며 말했다.
“오러도 제대로 된 오러가 아니고. 오러참이나 오러섬도 아니고 그냥 오러 소드를 휘두르고 보다니. 약한 이유가 있군.”
“마스터 나이트인 이 몸이 약하다고?”
“오러를 쓰면 기사 생활 끝나냐? 일단 상대를 맞추지도 못하는 오러를 어디다 쓸 수 있는지부터 고민해야지. 정작 자신이 뿜어낸 오러에 휘둘리기나 하고.”
김검천이 고개를 돌려 기사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김검천의 눈빛이 닿을 때마다 화살이라도 맞은 듯 움찔거렸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기사 단장도 단번에 때려잡은 김검천이었다.
명분도 승산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기에 한 사람이 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기사단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괜찮다면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말이 짧다?”
“크흠. 그러니까 우리는 별 상관없으니 그냥 가도 되겠소?”
기사단장을 때려잡으니 이미 일이 끝난 것 같았다.
김검천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싸울 마음도 없고 변경백의 얼굴을 봐서라도 많은 피를 보기에도 그랬다.
저들에 대한 처우는 나중에 변경백이 알아서 하겠지.
“좋아. 이번만큼은 변경백을 봐서 이 정도로 봐주도록 하지. 다음은 없다.”
기사들은 큰 은혜라도 입은 듯이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일어설 힘도 없어 보이는 기사단장을 내버려 둔 채.
김검천도 그런 기사단장을 뒤로하고 숙소로 들어섰다.
기사단장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완벽한 무시였다.
무시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것만큼이나 굴욕적인 건 없었지만.
“차라리 단칼에 죽여주던가! 젠장, 아무도, 아무도 없는 거냐? 도와줘!”
기사단장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기사단장의 머리 위로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졌다.
기사단장이 겨우 고개를 들어 누구인지 확인해 보았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변경백이었다.
“백작 각하?”
“기사단장. 이게 무슨 꼴인가.”
변경백은 무릎을 굽혀 기사단장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백작 각하!”
“그래.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다 끝난 일이지.”
기사단장은 저절로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설마하니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변경백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다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변경백의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일 지경이었다.
“백작 각하.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 헉!”
기사단장을 등 뒤에서 찌른 건 부기사단장이었다.
기사단장이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입만을 크게 벌리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려고 했다.
변경백은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채 그런 기사단장을 꼭 붙든 채 놔주지 않았다.
잠시 후 기사단장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변경백은 일어서 몸을 털며 중얼거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네가 황제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다만 일이 커질 것 같아 두고만 있었을 뿐.”
변경백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부기사단장이 묘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기사단장… 아니, 이건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해자에 가져다 버리도록 해라. 더러운 물 속이라면 이 녀석을 버려도 흔적이 안 남겠지.”
“명령 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기사단장.”
“제가 기사단장입니까?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부기사단장이었던 기사단장이 죽은 자를 업고 사라졌다.
그에게 어울 리는 무덤을 준비하기 위해서.
변경백이 힐긋 김검천이 들어간 별채를 쳐다보았다.
“역시 저 김검천이라는 자가 이겼군. 하긴 황제를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