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다음날.
느긋하게 일어난 김검천 일행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향했다.
어젯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샤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푹 자고 일어났다.
샤칸은 주변이 시끄러웠기에 안내하던 시종에게 물었다.
“어이, 인간. 뭣 때문에 이 난리냐?”
“자세한 건 모르지만 기사단 쪽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더군요.”
“그래? 인간들은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소란을 피우는 경향이 있지.”
샤칸의 말에 시종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굳이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제국에서는 노예 취급받는 드워프라고 해도 변경백의 손님으로 들어온 자였으니까.
변경백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김검천의 동행이었으니 뭐라고 하기가 무섭기도 했고.
길거리의 고블린이라도 귀족이 키우는 괴물이라면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시종이 노크를 해 도착한 걸 알렸다.
“백작 각하.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알았다. 너희들은 어제처럼 부르기 전까지는 떨어져 있도록 해라.”
문을 연 후 시종이 물러서자 변경백이 김검천 일행에게 양팔을 벌리며 환영해 보였다.
“어젯밤 잠은 잘 잤는가?”
“잠이야 잘 왔지. 달밤에 운동해서인지 준비되어 있던 마실 것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것 참 운치 있는 소리군.”
“운치가 아니라 해명이 필요한 소리겠지.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고는 안 하겠지? 네 기사단장의 일이라든가.”
말을 돌리는 듯해서 김검천이 핵심을 찌르자 변경백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는 게 높으신 분들의 대화법이었다.
“아, 기사단장이라면 어제 일 저지른 것 때문에 찾아왔었지. 잘못한 게 부끄러워서 자리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더군.”
샤칸을 제외한 쿠퍼와 루시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눈치 없는 샤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뭐길래 그래? 집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들 표정이 이상해졌네.”
“샤칸. 당신은 밥 먹을 시간 정도만 숨을 참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거? 언젠가 한 번 해보도록 하지. 재밌을 거 같네.”
샤칸이 즐거운 표정을 짓는 걸 본 루시엘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드워프의 둔감함에 살짝 머리가 아파진 모양이었다.
변경백이 그런 샤칸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쪽 동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잘 잔 모양이로군.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할 필요가 있을까? 거듭 말하지만 이 몸은 죄가 없다네.”
변경백이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양손을 펴서 들어 보였다.
거짓말을 하려고 드는 건 아닐 것이었다.
그랬다면 어이없는 표정의 루시엘이 바로 거짓말이라고 반박했을 테니까.
김검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게 아쉽네.”
“물증이 있었다면 네가 무슨 짓을 할지 안 봐도 알 것 같군. 그것보다 무술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주고 싶은데.
“뭐,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쯤 넘어가 주기로 어디 한번 제대로 들어보도록 할까나?”
김검천이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자신이 변경백보다 우위에 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변경백은 그런 김검천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지만 별수 있을 리 없었다.
변경백은 속이 타는지 옆에 있던 포도주 한 잔을 마신 후 기운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어제 간단히 말하긴 했지만 무술 대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데스 게임을 좋게 포장한 거다.”
“어차피 각오한 바야. 그래서?”
“계속 이겨나가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황제를 만나게 되겠지. 그는 강한 자를 좋아하거든. 직접 치하하러 모습을 드러낼 때를 노려 죽이면 될 거다.”
“그 판단은 알아서 하지. 그보다 우승자가 되어야 그제야 황제를 볼 수 있는 건가?”
“그건 황제의 기분에 따른 문제니 확실하지 않아. 참고로 올해는 무술 대회가 열리는 시기가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군.”
“그래도 너는 황제가 참가자들을 만나줄 거라고 확신했지 않나?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변경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김검천과 이야기하다 보면 속에 있는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기분이었으니까.
“수도에 있는 정보통에 의해 들었을 뿐이야. 300주년을 맞아 자기 생일이니 뭔가 특별한 일을 벌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외부로 알려지기에는 그냥 황제의 탄신기념일이지만.”
김검천은 그 말에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드워프같은 이종족들을 모아 혈석을 만들려는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다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가봐야 안다는 거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우승해야 하고.”
“그래서 너희들을 끌어들인 거야. 원래는 방법이 없다면 기사단장이라도 내보내려고 했었지.”
“기사단장도 실력만큼은 제법이었지. 그 정도 실력이면 우승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가.”
“확신은 없었지. 다만 운이 좋다면 황제를 사람들 앞에 끌어낼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김검천은 오러를 뿜어내던 기사단장의 실력을 기준으로 무술 대회의 수준을 판단해 보았다.
무술 대회에서 안전하게 결승에 오를 정도면 테이룬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마스터 나이트라도 하위권의 실력자는 우승을 못 하는 무술 대회인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술 대회에 나가는 자들은 미끼 역할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지만.”
“그럴 리가. 너는 다른 자와 달라. 이 몸이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변경백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아직 변경백은 눈치를 못 챈 모양이었다.
어제 일로 확신이 선 건 변경백뿐만이 아니라 김검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어차피 서로 이용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만약 자신들이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그 뒤에 어떻게 할 거라는 건 언급도 없었다.
김검천 일행에게 가장 중요한 건 황제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그 후의 일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김검천은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질문을 한다고 해도 변경백은 슬쩍 넘어가려고 할 테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서로 필요한 걸 얻으면 그만인 것이다.
“뭐, 좋아. 다들 생각한 바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일 테니까. “
“잘 생각했다. 그저 황제를 끝장낸 뒤에 얻을 보상이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김검천과 변경백은 어떻게 일이 돌아갈지 생각하며 웃어 보였다.
같이 미소를 지었지만 서로 생각하는 건 정반대였다.
“그래서 수도에 어떻게 들어가게 해줄 텐가? 그것도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것이 많아 보이던데.”
“그 부분은 이쪽이 해결해 줘야겠지. 맡겨둬.”
“방법은?”
“무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쪽의 추천으로 수도로 가는 것이지.”
“그것만으로도 엄격하다는 수도의 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건가.”
변경백이 인상을 썼다.
김검천이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본인이 변경백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이 몸의 영향력은 제법 큰 편이다. 거기에 더해 너희들은 수도에 사는 높으신 분이 다시 신원보증인이 될 것이라고.”
“네가 보증인이 아닌 건 우리와 모르는 사이라고 변명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인가.”
“눈치가 빨라 길게 말 안 해서 좋군.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너한테 바라는 것도 수도에 입성하는 것과 황제를 만나기 전까지의 안전이니까.”
“안전이라? 네가 겁이 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겁나는 것보다는 귀찮아. 그리고 가져온 마차나 짐을 검사하는 것도 막아주었으면 해.”
변경백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김검천이 그런 변경백의 고민을 덜어주기로 했다.
“제국 수도에 있는 길드에 넘겨줄 물건이 있어 짐이 많은 거야. 그중에는 네가 먹었던 그 전투식량 같은 것도 있다.”
변경백의 표정이 펴졌다.
“그런 물건이었나. 하긴 여행하는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묻던 자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표정을 보니 전투식량을 좀 더 먹고 싶은 것 같은데.”
“그 맛을 잊을 수 없더군. 혹시 가기 전에 몇 개 더 넘겨주고 갈 수 있겠나? 그러면 어떻게든 짐 검사를 대충 넘길 수 있도록 힘써보도록 하지.”“
변경백은 미식가로 살아온 인생의 절반을 후회하는 듯이 말했다.
전투식량이 그렇게나 맛있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더 맛있는 걸 먹이면 어떻게 할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 후로 변경백과 약간 더 이야기를 나누고 마무리를 지은 김검천 일행은 회의실을 나섰다.
약간 더 영지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수도의 일이 진행되고 난 후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시간이 나는 동안 변경백이 약속을 지키는지 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확실히 목에 노예의 증표를 달고 다니는 자들의 기색은 전보다 나아 보였다.
특히 드워프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샤칸의 표정도 그랬고.
“샤칸. 기분이 나아진 모양인데.”
“음. 동족들을 아주 구해낸 건 아니지만 드워프들이 전과 달리 희망찬 것 같아 좋군.”
“황제를 처리하고 나면 상황은 더 나아지겠지.”
며칠 후 일이 마무리되자 영지를 떠나는 김검천에게 변경백이 증표 하나를 넘겨주었다.
그건 긴급 연락을 위해 보내는 전령들이나 쓰는 마법이 걸린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차별되는 점에 있어서인지 변경백이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신분증 대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외 잡다한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이 몸을 대신하는 증표로도 쓰는 것이거든.”
“돈 외에 필요한 게 있다면 이걸 쓰라는 거군. 그러니까 신분증에 신용카드가 달린 셈인가.”
“신용카드?”
“네가 알만한 게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일단 준 거니까 잘 사용하도록 하지.”
“마음대로 써라. 대신 그 일만 제대로 처리해주면 되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손을 대기 시작하면 누군가 끝장이 나야 하는 일이니까.”
변경백이 김검천에게 아무도 못 듣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지. 수도에서 너희를 도와줄 자는 황제 암살에 대한 건 모른다. 그러니 발설하지 않은 게 좋아.”
“그 말은?”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수도까지는 기사 한 명을 동행시켜 주도록 하지. 며칠 거리는 안 되지만 길을 헤매지 말라는 배려다. 거기, 너.”
갑자기 길잡이가 돼버린 하급 기사 한 명이 자신을 가리켰다.
이제 기사단장이 된 전 부기사단장의 명령에 이 자리에 모인 기사들 중 그가 당첨된 것이다.
“예? 기사인 제가 마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꼬우면 네가 백작하든가.”
변경백이 턱을 치켜들며 명령했다.
지적당한 기사는 생전 해보지도 못한 마부 역할을 하려니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렇게 수도로 떠나는 일행이 결정되었다.
해자에 설치된 다리 위를 걸어가는데 김검천이 지나가는 소리로 변경백에게 물었다.
“드나들며 생각한 거지만 이곳 해자의 냄새는 정말 지독하군.”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해자의 용도는 방어에 있지 관상용이 아니니까.”
“저 해자의 수면 밑에 생명체들이 꽤 많이 죽어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다. 며칠 전과 또 다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착각한 게 아닐까? 여기 냄새는 워낙 지독하거든.”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시골에 내려갔다던 기사단장이 지금 옆에 있다면 한 번쯤 냄새가 어떤지 물어보고 싶군.”
“굳이 물을 필요도 없겠지. 기사단장은 지금쯤 코를 찌르던 고약한 냄새에서 해방되어서 홀가분한 기분일걸세.”
“그럴지도 모르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갔다니 지금쯤 흙이라도 만지고 있을 테니까.”
김검천과 변경백은 서로 웃어 보였다.
배웅하러 나온 주변 사람들 중 한 명이 팔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왜 이리 피부에 소름이 돋지? 날씨가 예전보다 추워져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