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선으로 귀환해서 이세계 최강-132화 (132/250)

132화

그 질문에 정확히 대답해줄 수 있는 전 기사단장이 이 자리에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몸이 돼버린 것이다.

김검천은 출발하기 전 마차와 마차가 끄는 짐 꾸러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쿠퍼가 김검천에게 물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이대로는 늦을 테니 빨리 수도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김검천 일행은 수도로 떠났다.

길잡이 노릇을 할 기사는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편한 마부석에 앉은 채로.

***

감격한 표정을 지은 황태자가 황제를 향해 공손히 말을 건넸다.

“제가 요청한 대로 무술 대회를 개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는 그런 말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항상 하던 것처럼 손에 마석을 들고 만지작거리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네 의견을 들은 게 아니라 300주년을 맞아 짐도 뭔가 특별한 걸 하고 싶었을 뿐이다.”

“황제 폐하의 뜻이 제 의견과 일치했다는 것 자체가 황송할 뿐입니다.”

“흐음, 너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인 만큼 짐과 통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가끔은 피가…아니, 핏줄이 끌리기도 하니까. 그런데 황태자여, 요즘은 어떠한가?”

황태자가 몸을 움찔했다.

하도 많이 들어서 무슨 질문인지 알았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회피성 발언이었다.

“어떤 걸 말씀인지요?”

“마석에 에너지를 주입하는 일 말이다. 짐이 할 수 있으니 혈족인 너도 가능해야 할 텐데.”

“…송구스럽지만 여전히 별다른 차도는 없습니다.”

“그런 건가. 너도 이제까지의 다른 황실의 자손들과 별 차이 없다는 말이구나.”

황제는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다루기 힘든 물건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괜찮다고 한 것과는 다르게 눈빛은 차갑기 짝이 없었고.

그건 보는 사람도, 시선을 받는 사람도 잘 아는 듯했다.

황태자는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황제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입술을 꼭 깨물면서.

“허락하신다면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짐도 다른 약속이 있기에 너에게 더 시간을 내줄 수 없도다.”

황태자가 물러나자 검은 안개가 뭉치는가 싶더니 치료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치료사가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피가 이어진 혈족 간의 오붓한 시간을 제가 방해했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폐하.”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라 말하라.”

“하하, 금방 눈치채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존재시니까요.”

“비슷하다니 불쾌하군. 네 뒤의 초월교를 믿고 그렇게 나대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다.”

“저 같은 미천한 자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기분을 거스르면 안 되겠지요.”

“짐에 대해 논하지 말고 네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나 이야기하도록.”

“아, 그것 말입니까. 황제 폐하의 분부대로 제국민들에게 식량을 무상 배급하는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황제가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툭툭 쳤다.

“듣자 하니 초월교뿐만 아니라 마탑에서도 그 일에 열정적으로 나섰다고 하더군. 너희는 몰라도 마탑의 마법사들과는 관계없는 일일 텐데. 무엇 때문이지?”

“그저 황제 폐하의 일이니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실소했다.

“풋, 제국의 마법사도 아니고 마탑 소속의 마법사가 짐의 말을 들어? 지나가던 고블린도 웃겠군.”

“제법 세상을 살아갈 줄 아는 고블린인가 봅니다. 황제 폐하의 말에 웃을 줄도 알고요.”

황제가 고개를 모로 꼬며 치료사를 쳐다보았다.

원래 이러긴 했지만 오늘따라 무례가 지나쳤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치료사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긴 짐이 너한테 바라는 건 예의 같은 게 아니지. 무료 배식의 진행 상황은?”

“중요 지점이라면 멀리 떨어진 변경백의 영지에도 배급을 했습니다. 다만 양이 한정되어 있기에 가능한 제국 수도를 중심으로 배포했습니다. “

“사람이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했다는 건가. 역시 제국 전역은 무리였나 보군.”

“시간이 부족했으니까요. 그래도 황제 폐하의 탄신기념일을 위한 계획에 사용될 사람 수 정도는 될 겁니다.”

“아무래도 300주년을 맞이했으니 커다랗게 연회를 벌이는 게 좋겠지. 왕국의 일이 성공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군.”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왕국의 일 같은 건 언제든지 다시 해도 된다. 다만 제국 내에서의 일마저 실패하면 짐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고 있었으면 한다.”

치료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나 엘프 같은 이종족 아인들을 잡는 일은 잘 되어 가시는지요?”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역시 치료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치료사 역시 황제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다지만 황제 개인적으로 시킨 일마저 알다니.

“그건 왜 묻지?”

“제가 왕국의 일을 실패한 것처럼 생각하지도 못하게 황제 폐하의 뜻이 어긋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치료사가 이제와서 굳이 그 이야기를 언급하다니.

자신도 그 김검천이라는 자와 엮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황제는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그건 짐이 알아서 할 일이야. 할 말이 끝났으면 사라져라.”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러시다면야. 아차, 이번에는 받아갈 게 있습니다만.”

“이것 말이겠지. 이게 아니면 네가 짐에게 찾아올 리도 없을 테고.”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상급 마석을 치료사에게 던져주었다.

마석을 충전할 수 있는 황제가 아니면 이런 시기에 상급 마석을 어디 가서 얻겠는가.

치료사가 상급 마석을 받아 이리저리 확인해 보더니 실망스러운 듯 물었다.

“상급 마석이라는데 에너지양이 이정도밖에 안 되는지요?”

“짐이 항상 마석을 손에 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라도 받아가는 것에 만족해라.”

“하지만 저희와 계약할 때는…”

“짐 앞에서 계약 운운하는 것이냐?”

황제가 불쾌하다는 듯 말하자 장식처럼 서 있던 검은 갑옷 기사가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치료사가 급히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오해라는 걸 알렸다.

“그런 뜻이 아니니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하찮은 자의 말실수였습니다.”

황제도 자세를 낮추는 치료사의 행동에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

“모자라는 건 나중에 더 넘겨줄 테니 이번에는 그걸로 만족해라.”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 하지요. 그러면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료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황제가 말했다.

“치료사. 전에도 말했지만 그날이 오면 가능한 한 즐겨주었으면 하는군.”

“모든 건 초월 존재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치료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치료사 놈. 초월 존재에게 자기 대답을 떠맡긴 채로 도망쳤군.“

치료사가 사라지고 나서 알현의 방에 들어온 자는 제국 삼현자 중 워스덤이었다.

워스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인사를 마치자마자 용건을 꺼내 들었다.

“황제 폐하. 수도에서 약간 떨어진 산에 설치된 그 건물은 도대체?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해도 되는 겁니까?”

워스덤은 떨리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로서 지식을 탐구를 위해 워스덤도 보통 인간보다는 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그도 황제의 명으로 건축된 그것에 대해 약간 들은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제국을 떠나있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블러드 타워.

워스덤이 알고자 하는 탑의 이름이었다.

황제가 진행하고자 하는 계획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고.

황제는 이를 드러냈다.

“네가 지금 알게 된 것뿐이다. 네가 떠나기 전부터 비밀리에 만들어지던 것이니까. 이제야 네 연구 성과와 더불어 슬슬 결과가 나오는 중이고.”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그만.”

워스덤의 말을 황제가 끊었다.

이어 황제가 워스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짐이 있어야 제국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야. 제국을 위해 짐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나마 너 정도 되니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워스덤은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한번 황제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통할 리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워스덤은 별다른 성과 없이 알현의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야 할지도. 혹시 황태자라면?”

워스덤이 떠나자 황제는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매끈한 손가락에는 눈에 보일 듯 말듯한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던 시간이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육체의 노화를 확인한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 분이 말한 300주년 아니든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제국의 모든 것은 짐의 소유다. 그러니 그들은 짐에게 어떤 식으로 다뤄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야.”

***

가는 길은 마부석에서, 자는 건 모포 하나 덮고 자야 했기에 고생할 수밖에 없던 기사였다.

그래서인지 기사는 영지를 벗어나자마자 쉴 새 없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성이 아니라 근처 마을로 파견 나가서 세금이나 거두며 사는 건데. 신입이면 다냐?”

큰 소리로 떠드는 걸 보면 불만이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큰 소리를 내지 않은 한 무슨 이야기를 해도 기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거 같았다.

김검천은 기사의 볼멘소리를 배경음 삼아 편하게 입을 열었다.

“출발하기 전에 듣자 하니 영지에서 수도로 가는데 며칠이면 된다고 해.”

쿠퍼가 김검천에게 질문했다.

“제국의 관도를 따라가기만 해도 수도로 가는데 굳이 길잡이가 필요할까요? 그냥 돌려보내시지요.”

“쿠퍼의 말이 맞긴 해. 그런데 근래 괴물들이 습격해 관도에 연결된 길과 다리를 부수기도 해서 쉽게는 못 찾아간다고 하더군. 우리는 기간 내에 제국 수도에 도착해야 하고.”

“아, 그래서 저 기사가 동행한 거군요. 그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좀 불편하더라도 며칠만 참자고. 영지에서 있으면서 체력은 모두 회복했을 테지?”

쿠퍼가 먼저 말했다.

“누가 눈앞에 나타나도 바로 박살 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루시엘이 대답했다.

“몸 상태는 최고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군요.”

샤칸이 입을 열었다.

“몸이 쑤셔서 오히려 힘든 지경이라고!”

김검천이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힘이 넘쳐 눈빛이 살아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야.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이 쉬어두도록.”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회에 출전할 김검천 말고 자신들도 움직일 필요가 있다는 듯한 말투 아닌가.

“저희도 힘쓸 일이 있을까요?”

“변경백이 세운 계획 말고도 따로 움직일 필요가 있거든. 완전히 그의 계획에 꼭두각시처럼 따라줄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렇군요. 우리가 수도에서 죽으면 변경백이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변경백에게 있어 가장 좋은 건 우리가 황제를 죽이고 분노한 호위들에 의해 죽거나 쫓기는 거겠지. 변경백은 황제가 없는 혼란을 이용해 비어있는 권력을 거머쥐려고 들 테고.”

“그래서 저희들이 따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는 거군요.”

루시엘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노예용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김검천은 아직 샤칸과 루시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떼지 않은 것이다.

제국에서의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기에 놔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둘 다 목걸이를 제거해달라는 말을 안 한 것이다.

김검천도 목걸이가 있다고 해서 딱히 샤칸과 루시엘을 어떻게 할 마음도 없었고.

“샤칸과 루시엘에게는 다른 방면에서 활약을 부탁하는 셈이지.”

“김검천님.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마차 안에서 대놓고 해도 되는 겁니까?”

쿠퍼가 밖에 있는 기사를 의식했는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