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털푸덕.
김검천의 손에 잡힌 마법사는 하늘을 나는 대신 지면에 처박혔다.
김검천은 마법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쿠퍼에게 제압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크게 소리를 쳤더니 목이 아팠던 것이다.
김검천이 몇 번 콜록거린 후에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직접 소리치는 건 자제해야겠는데. 자주 소리치면 목소리가 듣기 싫어질 테니까.
[음파 무기 쪽을 좀 더 손을 봐야겠습니다.]
쿠퍼는 마법사의 두 손을 꺾어 움직임을 막고 입은 언제든 후려칠 준비를 마쳤다.
이게 마법 주문과 손으로 수인을 맺는 마법사를 대하는 적절한 대응법인 것이다.
떨어져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인지 연신 기침을 하던 마법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놈은 도대체 본인과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듣고 있던 쿠퍼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마법사를 후려쳤다.
꼼짝도 못 하는 상대에게 무력을 쓰는 건 심한 일이긴 했다.
마법사가 한 짓에 비하자면 가벼운 응징에 불과했지만.
“이게 미쳤나? 마을 사람들을 모두 뮤턴트라는 괴물로 만든 데다가 우리를 그런 괴물로 만들지 못하니 죽이려고 든 녀석이 이러다니. 진짜 끝내주는 태도네.”
“저건 인류의 지적 탐구와 종으로서 발전을 위하다가 일어난 사소한 희생에 불과하다! 억!”
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쿠퍼가 뼈가 부러져도 좋다는 느낌으로 팔을 비틀어서였다.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은. 인류의 사소한 희생 좋아하시네. 손만 자유로웠으면 넌 망치로 머리가 깨졌을 거야.”
“이 야만인 같은 놈이!”
“호오, 정말 야만적인 게 뭔지 몸으로 겪어 보고 싶은가 보네.”
야만인이라면 제국 국경 너머에 있는 소수 부족.
개중에는 노예 사냥꾼이나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한때 잘나가던 제국 기사로 활약하던 쿠퍼였다.
마법사가 무슨 의도로 야만인이라고 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고문이라는 단어와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접하지도 않은 몸은 아니었다.
쿠퍼가 손가락을 푸는 모습을 보던 김검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쿠퍼.”
“하지만 김검천님. 이런 녀석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답은 그랬지만 쿠퍼가 김검천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압당한 힘이 약해지는 걸 느낀 마법사가 그런 쿠퍼를 향해 비웃었다.
“보았냐? 네 주군인지 상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를 대하는 태도를 말이다! 너 같은 녀석과는 차원이 다르군.”
김검천이 마법사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쿠퍼에게 딱 잘라 말했다.
“화내는 것도 가치 있는 자에게나 하는 거지. 이런 자 때문에 네가 괜히 감정을 소모할만한 필요가 있을까?”
“과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김검천의 행동에 얼어붙은 마법사였다.
그를 쿠퍼가 보면서 놀리는 투로 말했다.
“확실히 이 몸과는 차원이 다르시지. 너 같은 건 신경도 쓸 가치도 없다는 분이시니까.”
“이럴 리가. 이 몸은 마법사야. 너희들 같은 머리에 든 것도 없는 것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마법사는 아직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해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사는 대부분이 이런 자들일까.
“대화 전에 먼저 처리할 것이 있군. 저 뮤턴트들의 움직임을 멈춰주었으면 하는데.”
“흥, 죽는 게 겁나느냐? 이 몸이 그런 부탁을 들어줄 것 같냐고!”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는 거지. 내가 저들을 처리 못 해서 너에게 이러는 줄 아는가?”
김검천의 어조는 낮고 내용은 간단했지만 무게가 있었다.
마법사는 이상하게도 김검천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리는 생존 본능의 경고에 마법사는 따르기로 했다.
“저들을 통제하려면 마석을 사용해야 하니 잠시 손을 쓰게 해주겠나?”
“네가 굳이 손을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샤칸이 품속에서 하급 마석을 꺼내 마법사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마나를 발현했다.
“뮤턴트는 모두 새로운 명령이 있기까지 대기해라!”
다가오던 뮤턴트가 움직이던 자세로 정지했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보면 같은 마법사라고 해도 워스덤과는 다르군. 아니면 이게 마법사들의 일반적인 모습인가.”
마법사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워스덤의 이름이 귀에 거슬렸으니까.
“퉷, 워스덤같이 제국에 붙어 아부나 하는 마법사를 우리 같은 마법사와 비교하지 마라.”
“비교하고 깊은 마음도 안 든다. 그런데 같은 마법사인데도 다르다는 건가.”
“국가에 속한 자와 마탑 연합에 속해 있는 건 달라. 어느 쪽도 아닌 마법사도 있고.”
“그래? 그 마탑 연합이라는 건 제대로 된 단체는 아닌 것 같군.”
“고작해야 수준이 높지 않은 마법사 하나를 제압한 것 가지고 큰 소리는. 마탑의 탑주분들이 나선다면 너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야.”
루시엘이 옆에서 말했다.
“저자의 말이 맞습니다. 지켜보니 마법 주문을 한 번에 하나밖에 영창하지 못하더군요.”
“수준이 높으면 마법 주문을 몇 개나 쓴다는 건가. 공중을 떠오른 후 네 공격을 막았는데도?”
“그건 가지고 있던 마법 도구로 막은 겁니다. 마법 주문 자체는 비행 주문밖에 못 썼지요.”
하긴 주문을 외우지 않았는데도 김검천의 암건을 막아낸 마법사였다.
이런저런 마법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력 없다는 대화 내용을 들은 마법사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사람들은 아무 신경 쓰지 않았지만.
김검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볼 시간이로군. 넌 제대로 힘도 못 쓰고 잡힌 게 억울하겠지.”
“무슨 작정으로 그럴 소리를 하는 거냐.”
“널 풀어 줄 테니 아는 바를 솔직히 다 털어놓으라는 거지. 우리 측에 엘프가 있는 건 보았으니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고.”
살아날 길이 있다니.
마법사의 죽어버린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말할 수 있는 거라면 해주지.”
“좋아. 마을 사람들을 원래 대로 돌리는 방법을 말해봐.”
“말했지 않았나? 그런 건 몰라. 거기다 저놈들은 아침 해가 떠오르면 죽어.”
“죽는다고?”
“실험체가 사람들 눈에 띄면 좋을 일이 없으니까 시간제한을 걸어 둔 거지.”
루시엘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있으면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다.
김검천이 뮤턴트로 변해버린 그들에게 뭔가 해줄 만한 건 없었다.
김검천이 가진 나노머신의 힘이라도 지금으로서는 저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현재 나노 머신은 육체 수복이 주기능이지 육체 변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신 저들을 그렇게 만든 마법 재료의 정체에 대해서라도 묻기로 했다.
그런 게 제국에 돌아다닌다면 정보라도 있어야 자신들이라도 방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정보들이 있다면 언젠가 저들을 대신해 복수라도 해줄 수 있을 테고.
“음식에 들어간 그 마법 가루는 너희들이 발명해낸 건가?”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윗선에서 주는 걸 받아오는 거라 잘 모른다. 다만 지나가는 이야기로 제국 황실과 관련 있다는 건 어디선가 들은 적 있긴 하군.”
“이 일의 배후에 황제가 있다는 건가. 가루의 공급처가 이 근처인 것 같기도 하고.”
“뭐, 황제가 이런 일을 모를 것 같지는 않군. 이곳의 뮤턴트들은 어디까지나 실험에 쓰이는 제물 같은 것이기도 하고.”
“제물이라면?”
“그 가루가 음식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짐작하고 있을 테지?”
“식량 사정이 풍족한 환경이라도 가난한 사람은 항상 있어왔다. 그런 자들은 음식에 뭐가 들어있을지 몰라도 일단 살기 위해서라도 먹어야 할 테고.”
“네 말대로 무료 음식을 찾아 먹을 정도라면 언제 사라져도 찾을 사람도, 찾을 힘도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거든.”
“하지만 사람들을 뮤턴트로 만들만한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그 말에 마법사의 몸이 들썩거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뭐가 그리 웃기지?”
“크크. 그거야 원래 이 마법 가루는 사람들이 최면이나 강압적인 명령에 더 잘 따르거나 반응하게 해주는 미약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벌어진 결과는 어떻지?”
“뮤턴트가 생겨나게 되었지. 너희들은 인체 실험을 하는 거였어.”
“정답! 제국의 힘까지 얻어 마법사가 이런 대규모 인체 실험을 할 기회는 찾기 힘들거든.”
한번 터져 나온 마법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비밀을 털어놓은 몸이니 속이라도 시원하게 끝까지 털어놓을 모양이었다.
“원래 따로 우리 쪽에서 실험하던 게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그 가루를 개량했지. 약간만 섭취하면 원래 가루를 먹은 효과만 나지만 계속 먹다 중독되면 저렇게 뮤턴트가 되는 거지.”
김검천의 목소리가 차츰 낮아져 갔다.
자신의 발언에 사로잡힌 마법사는 별생각 없이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시작은 제국이 했지만 저렇게 만든 건 마법사들이라는 건가.”
“먹은 놈이 잘못이지. 그런 수상쩍은 가루가 들은 음식을 왜 먹냐고.”
“그거야 알고 먹은 게 아니라서 그런 거다. 저 뮤턴트들이 안 보이는 건가?”
“저거야말로 위대한 마법이 낳은 결과물이지. 인간보다 강하고 복종심이 강하잖아. 사소한 부작용이 있다면 저것들은 죽기 전까지 고통에 시달리는 정도라고.”
그때 뮤턴트들 중 하나가 신음 소리를 흘렸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내용은 단 한마디의 반복이었다.
“주… 죽여줘.”
그것이 뮤턴트로 변한 마을 사람의 소원이었다.
다른 뮤턴트들도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아마 아직 인간의 이성이 남아있을 때 죽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벼운 통증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만큼이나 심한 고통을 받는 중인 것 같기도 하고.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사에게 말했다.
“너와 작별하기 전에 하나만 더 묻지. 수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가루가 들은 음식을 배급한 건가?”
“그걸 굳이 물을 필요가 있을까? 사람이 적은 이곳이라 음식 공급이 더 자주 이루어져 저들이 더 빠르게 뮤턴트화 되기는 했지만.”
“네 대답은 잘 들었다.”
김검천은 마법사의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마법사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잠깐! 지금 무슨 짓이냐?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약속대로 널 놔주려고 하는 거야.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잠깐만! 마법사를 죽이면 넌 마법사의 적이 될 수도 있어! 두렵지 않은가!”
“내가 죽이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지? 아, 생각해보니 무섭긴 하군.”
“그러면 당장 날 놔줘라!”
“내가 공격해 오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다 죽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러면 작별이다.”
김검천이 마법사를 집어 던졌다.
마법사는 뮤턴트가 모여있던 중앙 부근에 얼굴부터 떨어져 버렸다.
충격을 받아 코피를 흘리는 마법사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마법사의 피 냄새에 흥분한 탓일까.
김검천의 등 뒤에 있던 뮤턴트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최후의 발악인 건가?”
“오냐. 덤벼라!”
쿠퍼와 샤칸이 서둘러 망치를 들고 뮤턴트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려고 했다.
김검천이 말렸다.
“그냥 놔둬. 마차에나 타라.”
“그렇지만 괴물들이 저렇게 밀려오지 않습니까? 어라?”
뮤턴트들은 김검천의 주위에 결계라도 생긴듯이 마차 주변을 비켜나갔다.
뭔가에 떠밀리듯이 돌진 중인 그들의 목표는 마법사인 것이다.
모여있던 모든 뮤턴트들이 땅에 처박힌 마법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얼마 전 제국 기사를 물어뜯은 검붉은 입을 활짝 벌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