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김검천과 리에를 제외한 일행들은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제국의 황태자라니.
황제의 후계자라는 말 아닌가.
혹시 함정이 아닌가 싶었기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나마 김검천이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다들 마음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혹시 필요하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그러면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황태자와 초대받은 자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집사가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났다.
눈치가 빠른 집사라도 김검천 일행의 태도에 대해서는 눈치 못 챈듯 싶었다.
뭔가 알아챘다 해도 황태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긴장한다는 느낌 정도를 받았을 것이다.
눈앞의 황태자는 중년인데도 불구하고 잘 단련된 근육질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신체는 높으신 분인데도 절제할 줄 알며 노력 중인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증표였다.
황태자의 눈에는 김검천 일행에 대해 느끼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김검천을 비롯한 일행들을 향해 황태자가 위엄있는 말투로 말을 건네었다.
“무례하구나. 본인이 누구인지 들었는데도 여전히 고개가 뻣뻣하다니.”
명령받는 게 몸에 익숙한 탓인지 쿠퍼와 세이야는 바로 허리를 굽혔다.
이종족인 샤칸과 루시엘도 어느 정도 인간의 예의를 지킬 줄은 알기에 고개를 숙였다.
아직 계급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는 리에는 그저 웃으며 방안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검천은 오히려 황태자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기껏 불러온 이유가 손님들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건가? 황태자라고 해서 세상일이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불경하기까지 한 김검천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심지어 황태자마저도.
김검천도 처음에는 상대가 황태자라는 말에 적어도 그에 맞는 예의는 갖추어 주려고 했다.
황태자가 강압적으로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을 억누르려고 하자 바로 생각이 바뀌었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상황이 어이가 없기도 했다.
변경백은 수도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그 이유는 수도에서 그를 만나면 알 거라고도 했고.
김검천은 계획에 대해 비밀을 부탁한 변경백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혈족인 황제를 죽일지도 모르는 자들을 직접 부른 황태자라니.
만약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일을 주도한 변경백보다도 계획을 시도할 자와 같이 하는 황태자가 더 의심을 받을 것이다.
황제에 대한 증오를 숨긴 변경백은 어떤 달콤한 말로 황태자를 꾀었을까.
황제가 죽는다면 일어날 상황 같은 뒷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변경백이 말했다.
아무래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꽤 음험한 계획이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변경백을 완전히 신용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황태자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모를 리가 없지. 내가 지닌 자유를 행사하고 있는 중이야.”
김검천의 당당한 모습이 황태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에 대한 무시로 보인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제국의 황태자 앞에서 꼿꼿이 고개를 들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놀란 감정은 곧이어 분노로 변했는지 황태자의 눈살이 찌푸려지며 목소리가 올라갔다.
“본인이 황태자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황족 모욕죄가 어떤 건지 알고 싶은가?”
“그거 아나?”
“무엇을?”
“내가 인정하지 않은 자에게는 숙이지 않는다는 것. 난 네 노예가 아니거든.”
김검천은 국왕으로부터 책임은 없고 권한은 보장된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 나라의 국왕과 비교할 수 있는 대공이라는 작위를.
김검천은 제국의 황태자와 비교한다고 해도 밀리는 부분이 없었다.
그게 신분이든 무력이든지 간에.
물론 눈앞의 황태자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황태자가 볼 때 김검천은 제국과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무례한 자일 뿐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루시엘이 김검천과 황태자의 사이에 끼어 둘을 중재하려고 들었다.
“두 분 다 고정하시지요. 다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태자의 옷깃에 두 사람을 만류하려던 루시엘의 손가락이 살짝 스쳤다.
황태자는 안 그래도 불쾌한 마당이었기에 평소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천한 이종족 따위가 어딜 함부로 황족의 몸을 만지는 것이냐?”
- 철썩.
황태자가 더러운 것이 만지기라도 하듯이 루시엘의 손을 쳐냈다.
거기에 더해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 손으로 뺨을 날리려고 들었다.
황태자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김검천에 대한 분노.
그리고 하찮게 생각하고 있던 이종족에 대한 짜증이 실린 행동이었다.
드워프인 샤칸이라면 공격을 받는다면 가만있지 않겠지만 루시엘은 엘프였다.
가능하면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해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종족인 것이다.
루시엘이 보기에 만약 황태자의 공격을 막기라도 한다면 일은 더 크게 번질 걸로 보였다.
김검천에게도 저리 행동하는데 이종족이자 엘프인 상대라면 어떻게 보겠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몇 대 맞아 주는 게 상황이 진정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루시엘은 황태자의 손이 자신의 뺨을 향해 날아오는 걸 보며 눈을 감았다.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눈을 감고 맞으면 덜 아프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뺨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눈을 떠보니 김검천이 황태자의 팔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도 나름대로 강한 축에 속했다.
마나라는 것은 이세계 지배계층의 기본이 되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평범한 기사보다는 많은 마나를 얻기 위해 노력한 황태자였다.
황족으로 태어나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단련된 육체.
그런 그가 마나로 신체를 강화해 김검천으로부터 팔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파워드슈츠를 장착한 김검천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황태자가 일반 기사보다 강하다고 해도 마스터 나이트보다는 약했다.
김검천은 마스터 나이트보다도 더 강했고.
“네 놈이 감히!”
높으신 분들은 그놈의 감히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황태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놈의 감히는 참 좋아하는군. 너야말로 누구 앞에서 내 일행에게 손을 쓰는 거지?”
“이 몸은 제국의 황태자다! 황태자가 엘프 따위를 때리는 게 뭐가 잘못이라는 거냐?”
“다른 엘프도 아니고 내 엘프에게 그러면 안 되지. 애초에 함부로 손을 쓰는 게 잘못이지만.”
“너 같은 자에게 엘프 따위의 처우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
“엘프는 네가 초대한 손님 아닌가? 그런데 함부로 손을 쓰다니. 가정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일까.”
“익! 네가 제국 황실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가!”
황태자의 얼굴은 이제 술에 취한 것마냥 붉게 달아올랐다.
황제에 의해 억눌림을 당해온 황태자로서는 황실에 대한 이야기는 분개할만한 이야기였다.
밖으로 서로 다투는 소리가 퍼졌는지 문 너머로 누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가 직접 손님으로 데려오라고 한 일행이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집사까지 나갔다.
하지만 방 안에서 들려오는 황태자의 외침에 더 방관할 수 없는 듯한 모양이었다.
김검천을 제외한 일행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변경백의 제안에 따라 조용히 계획을 진행하려고 온 건데 벌써부터 일이 꼬인 걸로 보였다.
그때였다.
어찌할 줄 모른 채 당황하는 사람들의 뒤에서부터 리에가 아장거리며 걸어 나왔다.
“안 돼요. 나빠요. 싸우면 리에가 때찌할 거예요.”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두 어른들을 아이같이 다루는 듯한 리에의 행동이었다.
그런 리에를 보자 김검천은 피식 웃으며 황태자의 팔을 놓았다.
“하긴 아이 앞에서 다투는 건 어른으로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겠지.”
“누구 마음대로 그만두겠다는 거냐!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아이의 입장에서는 고함을 지르는 커다란 사람인 황태자가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도 리에는 쭈뼛거리면서 황태자에게 다가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소리치면 무서워요…. 하지 말아요….”
“이잇….!”
옷깃을 잡은 작은 아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힘과 겁먹은 표정과 목소리.
황태자는 루시엘이 옷깃을 잡았을 때와는 달리 묘하게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아이 한 명이 울먹거리는 모습에 황태자의 분노가 점차 가라앉다니.
상대가 아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황태자는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했으니까.
물론 구분 없이 차별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리에를 대하는 행동은 황태자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었다.
“닮았어…”
리에를 내려다보던 황태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황태자를 놔주긴 했지만 리에의 안전 때문에 주의 깊게 살피던 김검천이 물었다.
“리에와 닮은 아이를 언젠가 본 적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닐 테고.”
황태자의 말을 들은 쿠퍼의 표정이 알게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황태자가 리에에게 말했다.
“아이야. 이제 옷깃을 놓도록 해라.”
“으응, 그러면 이제 화 안 낼 거예요?”
“그렇다. 싸우지도 않을 거다.”
“참 잘했어요!”
리에가 활짝 웃으며 이번에는 쿠퍼에게 달려가 찰싹 달라붙었다.
쿠퍼가 믿음직하긴 한 모습이었다.
황태자가 쿠퍼와 리에를 번갈아 보다 물었다.
“너는?
“리에의 보호자입니다.”
“네가 이 아이의 아버지인가? 딸과 얼굴이 전혀 안 닮은 걸 보니 부인에게 감사해야겠군.”
부끄러워서일까.
쿠퍼는 자신이 리에의 아버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쿠퍼가 자기 입으로 리에의 아버지라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남들이 쿠퍼를 리에의 아버지라고 할 뿐이었자.
쿠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 아이를 낳아준 것에 대해서요.”
쿠퍼는 황태자와 대화를 하면서 평상시와는 다른 표정을 유지하며 답변했다.
황태자는 그런 쿠퍼에게는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앞에서는 긴장을 한 다른 사람들도 보통 쿠퍼와 같은 얼굴을 하고는 했으니까.
황태자는 리에에게 다시 한번 눈길을 주더니 김검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대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이를 데려오다니. 간이 크기도 하군.”
김검천이 다리 부분을 툭툭 치며 대꾸했다.
“그건 이유가 있어서다. 그리고 난 간만 큰 게 아니야. 이 자리에서는 보여 줄 수 없는 게 유감이로군.”
- 쾅!
“황태자 전하!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활짝 열리며 집사와 기사 몇 명이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가 뭐하는 짓이냐는 듯한 눈길을 보내왔으니까.
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방 안에서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려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황태자가 말없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괜한 소동을 부린 셈이 돼버린 집사가 아무 말 못 한 채 문 옆에 가서 섰다.
기사들은 아예 돌기둥처럼 부동자세를 취했다.
황태자는 김검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군.”
“죽을 때까지도 나 같은 사람은 다시 못 볼걸?”
김검천과 황태자가 다시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는데 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리에 졸려….”
“리에야, 조금만 참으렴.”
쿠퍼가 눈을 비비며 졸려 하는 리에를 다독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긴 제법 긴 여행이었으니 아이한테는 큰 피로가 쌓였을 것이었다.
황태자가 김검천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이도 있는데 어서 가서 쉬기나 하지 그러나?”
“너와 대화한다고 잡혀 있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흥, 너와 대화하면 입만 아프다. 여봐라!”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한 명이 급히 나섰다.
“예! 황태자 전하!”
“이들을 숙소까지 안내하도록 해라. 정중하고 편안하게 말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졸려 하는 리에를 품에 안고서 김검천과 일행들이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 김검천이 황태자를 보고 너라고 부르는 순간 제 자리에서 기절할 뻔한 집사였다.
문을 닫은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알고 지내신다는 귀족의 추천을 받은 자들이 저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습니다.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저택에서 쫓아내겠습니다.”
황태자가 집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검천을 보고 화가 난 건 한 편으로는 자신에게 없는 걸 갖춘 그가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누구 앞이라도 자신 있게 자기 의견을 말하며 어떤 자에게도 굽히지 않는 태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나서는 모습까지.
황태자와는 달리 김검천은 자기 능력만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어 보였다.
그렇기에 변경백의 추천을 받고 황태자 자신한테로 올 수 있었을 테고.
평생을 황제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자기 할 말도 제대로 못한 황태자와는 다른 것이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생각해보니 김검천은 황태자가 되고 싶은 사람 그 자체였다.
설마 부러움을 넘어 저 김검천이라는 자에 대해서 질투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웃어 보인 황태자는 소매를 걷어 팔을 보았다
김검천에게 잡혀 있던 팔은 퉁퉁 부어 있었다.
“마나로 강화된 신체를 잡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만들다니 확실히 실력은 있어 보이는군.”
황태자의 부어오른 팔을 보자 눈이 커다랗게 떠진 집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무례하고 흉포한 자들이 감히 황태자 전하께 손을 대다니? 당장이라도 기사들을 불러 저들에게 그에 합당한 죄를 묻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