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자신을 걱정하는 소리에도 황태자는 평소와 다른 느낌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아니라면 집사가 과연 저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방금 전 김검천처럼 황태자의 앞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나설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와는 다르게 황태자는 집사의 기대하는 바를 거부하기로 했다.
“…리에라는 아이는 귀엽더군. 당장은 머물도록 내버려 둬라. 그리고 쫓아내더라도 그전에 그들이 머물 숙소가 마련된 걸 확인한 후 내보내도록.”
집사가 놀란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가 괜찮다는 데 그걸 반박하며 자신이 계속 나서는 건 오히려 무례한 일이었다.
황태자가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래야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순간이 아니었다.
“말씀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집사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황태자는 그제야 마음껏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상하게 거리감 없이 다가오는 리에가 남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핏줄인 황제보다도 더 친근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김검천이라는 녀석은 마음에 안 들어. 마치… 황제 폐하를 보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단 말이다. 과연 대회를 위해 그들을 데려온 게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군.”
황태자의 멈추지 않는 고뇌와 함께 시간은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이날은 대회 참가자를 위해 접수를 받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캭캭, 캭캭.”
창문 밖의 괴상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김검천이 기지개를 켰다.
“참새의 짹짹 소리도 아니고 캭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다니 별난 경험이로군…. 쿠퍼?”
방 한쪽 구석에서 서 있던 쿠퍼가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예. 참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캭캭거리는 동물 소리에 일어나는 건 저희들의 일상입니다.”
“그것보다는 네 얼굴을 보니 밤이라도 새운 것 같아서 물어본 거다.”
“어제 황태자와 싸우지 않았습니까? 암살자를 보내도 안 이상한데 잘 수가 있겠습니까.”
김검천이 고개를 돌려 다른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리에는 그렇다 치고 세이야, 샤칸, 심지어 루시엘마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만 빼고 다들 잘 자고 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김검천님이 옆에 있다고 해도 너무 편하게 있는 거 아닙니까?”
쿠퍼의 말에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김검천을 믿기에 저런 모습마저 보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 쳐도 너무 방심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신뢰받고 있다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쿠퍼는 한때 제국 기사였으니 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이러고 있는 걸 테고.
김검천은 쿠퍼에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쿠퍼.”
“예.”
“미리내는 사람과 달리 에너지만 충분하면 24시간 경계가 가능해. 그러니 네가 밤새 그럴 필요는 없었다는 거지.”
“설마 김검천님도 별말씀 없이 주무셨던 게….”
“그래서 나도 푹 잤던 거야. 소리를 무기로 만들 정도인데 잠 깨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쿠퍼가 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서 좌절감을 느끼는 사이 일행들도 하나둘씩 깨어났다.
하품을 하며 일어난 세이야가 쿠퍼를 보며 졸린 음성으로 물었다.
“쿠퍼 아저씨? 아침부터 바닥이라도 청소하시려는 건가요.”
“바보 같은 트롤이다. 청소도 못할 걸.”
“예? 어디에 트롤이 나타난 건가요? 다들 일어나세요!”
아직 잠이 덜 깬 세이야가 쿠퍼의 자조 어린 말에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며 소란을 피웠다.
그 모습을 본 쿠퍼는 트롤 짓을 하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일상생활이 가능하지 않은가.
***
약간의 소동 후 일어난 김검천과 일행들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대회 접수장으로 향했다.
오늘이 마지막 접수일이라 그런지 대회 접수장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회 접수장이 보이자 집사는 그곳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황태자와 그 일이 있어서인지 집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불친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기로 가셔서 접수하면 됩니다. 바로 코 앞이니 길을 잃으실 염려는 없으시겠지요.”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샤칸이 투덜거렸다.
“이 몸은 키가 작아서 안 보이는데.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안내해주면 안 되나?”
집사가 허리 부근에나 겨우 닿는 샤칸을 보면서 딱 잘라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이라 그런지 무슨 말을 해도 거부감이 들었으니까.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 해도 제 소임은 다한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조금만 더 도와주라는 거다. 인간.”
집사가 자신의 콧수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마음 같아서는 어제 황태자에게 저지른 무례만 해도 당장 내쫓고 싶었다.
거기다 일행의 중심인 김검천도 아니고 이종족인 드워프가 강요하듯이 요청하다니.
“집사의 신분으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분란을 일으킨 당신들이 마음에 안 듭니다.”
집사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황태자를 모시는 몸으로 그와 싸우기 직전까지 간 사람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니.
김검천이 중재에 나섰다.
“집사의 말대로 여기서부터는 그가 없어도 우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여기서 의미 없이 말싸움으로 시간을 날리기보다는 먼저 행동하는 게 나아.”
김검천의 말에 따라 쿠퍼가 앞장서서 앞에서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밀치고 나갔다.
괜히 길을 막고 있던 참가자들은 근육질 체구에 험악한 인상의 쿠퍼를 보고 물러났다.
일행들은 그 뒤를 따라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김검천은 맨 뒤에서 일행을 보호하며 나아갔고.
그렇게 움직이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김검천을 부르는 사람은 생각하기 힘드니 그냥 무시하고 접수대로 향했지만.
김검천이 접수대에 도달하자 미리 도착해있던 쿠퍼가 받아둔 접수원서를 내밀었다.
대부분이 쿠퍼에 의해 적혀 있었는데 한군데만 비어있을 뿐이었다.
앉아 있던 접수원이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걸 몰라도 이름 칸에는 참가자 본인이 직접 적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직접 문자로 적어야 한다는 건가.”
“예. 본인 확인을 위한 마법적인 절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바빠서 말은 몰라도 문자는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에 이곳의 문서를 작성할 일도 없었으니까.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문자를 읽는 것은 별개의 일.
사회 집단생활을 하면서 저절로 익혀지는 언어와는 달리 문자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물론 김검천은 언어 변환기가 있기에 이야기가 다르긴 했다.
다만 해당 문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학습에 필요한 시간은 여전히 필요했다.
언어 변환기가 문자를 습득하기 전까지 여기서 계속 대기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자기 이름만 적으면 되니 해당 문자만 알아도 된다고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건 마찬가지.
잠시 대기하는 동안 김검천의 뒤에 대회 출전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었다.
접수를 담당하는 사람은 이런 곤란한 경우를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리라.
그러면 잘 이용해주는 것이 출전자의 모범적인 태도일 것이다.
김검천이 물었다.
“제국이나 공용 문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이라는 걸 증명하는 걸 적기만 해도 되는가?”
김검천의 질문에 대해서 접수원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았다.
제국이 크다고 해도 근처의 몇 개 나라 정도의 규모였다.
공용어가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지적 생명체들이 다 쓰는 건 아니었고.
어딘가 알지도 못하는 소국이나 오지의 부족에서 온 자들이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이다.
어차피 접수원 자신은 결과만 확인해서 접수하면 그만이었다.
“자기 출신지나 다른 아는 문자로 적어도 된다는 사례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일단 쓰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기왕 이름을 쓰는 거 김검천은 한글로 적어 보기로 했다.
김검천.
오랜만에 써보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적어내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접수원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의 글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아름다운 형태의 멋진 문자로군요. 룬 문자라고 불리는 상급 마법 문자와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한글과 비슷한 문자라니.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쯤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김검천이 질문을 던지려는 참에 아까 쓴 이름으로부터 푸른 빛이 솟아 나왔다.
푸른 빛이 한곳에 모이더니 접수원서 위로 손톱만 한 작은 구슬을 만들어내었다.
접수원은 생성된 구슬은 김검천에게 주고 접수원서는 한쪽에 올려둔 채 입을 열었다.
“본인 인증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내일 예선 행운을 빕니다. 그러면 다음!”
그 말을 끝으로 접수원은 다음 대기자를 불렀다.
옆에서 구경하던 세이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접수원서에 기입하는 걸로 다 끝난 건가요? 뭔가 주의 사항이나 설명도 없고요?”
접수원이 이상한 얼굴로 세이야를 보더니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쳤다.
“아차! 제국 문자를 못 쓰는 걸 보면 제국인이 아닐 테니 대회 규칙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지.”
“제국인이라면 다들 아는 것처럼 말하시는 걸 보니 이런 대회가 처음이 아닌가 보네요.”
“제국 역사가 얼마나 긴데 이런 무술 대회가 한두 번 열렸겠나? 이런 규모로는 처음이지만.”
제국 기사였던 쿠퍼도 무술 대회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그가 제국을 떠난 사이 무술 대회 규칙이 변할 수도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집사가 설명해줘도 될 텐데 안 해준 걸 보면 확실히 미움받는 모양이었다.
접수원이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타난 구슬에 적혀 있는 번호에 따라 정해진 예선 장소에 도착하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로 한번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간단한 이야기였다.
물론 대회 규칙은 더 있긴 했지만 그건 예선 장소에 가서 들어도 된다고 했다.
대신 접수원은 한가지 주의점을 더 말해주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그 구슬을 내일 예선전까지는 꼭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요?”
“집에 가야지요. 아, 예선은 내일이지만 대회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길.”
김검천은 작은 구슬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마법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특이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손가락 사이로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루시엘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구슬을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찾기 힘들겠어요.”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기저기서 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손톱만 한 구슬을 이런 곳에서 떨구기라도 한다면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심지어 지금 김검천을 어깨로 치고 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김검천과 부딪히자마자 그대로 뒤로 넘어져 굴렀지만.
마나로 신체를 강화해도 먹힐까 의문인데 일반인의 힘으로 김검천이 어떻게 될 리 없었다.
김검천이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려는데 부끄러워서인지 급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접수원의 말대로 구슬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는데.”
김검천은 파워드슈츠 내 수납공간에 구슬을 집어넣었다.
여기다 두면 오러로 잘라내지 않는 한 잊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내일 시작이라고 했으니 오늘은 저택으로 귀환하기 전 수도를 잠시 둘러보기라도 할까나.”
“찬성입니다!”
무술 대회가 시작되면 시간이 안 날지도 몰랐다.
황제와의 일이 끝난 후를 생각하면 수도 내 지형을 파악하는 것도 미리 해둬야 했고.
김검천 일행이 관광하는 것처럼 수도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갔다.
마지막으로 수도 외곽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어이, 거기 마갑 입은 놈아! 아까 전부터 거기에 서라는 이야기 못 들었냐!”
김검천이 고개를 돌려 보니 험상궂은 남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손에 단검 같은 무기들을 하나씩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