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예선이기도 했으니 대회장을 지켜보는 관객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흥미도 없어 보였다.
그런 참가자들의 시선마저도 한껏 즐긴 예선 심사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마법으로 음성을 증폭시켜서 모인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정도의 크기로.
“다들 모였습니까? 안 오신 분들은 손을 들어보시지요.”
참가자들의 이유 있는 차가운 시선이 예선 심사관을 덮쳤다.
“으하하… 하?”
몇몇 참가자들이 웃기는 했지만 주변의 시선을 느끼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냉랭한 분위기를 읽은 예선 심사관이 헛기침을 하더니 즉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다들 알겠지만 다시 한번 규칙을 말합니다. 죽거나 전투불능, 혹은 졌다고 명백히 항복 의사를 밝히면 탈락. 이 대회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를 항복한 사람들을 위해 안전지대를 알려주는 예선 심사관이었다.
자발적으로 패배 의사를 밝히고 무기를 버려 들어갈 수 있는 마법 구역이었다.
물론 들어서는 순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기에 마음을 바꿔 다시 참가하지는 못했다.
규칙을 들은 참가자들 중에 누군가 손을 들었다.
“질문해도 됩니까?”
“방금 들은 규칙 중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도 됩니까? 그래도 명색이 대회인데.”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대답을 들은 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통 무술 대회라고 하면 투척 무기를 못 쓰게 한다든가 하지 않나?”
“독 같은 것도 사용 못 하게 하더라.”
“전쟁터 같은 곳에서는 죽이면 그만이지만 이런 곳은 분쟁을 막기 위해 제한을 두잖아.”
“다치게 하는 건 그렇다 치고 죽이면 그 원한은 결국 당사자들에게 향하기 마련이니까.”
“실수로 상대를 죽여도 탈락하거나 하지 않던가? 저건 이 몸도 궁금하던 질문이었어.”
아까와 달리 뜨거운 눈길로 예선 심사관을 바라보는 참가자들이었다.
수백 명은 되는 사람들 앞에서 심사관이 의문의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마갑이든 마법 물품이든 어떤 도구나 무기를 써도 문제없습니다.”
참가자들 중 한 사람이 실실 웃었다.
“크크, 그야말로 약육강식이로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건가?”
옆에 있던 사람이 대꾸했다.
“뭘 모르는 소리.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고.”
“말이 많네. 강하든 살아남든 마지막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참가자들 간의 긴장감이 고조되어갔다.
예선 심사관이 참가자들 사이를 지나치며 경고했다.
“본인이 시합장을 나가면 마법 결계가 발생해 시합 종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참가자들 중 일부가 동요하기는 했지만 도망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소리에 도망갈 거면 애초에 대회에 출전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면 대회 시작합니다! 초월 존재의 가호가 있기를!”
예선 심사관의 외침과 동시에 시합장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제국 무술 대회 예선전이 시작된 것이다.
“으아악!”
참가자 중 한 사람이 뒤에 있던 자에게 등을 베여 죽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쓰러진 참가자의 등을 벤 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크크, 어차피 우리들 중 한 사람만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하니 원망은 하지 말라… 컥!”
등을 벤 사람이 다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을 향해 정신을 팔고 있던 그를 다른 참가자가 공격한 것이다.
“그러게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어? 으악!”
공격한 참가자는 다시 다른 자가 공격했다.
혹은 알고 있는 사람끼리 일시적으로 손을 잡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자들도 있었다.
누가 등 뒤에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는 지금 특히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은 김검천이 서 있는 장소였다.
“이 자식, 이런 상황에서 그런 낯짝을 하고 있다니 마음에 안 드는군.”
“울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자기 집에라도 있는 듯한 편안한 표정의 김검천이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은 어색함을 깨트리려고 달려들던 참가자 한 명이 주춤했다.
저 얼굴은 참가자 대기실에 있을 때 제국 용병본부 부길드장이 소리칠 때 본 모습이었다.
용병 부길드장이 자신이 마지막에 처리할 테니 건드는 녀석이 있다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던.
참가자가 고민하면서 중얼거렸다.
“김검천이라고 했던가? 혹시 부길드장이 말한 걸 믿고 이러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아까 김검천에 대해 떠오른 것처럼 그의 다른 본능이 참가자를 붙들어 두고 있었다.
김검천을 향해 달려든다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생존 본능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대회장에는 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공격을 망설이던 참가자 말고 다른 사람이 김검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생존 본능보다는 투쟁 본능에 불이 붙은 자였다.
“여기에 있는 놈들은 모두 적이지. 그러니 너도 처리해주마!”
김검천이 움직이지도 않은 채 다가오는 참가자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 퍽.
“케헥!”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는 몸을 공중에 띄운 채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 위로 쓰러졌다.
김검천이 이미 때려잡은 참가자들을 한쪽에 보기 좋게 쌓아둔 것이었다.
망설이던 참가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그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김검천에게 달려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김검천은 그런 참가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넌 덤빌 거냐? 말 거냐? 빨리 결정을 내리는 걸 추천하고 싶군.”
“널 빼고 가장 강한 용병 부길드장도 쉽게 상대할 실력인 거 같은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다들 알아서 잘하는데 굳이 끼어들 생각은 없다고. 가볍게 준비 운동이나 하면서 기다리는 중이야.”
김검천은 부길드장이 있는 곳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쪽도 열심히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참가자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 김검천이라는 자는 예선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말만이 아니라는 건 방금 전 김검천에게 당한 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용병 부길드장만 불쌍하게 되었군. 너 정도 되는 자의 전력을 상대해야 하다니.”
“전력까지는 아니고 신경을 써주긴 할 거야. 그러는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적어도 싸운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상대와 겨루고 싶은걸. 으아아!”
참가자는 김검천에게 등을 보인 채 다른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껏 대회에 나왔는데 허무하게 당하고 싶지 않아 그를 피해 다른 참가자를 찾은 것이다.
김검천의 실력을 접하니 이곳 대회장의 본선 진출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으니까.
또 다른 한쪽은 김검천이 있는 곳처럼 조용한 게 아니라 다른 장소보다 더 시끄러웠다.
용병 부길드장이 이끄는 패거리들이 주변의 참가자들을 해치우고 있던 것이다.
용병 패거리들은 부길드장을 중심에 두고 2인 1조로 뭉쳐서 상대를 공격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변의 참가자들을 하나씩 처리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길드장 밑에서 일하는 용병들은 혼자서 싸우는 것 말고도 집단으로 싸우는 것도 익숙했다.
적어도 자기 힘만 믿고 무작정 예선에 참가한 사람들보다는 능숙한 것이다.
하급 기사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A급 용병들이 모이니 그 협공의 파괴력은 무서웠다.
용병 부길드장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주위가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협공을 받은 참가자 한 사람이 울분을 터트렸다.
“비겁하게 둘이서 공격을 하다니!”
“으하하! 어차피 한 사람만 본선에 진출하는데 비겁하고 뭐고 어디 있냐? 안 그래?”
“그러게 말이야. 이것도 먹어라! 에라잇!”
한 사람의 공격을 막으면 다른 사람의 공격이 빈틈을 노리고 찔러왔다.
그런 상황에서 막거나 회피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결국 참가자는 손과 발이 어지러워지다가 결국 배에 한칼을 맞았다.
“크아악!”
“흐흐, 어차피 본선에 올라가지도 못할 실력이면 그냥 여기서 죽으라고!”
“그런 실력으로 나오다니 여기에 뼈를 묻으려고 환장했던 거군. 으하하하하!”
참가자는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한 게 억울한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었다.
용병들은 그런 참가자를 향해 침을 뱉었다.
“퉷, 재수 없게 눈을 뜨고 죽다니.”
“우리 손에 당했으니 감사하면서 죽어도 모자랄 판국에!”
한 용병은 죽은 참가자의 몸에서 발을 올려서 힘을 줘 칼을 빼냈다.
칼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 피가 떨어져 내렸다.
용병들은 하얗게 들어갔다 붉게 물들어 나온 무기를 들며 다음 희생양을 향해 달려갔다.
다른 참가자들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때는 대부분의 인원이 탈락한 뒤였다.
김검천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전부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겨우 살아남은 참가자들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심사관! 집단으로 뭉쳐서 싸워도 된다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이요! 이건 무효요!”
예선 대회 심사관으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용병 부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야말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뭘 말이지?”
“심사관이 이 대회의 규칙에 대해서 분명 설명했지 않나? 그 규칙을 어기지만 않으면 그만인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되고 안 되는 건 네가 아니라 대회 운영 측이 정하는 것이지. 예선이 괜히 배틀 로얄 방식이겠나? 본선 진출할 한 사람만 남으면 자기들은 알 바 아니라는 거야.”
여전히 억울한 참가자가 이를 갈았다.
“으드득. 그래도 이건 아니야. 대회 규칙이 그렇다면 용병 길드에 가서 따져봐야겠지!”
남아있는 참가자들이 그 말에 동의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용병 부길드장은 그들에게 콧방귀를 꼈다.
“흥, 그건 증거가 있을 때 이야기겠지.”
“뭐라고? 너희들이 힘을 합쳐 다른 참가자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잖은가? 우리가 증거다!”
용병 부길드장이 용병 패거리들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렇다는데? 너희들 한 패냐?”
용병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뇨. 이놈들과는 처음 보는 사이인데요.”
“전 보기는 봤지만 같은 편은 아니지요.”
“조금 있으면 이 녀석들도 처리할 건데요?”
용병 부길드장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아니라잖아? 너야말로 죄가 없는 용병들을 핍박한다면 길드 차원에서 그 죄를 묻겠다.”
용병 부길드장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용병들이 소리쳤다.
“죄를 묻고 뭐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이 자리에서 이 새끼들 다 죽이자고!”
“그러게. 다 죽으면 항의는 어떻게 할 거야? 크크크크.”
“어이! 빨리 덤벼! 너희를 처리해야 보수가 나온다고. 크하하하!”
- 땡그랑.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눈치를 보던 참가자들 중 일부가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이요! 우리는 여기서 그만두겠소!”
목숨을 건지기 위해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왔다.
처음이 힘들지 그다음은 쉬운 법이었다.
“…졌소.”
“패배를 인정하오.”
“젠장! 졌어! 졌다고!”
- 패배를 인정한 자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대기를. 그 밖에서는 목숨을 보장못합니다.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 자들은 대회장 한쪽 구석에 형성된 안전지대로 도망치듯 움직였다.
대회가 끝나지 않았기에 도망가지도 못한 채 그곳에서 구경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이 안전지대의 마법 결계가 뚫리면 앉은 채로 죽을 수밖에 없었고.
항복한 자들에 대한 마법 격리 조치가 끝났다.
이제 대회장에 남은 건 김검천과 용병 부길드장의 패거리뿐이었다.
용병들이 혼자 남은 김검천을 보고 비웃었다.
“흐흐, 저 녀석을 보라고. 다들 눈치 챙기고 도망치는 와중에 홀로 남아 있잖아?”
“멍청한 놈. 저건 똑똑한 거야. 만약 도망치려고 했으면 우리가 그냥 놔뒀겠어?”
“그러게. 부길드장님이 직접 손을 봐주신다고 했으니까.”
이미 본선에 진출할 사람은 정해졌다는 듯이 떠드는 용병들이었다.
김검천은 그사이 자신이 쓰러트린 참가자들을 안전지대로 다 옮기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김검천이 제 멋대로 입을 여는 용병들을 향해 힘을 싣은 채로 한 걸음 내딛뎠다.
- 저벅. 쿵.
김검천이 내려찍은 발걸음에 의해 약간이지만 용병들의 몸이 지면으로부터 떠올랐다.
신나게 떠들던 용병들이 허둥거렸다.
“뭐… 뭐지? 지진인가?”
“재해냐? 제국 수도에서도 재해가 일어나는 거야?”
재해인 건 맞았다.
김검천이라는 인간 재해가 그들을 덮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