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대표하는 대회 책임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 여기는 황제 폐하께서 친히 여신 무술 대회의 운영진들이 모인 자리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
앞장선 집사가 말을 끊으며 대회 책임자를 노려본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무례한 놈! 이분이 누구신줄 아느냐? 바로 황제 폐하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제국의 적통이신 황태자 전하시다!”
제국 황제, 제국인에게 있어 살아있는 초월존재의 차기 계승자 황태자의 출현이었다.
권력자에 대한 아부는 말보다도 행동으로 나타나는 게 더 빨랐다.
어느새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땅에 박은 대회 책임자가 외쳤다.
“…들어 오면 안 되는 자리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십니다요!”
번개보다 빠른 태세 전환은 어떤 제국 관리에게라도 박수를 받을만한 훌륭한 자세였다.
방금 전 황태자를 향해 누구냐고 말한 자신의 입을 원망하는 대회 책임자를 빼고는.
황태자는 집사가 권한 대회 책임자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 겉치레 인사 같은 건 필요없으니 일어서서 질문에나 답하도록 하여라.”
황태자가 저런다고 정말로 따르면 제국에서 공무 일을 하면서 밥 먹기 힘들었다.
황태자는 진심으로 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이 봐주지 않을 것이다.
일단 앉으라는 말은 못 들었지만 적어도 대답하는 동안에 목숨은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대회 책임자가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옙! 뭐든지 분부만 하십시오!”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다들 일어나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적어도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없으면 여러 가지 의미로 목이 잘려 나갈 테니까.
황태자가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곳을 찾게 된 용건을 꺼내 들었다.
“크흠, 혹시 너희들 중 김검천이라는 자를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태자가 무슨 의도로 사람을 찾는지 알아야 대처하기가 편해지지 않겠는가.
그중 한 사람이 주저하면서 나섰다.
김검천이 참가했던 시합장을 담당한 제3 대회장 예선 심사관이었다.
“소신이 김검천이라는 자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는 제가 담당한 제3 예선 대회장의 우승자입니다.”
황태자가 집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옆에서 모신지 오래되었다.
말을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본 집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를 안내한 곳이 제3 예선 대회장이었으니 같은 이름을 가진 자는 아닐 겁니다.”
“뭐, 김검천 같이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자가 또 있을 까 싶지만은.”
황태자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재 본선 대전표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공평하고 문제없도록 서로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황태자 전하.”
그 말을 한 제3 예선 심사관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이 눈길을 주었다.
저 발언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여기의 여러 사람들이 지는 연좌죄가 돼버린 것이다.
“좋군. 그러면 너희들이 잘 알아서 김검천을 전혀 봐주지 말고 시합에 배정하거라.”
대회 운영진들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된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랫사람은 자세한 언급이 없더라도 알아서 윗사람의 뜻을 파악해야 했다.
특히 제국 같이 권위적인 곳은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데 일을 진행하면 오히려 황태자의 의도와 어긋날 수 있었다.
더구나 황태자는 더 이상 설명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기에 싫어도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표해 대회 책임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송합니다만 저희가 무지하기에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허, 이 사람이. 간단하면서도 화려하게, 고급스럽지만 평범하도록 밝으면서도 무게감 있게 해달라는 말과 같은 뜻 아니겠는가. 이 정도는 한 번에 알아들어야지.”
도대체 그런 말로 알기는 뭘 알아듣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동대륙의 전설적인 경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마음을 듬뿍 담아 집사를 바라보았고.
황태자는 집사의 말에 눈에 불을 켜고 집중하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굳이 자신이 더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자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 황태자의 행동에 고민하던 대회 책임자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높으신 분이 이렇게 나오는데 한낱 하급 귀족에 불과한 자신이 나서기도 그랬다.
옆에서 다른 운영진들이 눈치를 주었지만 어쩔 것인가.
뭔가 아쉬우면 자신들이 나서면 될 것을.
그런 생각이었으니 황태자에게 다시 질문을 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높으신 분도 보통 높은 게 아니라 공식 서열은 황제 다음인 황태자 아닌가.
물론 공식 서열에 비해서는 가진 힘은 적었기에 상대가 대귀족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대회 운영진 같은 하급 귀족이나 제국 관리에게는 초월 존재가 강림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잠시 후 돌아가는 길에 황태자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을 느껴서였다.
“김검천 녀석, 이 정도로 말해두었으니 본선은 고생 좀 할 거야. 저들이 잘 배치해 주겠지.”
***
황태자가 돌아간 후 대회 책임자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누군가 아까 그분들이 하신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 있소?”
다들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의 말도 그랬지만 집사가 설명이라고 내놓은 건 아예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렇다고 거기서 무슨 소리냐고 더 질문했다가는 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목이 날아가는 데는 황태자의 불만 한 마디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들을 상대로는 그렇게 강력한 힘이나 권력이 필요 없었으니까.
물론 그건 직책에서 잘리는 것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목이 날아가는 것도 포함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맞대고 고민했다.
“쳇, 이래서 높으신 분들이란.”
“쉿, 누가 들을지 모르니 조심하게. 황실 모욕죄로 잡혀가면 기본이 사형이라고.”
“헉, 다들 못 들은걸로 해주게나.”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높으신 분답게 말을 돌려 말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아시잖습니까. 이 생활을 하다 보면 높으신 분들 말과 행동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걸.”
그건 모두가 동의했다.
마침내 내려진 결론도 그 의견을 따랐고.
“황태자께서 친히 여기에 방문하셔서 직접 이름까지 언급하실 정도의 인물입니다.”
“봐주지 말랬지만 정말 나쁜 뜻으로 오셨다면 전하의 수행원이 말을 돌리지도 않았을 거요.”
“황태자 전하의 신분으로 우리들 같은 자들에게 청탁하기에는 그랬겠지요.”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의 말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혹은 체면을 차리기 위해 말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부와 뇌물로 점철된 오랜 관리 생활을 지낸 대회 운영진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착각은 자유였으니까.
“김검천, 이 사람을 시드로 출전시킵시다.”
그렇게 황태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은 진행되었다.
결국 김검천은 시드 배정으로 인해 부전승으로 1차전을 무사히 통과했다.
***
다음날.
내일부터 본선이 시작될 대회장을 미리 확인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돌아온 김검천이었다.
오늘은 다른 사람들도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외출을 했다.
김검천이 돌아올 때쯤에는 다들 돌아왔다.
각자 오늘 겪은 일에 대해 간단히 정보를 교환하는데 집사가 찾아왔다.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약속하신 대로 다들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오셨군요.”
김검천이 나섰다.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 주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지. 그런데 황태자의 집사쯤 되면 부리는 사람도 제법 있을 텐데 직접 오다니. 혹시 한가한 건가?”
“바쁩니다만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일이니 제가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책상 위에 올려둔 포장된 물건을 김검천이 만지작거리는 걸 보던 집사가 물었다.
간단하지만 화려하며 고급스럽고 무난한 문양에 밝으면서도 무게감 있는 상자였다.
사람이 갈려 나가는 지구가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내용은 모르겠지만 김검천이 황태자를 어떻게 할 자는 아니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함선에서 가져온 물건을 툭툭 치며 김검천이 대답했다.
“선물이야.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기뻐할 것 같은 배려시군요. 자, 그럼.”
“아아, 다들 이동하도록 하지.”
이동하는 길에 집사와 김검천 일행을 본 기사와 하인들이 차례로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이종족인 샤칸과 루시엘에게도.
샤칸이 루시엘에게 말을 걸었다.
“이상한 느낌이군. 제국의 인간이 우리 같은 드워프와 엘프에게도 허물없이 말을 걸다니.”
“당신 같은 대지 친화적인 존재를 보면 저절로 입이 열릴 테니 신기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도 한번 해보자는 거냐? 이 귀쟁이야!”
“저녁 식사 후에나 하도록 하지요. 식사 전에 당신과 같이 땀을 흘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훈훈한 내용으로 다투는 두 사람을 보며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집사, 당신이 여기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기라도 한 건가?”
“기껏 모셔왔는데 거기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온 첫날과 다음날, 그리고 오늘. 매번 다른 모습이라서 심심할 틈이 없군.”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커흠. 그건 첫날 보여주신 행동도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 주시지요.”
“난 내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누구든 용서하지 않으니까. 나도 좀 더 주의하도록 하지.”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제는 왜 그랬는지 이해하시더군요. 다만 마음속 응어리가 아주 풀리신 건 아닌 만큼 앞으로 그 부분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집사는 어젯밤 황태자가 대회 본부에 몰래 방문한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혹시 나중에 김검천이 알게 되더라도 그냥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김검천만 한 강자와 사이가 나빠지는 건 황태자라고 해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닌 것이다.
김검천도 황태자가 부리는 약간의 심술 정도는 봐줄 수는 있었다.
“받아들이지. 리에와 같이 놀아주는 걸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으니까. 필요에 따라 그를 도와줄 수도, 양보해 줄 수도 있는 노릇이야.”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김검천님.”
안내한 집사가 자리를 떠나기 전 식사 전후로 본선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을 건넸다.
“저는 그러면 이곳으로 바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알리고 오겠습니다.”
안내받은 장소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가 김검천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곧이어 세이야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리에를 보고 인상을 폈고.
김검천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의외인데.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니.”
“너희들이 다 온 다음 한참 있다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 같았나? 그런 건 하지 않는다.”
황태자가 가슴을 펴고 딱 잘라 말했다.
확실히 천성적으로 나쁜 자처럼은 안 보였다.
황태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렇기에 김검천은 변경백이 뒤에서 꾸미는 일이 더욱 신경 쓰였다.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기는 했지만 변경백은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자로 보였으니까.
황태자가 살짝 고개를 돌려 김검천에게 말했다.
“대답도 하기 싫다는 건가?”
“행동을 보니 잠깐 생각할 게 떠올라서 말이야.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김검천의 말에 황태자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설마하니 김검천에게 그런 말을 들을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너도 사과를 할 줄 아는가 싶어서 놀랐군.”
“누가 들으면 내가 예의범절도 모르는 사람처럼 들리겠군. 나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안다고. 상대가 먼저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동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확실히 이쪽에서 잘못한 점도 있더군.”
“이거 미래의 제국을 다스리실 황태자 전하치고는 생각보다 사고가 유연하시군요.”
“젠장, 그러니까 이럴 때만 존칭을 붙이지 말란 말이다.”
어느새 다시 돌아와 황태자의 시중을 들고 있던 집사가 움찔했다.
다 죽어가는 마른 고목같이 항상 감정이 메말라 보이던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김검천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감정일 내비치는 것이었다.
“본인의 허락도 받았으니 이제는 마음 놓고 말해도 되겠군.”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뭐, 좋아. 식사도 왔으니 일단 즐기도록 하지.”
저녁 식사를 가져오는 시종들에게 눈길을 주며 황태자가 말했다.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별일이군. 무슨 변덕이기에 식사에 초대한 거지?”
집사로부터 아침 식사가 별로였다는 반응을 들은 황태자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서 내라고 집사에게 시킨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지만 자신이 불러온 사람인데 그래도 제대로 된 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황태자는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김검천에게 쌀쌀맞게 대할 뿐이었다.
“흥, 본선 첫날이 너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니 이럴 때라도 즐겨야 하지 않겠나?”
“벌써 본선 대전표가 나오기라도 한 건가?”
그때 기사 한 명이 문을 벌컥 열면서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아아아!”
집사가 목소리를 깔며 기사를 꾸중했다.
“무슨 경망스러운 짓이더냐. 황태자 전하의 앞이다.”
“그게 본선 대전표가 나와서 한시라도 빨리 알리려는 마음에 그만…”
황태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과자를 본 아이처럼.